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 28일 월요일

블랙 스완을 보고 왔다. 거두절미하고 이 영화 너무 재밌다. 너무 재미있어서 러닝 100분이라는 긴 시간이 한 순간의 연기처럼 사라진 기분이다. 시간을 잡아먹도록 흥미진진한 영화 너무 오랜만인거 같다. (요즘 본 영화들 대부분이 재미는 있었지만 시간을 장악할 정도로 흥미진진하진 않았었다)



한 사람의 몸 속에서 벌어지는 the white 와 the black 의 대결구도. 일반적으로 우리들의 입을 통해 오르락 내리락 하는 선과 악의 이분법에서 벗어났다는 점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옳다, 그르다 라고 판단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해지는 그녀의 무대 위, 그녀만의 꿈과 고통. 꿈과 고통을 넘나들며 고통에 젖어 있는 자신을 보며 흘렸던 눈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간절했던, 황홀한 관객들의 박수 갈채 앞에서 그제서야 그녀는 자신의 무대에 만족해한다.

2011년 2월 20일 일요일

블로그의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다. 이 블로그만 들어오면 잘나가던 인터넷도 먹통이 되는지라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었지만 썩 나쁘진 않은 것 같다. 그저께는 친구의 졸업식, 어제는 두번째 텝스시험, 오늘은 내일 놀러갈 것들을 정리하고 준비한다고 정신이 조금 없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스키장에 놀러가는데 어떤 재미난 일들이 일어날지 설레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걱정도 된다. 다치지 말고 돌아와야 할텐데.

디지털카메라를 새로 샀다. 몇 년을, 몇 달을 벼루고 벼뤄서 결국 하나 사버렸다. 엄마의 힘을 조금 빌렸지만 나의 소유라고 명명해놓고서 기계를 산 것은 전자사전 이후로 처음인거 같다. (핸드폰도 있지만 핸드폰은 소유라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기에 너무 소소한 필수품이 되어버린듯..) 필름 카메라만 전문으로 사용하기에 나의 능력이 아직 벅차다는 생각이 들어 마련한 것인 만큼 많이 찍고 열심히 공부해야겠다.

요즘 질투가 꽤 많아졌다. 마음의 거울에 비친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나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타인들을 바라본다. 타인들의 멋지고 예쁘고 아름다운 모습들에 비해 나는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수정이 필요하거나 부족한 부분들을 지긋이 들여다보면 화가 나기도 하고 샘이 나기도 한다. 하지만 꽤나 좋은 질투라고 생각한다.

한 때는 일상의 속속들이 사건들을 기록해야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어쩐일인지 특별한 사건이 나를 가로질러가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왜일까. 그래서 블로그의 글도 뜸했던 건가. 글로 담아낼 수 없는 수만가지의 생각들과 감정들과 사건들을 글로써 나열하는 것에 대한 새로운 권태가 생긴 것 같다.

새로워지고 싶다.

2011년 2월 11일 금요일

남는 밥 좀 주오.





노동법률과 규제가 있지만 그것들이 소용 없어 지는 곳이 바로 영화판이라 하셨다. 작가 뿐만 아니라 스탭들에게도 영화를 찍는 시간은 가혹하다. 스탭 막내의 임금은 50여만원 정도, 24시간 풀 가동되는 노동에 비해 턱 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그것도 운이 좋은 경우다. 받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니까. 요즘 워낙 영화판에 돈이 메마르다보니 만드는 사람도, 찍는 사람도, 쓰는 사람도 힘이 빠지긴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 바닥에서도 남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을 만큼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 부익부 빈익빈, 자본의 탐욕, 불합리한 합리화는 고결한 예술 앞에서도 죽는 법이 없으니까. 영화를 수단으로 많은 돈을 벌고자 했던 자들은 온갖 핑계거리로 없는 돈마저 쓸어가고, 그 때문에 어제 밥을 굶었던 누군가는 내일마저도 굶게 된다.





누군가는 최고은 작가의 죽음을 직업적 희생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자신이 선택한 삶인데 나보고 어쩌라고, 원래 배고픈 직업인 줄 알고 선택한거 아니야?, 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니까 상관 없어.





인간 사회에서는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와 대우가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사회에 그런 고귀한 것들이 존재하고 있는가? 언젠가 추적 60분의 삼성 반도체 노동자들의 암투병에 관한 실정을 본 적이 있다. 삼성은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인 기업이고 현대는 자본주의 사회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 투자로 큰 이윤을 남기는 것은 회사를 유지하기 위한 타당한 목적의 근거가 된다. 일단, 우선의 이익창출을 위해 공장을 돌린다. 설사 공정 과정에서 공장 노동자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물질이 검출되어도 상관없다. 돌리고 본다. 공장이 멈추는 것은 곧 자신들의 성장과 시장의 멈춤과 같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하여 돌린다. 3교대, 6~8시간을 훌쩍 넘긴 노동시간에도 아랑곳 않고서 돌린다. 자신들은 그들에게 연장 근무의 월급을 주기 때문에 당연한 행위라 생각한다. 건강검진 결과에 납중독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장 설비를 재정비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꽃다운 나이에 암으로 죽은 노동자들의 죽음 앞에서도 사람의 죽음보다는 회사로 날아 올 치명타를 두려워한다. (자신들의 행실이 그릇된다는 사실은 아는 모양)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아무리 기계가 공장을 장악했다 할지라도 아직까지는 사람 없이 모든 생산이 완벽하게 이루어 지지 못한다. 공장은 사람을 위한 물건을 만들어내기 위해 땀과 노동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노동자들)의 공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곳에 진정한 사람의 가치와 의미가 존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아마도 삼성이 노동자들에게 최소한의 인간적인 도리만이라도 해줬다면 이런 방송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노동자들이 원하는 것은 위로금을 가장한 억만금의 입막음용 돈이 아닌 인간적인 최소한의 대우였다. 아무리 고용주와 고용된 자의 관계가 돈으로 빚어진다 할지라도, 그 속에 최소한의 인간적 대우만 있었더라도 이 사건은 지금과 달리 다소 누그러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인간이 사는 사회에서 인간 타령을 하는 것이 조금은 한심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날이 가면 갈수록 인간의 존재와 가치는 몰락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시기 인간을 운운하는 것은 신파적인 것이 아닌 필연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꼭대기 층에 편하게 앉아 돈만 만지는 사람들조차도 돈 속에 잠식되어 자신이 사람인지 돈인지, 자신이 정녕 무엇인지 잊고 살아가는 것 같다.





최고은작가의 가난했던 죽음과 삼성 반도체 노동자들의 죽음은 결코 숭고하지 못하다. 그들의 죽음은 퇴폐되어가고 있는 현실의 아픈 증상이며 미래에 일어날 소리 없는 분란의 조짐이다. 사회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보고 있는 나의 시선이 나 자신조차도 편치 않다. 하지만 이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거나, 그들의 죽음이 그들의 개인적인 삶이나 운명이기에 당연하다 여기거나, 늘상 일어나고 있는 직업적 현상의 한 부분이라 생각하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아마도 이런 시각들은 후에 지금 내가 느끼는 부정한 사회의 모습보다 더 비참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여기서 얼마나 더 더럽혀져야 양반다리로 꼭대기에 앉아 내려다보기에만 익숙한 자들이 자신의 돈방석을 위해 압사되었던 인간적 고통들을 알 수 있을까. 모든 사람들이 다 죽고서 돈 더미에 묻힌채 자신 혼자 남았을 때, 그제서야 최소한의 인간적 의미를 배려하지 못한 자신을 후회하려나.

우리는 우리가 인간임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한다.

2011년 2월 6일 일요일

생각해보니 스트레스가 마구 마구 쌓여있는 듯 하다. 눈이 자주 침침해진다. 읽다 지친 책들과 단 한글자도 끄적이지 못한 노트가 연민스럽게 흩어져 있다. 기분이 꽤나 울적하다.

새로운 2월.
희망
에 대한
새로운 노래를 읊조릴 시간

모든 것들이 잘 지나가기를
내가 그 모든 것들의 징검다리를 무사히 건너기를

앞만 보고 달려간다는 무서운 말은 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다시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데 많은 시간을 쏟고 싶지도 않다. 사실 그래서 어떻게 해야할지 아직 잘 모르겠다. 일단 걸어가긴 하는데 차마 발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풀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발걸음은 아직 굳게 얼어 있다. 얼음이 녹기 위해서는 따뜻한 온기가 필요하건만 그 온도를 도대체 어디서 찾아야 할지 잘 모르겠다. 한 마디로 현재 나는 일시 정지의 상태. 더욱 힘차게 자가 발전기를 돌려야 겠다.

동네에 새 볼링장이 생겼다. 어제 운동을 마치고 나오던 길에 친구의 연락을 받고서 가서 실컷 치다가 새벽 열두시가 넘긴 것을 확인하곤 헐래벌떡 집으로 뛰어왔었는데, 그 덕분에 온 몸이 찌뿌둥하다.

몇일 전에 동계 아시안 게임을 시청하다가 갑자기 울컥 했었다. 분명 우리나라 선수는 신나게 1등으로 달리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어이없게 기분이 울렁거렸다. 저 한 경기에 출전하기 위해서 선수들은 몇 년 씩을 자신을 혹사시키고, 한번의 성취감을 위해 숱한 슬럼프와 온 몸의 고통을 견뎌내는구나, 장담할 수 없는 승산을 위해 자신의 젊음을 바치고, 때로는 실패로 절망 속에 자신을 내던지는건가, 그 삶은 너무 무모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들이 뒤죽박죽 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나의 삶을 연민하고 있었다. 울컥, 울컥. 가혹하지만 멋진 그들의 젊음 앞에서 나의 젊음은 너무 보잘 것 없었고, 나의 몸뚱어리는 언제나 작디 작은 나의 골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두통이 넘실거렸다.

가치에 관한 혼란에 빠졌을 그 때, 누군가가 나에게 해줬던 조언을 잊지 못한다. 나는 그 말에 아직도 나를 의지하고 있으며 동정받기를 원하는 동시에 증오한다. 세상의 모든 것들에게는 가치가 있으며 의미있다는 그 말. 그건 일종의 물과도 같은 말이었다. 인간이 지구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당연하게 존재했었던 그것. 그 존재와 가치와 의미. 물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이면서도 가장 만연한 요소이다. 고로 그것은 굉장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면서, 없을 수도 있는 존재이다. 너무 당연하게 존재하니까. 나의 존재의 가치 또한 그것과 다름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단순히 '평범하다' 라는 개성의 만연화와는 다른, 가슴 속으로 형용할 수록 더욱 비참해지는 그런 것.

나는 그래서 더 많은 것을 갈구한다. 하지만 그것들이 전부 나의 손아귀로 들어오지 않는다는 절망스러운 사실을 알고 있다. 언제나 나의 삶의 일부는 미완성으로 끝난다는, 그 허무한 그늘 아래에서 내가 찾을 것은 행복보다는 절망이고 충만함보다는 결핍이다. 어쩌겠나. 그게 나인걸. 여전히 믿고 있다. 행복과 절망의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그것들은 분명 극과 극의 장소에 존재하고 있지만 그 원천은 동일하며 그 곳에서 풍기는 에너지는 언제나 화사롭다는 것을.

진짜 2011년이 시작되었다.
p.150 안나 카레니나 1

나도 마치 스위스의 산줄기에 걸려 있는 것과 같은 그 하늘빛의 안개를 기억하고 있고 또 알고 있어요. 그 안개는 바로 유년 시절이 끝나가는 그 행복한 시기에 온갖 것을 가리우고 있죠. 그러나 그 거대하고 즐거운 세계에서 나오면 앞길은 차츰 차츰 좁아져요. 겉으론 밝고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외길로 들어가는 것이 즐겁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한...... 우리는 누구나 다 이런 길을 지나오게 마련이죠.


p.109 인간 혐오자

(알세스트) 솔직하고 진실하다는 장점 때문에 저는 다른 사람을 감언이설로 절대 속이지 못하지요. 자신의 속내를 숨길 줄 모르는 사람은 궁정에서 버틸만한 여지가 거의 없어요.
..
하지만 그런 특권을 잃는 동시에 아주 어리석은 바보노릇을 하는 서글픔을 겪지 않아도 되지요. 쓰레기와 다름없는 사람들을 상대할 필요가 없고 그 어떤 나리들의 시를 찬양할 필요가 없고 그 어떤 귀부인을 칭찬하지 않아도 되고 우스꽝스러운 후작들의 재치를 들어 줄 필요도 없으니까요.

p.145

(필랭트) 난 자네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해. 세상의 모든 일이 결탁과 이해관계에 얽혀 있으니까. 하지만 계략이 통하는 사회가 오늘만의 현실은 아니야. 이제는 사람들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해. 사람들이 공정하지 않다고 그들의 사회를 떠나는 이유가 성립이 될까? 인간들에게 여러가지 결점이 있기에 우리가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것 아니겠나.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의 가장 큰 미덕이거든. 만약 모든 사람이 성실하고 솔직하고 정의롭고 고분고분하다면 대부분의 미덕은 소용이 없어. 왜냐하면 미덕이란 우리가 정당한 가운데서 타인의 불의를 담담하게 견뎌낼 때 발휘되거든.



p.108 사회에 관한 새로운 의견

한 아이가 자기 주변의 물건이나 사람에 관해 충분하고 공정한 설명을 들을 때, 그리고 그가 올바로 생각하도록 배울 때, 그 아이는 거짓에서 보편적인 진리를 깨닫도록 배울 수 있다. 비록 문자나 숫자를 전혀 모르더라도 그 아이는, 믿음을 강요당해 왔고 가장 잘못된 학습 방식 때문에 생각하는 능력이 혼란에 빠지거나 파괴된 아이들보다 교육을 잘 받아들일 것이다.


p.33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인간 본성이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본성을 구상하기 위한 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구상하는 무엇이며 또한 인간 스스로가 원하는 무엇일 뿐입니다.

p.38
(불안과 자기기만)
우리는 일종의 자기기만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이 불안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지를 못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