여행을 다녀왔다. 눈 깜짝할 사이 사라져버린 1박 2일의 짧은 여행. 식후에 나온 디저트를 단숨어 집어삼켜버리 듯 다시는 돌이킬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그런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우리 동네라고 느껴질 만큼 친숙한 전주. 이번이 벌써 네번째다. 지금까지 나는 갈 수 있는 여러 방법들을 동원하여 전주에 다녀왔다. 처음은 혼자, 두번째와 세번째에는 기차여행을 하던 친구들과 함께, 그리고 이번에는 다른 친구 한 명과 함께.
나에게 이번 여행은 과연 보통의 여행은 아니었다. 마음을 정리하기 위한, 그리고 마음을 준비하기 위한 여행이었다. 물론 나와 함께 여행을 간 친구가 이 여행을 임한 마음가짐이 어떠했는가에 대해선 알 길이 없지만, 나의 경우는 그러하였다. 사실 여행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마음수련이라고 봐도 무방한 여행이었다. 여행을 시작하기까지 쉽지 않았다. 나는 아주 많은 감정들 속에 뒤섞여 있었다. 내가 당면한 상황들, 그리고 나를 향한 내 안의 두려움들이 아주 뒤섞여있었다.
올해 1월과 2월. 나는 반복되는 트라우마로 인해 가족들과 심리적으로 멀어졌으며, 하려고 하는 일은 자꾸만 꼬이고 잦은 실패를 낳는 통에 극악의 좌절감을 맛보았고, 어떻게 일이 이렇게 맞아 떨어지는지 나와 유일하게 심리적인 교감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사람은 일이 생겨 연락이 끊겨버렸다. 그 바람에 나는 온전히 혼자가 되어 있었다.
그때 나는 다짐했다. 언제나 온전한 혼자가 될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나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어야 했다. 나는 직업을 갖기로 마음 먹었다. 타인에게 구조 요청을 해가면서까지 나를 지키고 싶지는 않았다. (타인에게 나를 의지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심리적인 자립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 울음을 내색하지 않고 괜찮은 척 하는 일은 어느 누구보다 훌륭하게 수행해낼 수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경제적인 자립이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이번 여행을 기점으로 나는 인생의 새로운 국면에 도달하고자 마음 먹었다.
누군가는 지금 내가 준비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배신' 혹은 '패배'라는 단어를 붙일지도 모른다. 사실 나도 근래에 내가 겪고 있는 감정들을 찬찬히 풀어내서 설명할 자신이 없다. 어떻게 이런 결심을 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일이 진행되어 여기까지 왔는지에 대해서는 나조차도 설명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자신있게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그 결심이 '배신'이나 '패배'라는 단어와는 무관하다는 사실이다. 자괴감이 많은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에 대해서는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다. 나의 의지가 꺾여서 선택한 결심도 아니며, 타인의 권유에 설득당한 결과도 아니다. 나는 나의 인생을 새로운 국면 속에 넣고 싶었다. 그동안, 이십대라는 언덕의 절반을 넘어온 지금. 나는 내 마음대로 나의 시간을 조절하며 살았다. 흐르고 싶으면 흘렀고 흐르고 싶지 않을 때는 물길을 막았다. 덕분에 나는 여기까지 왔다. 조금 더 치열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혹은 조금 더 적극적이지 못했다는 것에 후회하지는 않는다. 성 안의 세계와 밖의 세계를 경계없이 자유롭게 넘나들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의 아쉬움이 있지만, 완전히 돌파하지 못한 것조차도 나의 성격이라는 사실에 대해 이제야 나는 인정을 한다.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 이게 나의 삶이고, 이게 나 자신이다. 나는 나의 삶을 인정함과 동시에 지금껏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국면 속에 인생을 집어던지고 싶었다.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지, 지금과 같은 세계가 유지될지, 내가 그 세계에 잘 맞는 사람일지 에 대한 고민들은 하지 않았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국면이자 위기이기 때문이다.
하하. 생각해보면 나는 이미 심리적인 위기 상황은 넘겨버렸다. 살아가면서 이제 더 이상 심리적으로 괴로울 일은 없을 것 같다. 최하의 감정을 맛보고 나니 최상의 감정에도 행복하지 않다. 이제 더 이상 나는 진심으로 웃지 못할지도 모른다. 지금은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20대 후반에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도 혼자 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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