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22일 화요일

그대 내부를 보라. 자신을 알고, 자신에게 몰두하라. 다른 곳에서 소비하는 그대의 정신과 의지를 자신에게 되돌려라. 그대는 자신을 흘려 보내고 흩어 보낸다. 그대를 집중시키고 자신에게서 버티어라. 사람들은 그대를 배반하고, 그대를 낭비하며, 그대를 그대로부터 훔쳐간다. 그대는 모르는가. 만물이 자신의 눈을 내면에 집중시켜 자신을 바라보기 위하여 그들의 눈을 그 자체의 관찰을 향해 열고 있음을. 그대에게는 안팎이 언제나 비어 있다. 그러나 비어 있는 공간이 좁으면 그만큼 비어 있음도 적다. 신은 말한다. '인간이여, 너를 제외한 모든 것은 먼저 자신을 연구한다. 그리고 자신의 필요에 따라 자신의 일과 욕망에 한계를 정한다. 그대는 우주를 포섭하고 있으나, 그대만큼 공허하고 빈곤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p.77 몽테뉴의 숲에서 거닐다


몽테뉴가 추구하는 고독의 내면은 니체의 고독과 아주 닮아 있다. 아마도 그건 니체가 몽테뉴를 스승으로 존경했던 이유이자 사실 그 자체를 보여주는게 아닐까. '달아나라, 달아나라, 너의 숲으로' 우리들이 고독이라는 처절한 감정과 같은 마음 속의 숲으로 달아나는 일이 힘든 까닭을 니체는 이렇게 설명하였었다. '너'라는 말은 '나'라는 말보다 훨씬 오래 되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나'라는 존재에서보다 '너'라는 존재에게 달려가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귀착하는 것을 편안하게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대해 각기 다른 입장을 보일 수도 있으나 적어도 나에게는 유효하다. 언젠가 나는 나의 존재를 찾기 위해 타인에게 나 자신을 구걸했던 적이 있었다. 그 때의 감정이 아닌 이렇게 글로 적으니 비참하게 느껴지는 기분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 때의 나에게 그것은 비참함이 아닌 절박함이었다. 더 자세히 이야기 하자면 타인에게서 나의 존재를 찾는 상황 자체에 대한 절박함보다는 상대에게 아무리 매달려 보아도 나의 존재를 찾을 수 없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섞인 절박함이었다. 아마도 연민이 필요했던 시점이었던 것 같다. 또한 혼자의 시간에 대한 겸허함이 필요한 시간이기도 했다. 지금, 내가 감히 그 시간들을 잘 지나왔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는 나를 직시하고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가끔 그 침묵이 진짜의 침묵으로 변질되는 것을 분간하지 못해 답답한 적도 여러번이지만..) 나에게 또 다른 침묵을 선사해 주었던 그의 말과 행동처럼 나 또한 번잡한 도시의 시끄러운 거리에서 달아나 겸허하고도 고요한 숲 속의 나무 아래에서 침묵을 사랑하겠노라고 다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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