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27일 일요일

가끔은 살기 싫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나는 결사코 나의 목숨을 연명하는 일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나는 내가 살아가는 이 세계가 지겨울 뿐이다. 단지 싫을 뿐이다. 단지 환멸을 느낄 뿐이다. 멀미가 날 정도의 환멸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나면 삶에 대한 의욕이 뚝 떨어진다.

왜들 그렇게 조급한지 모르겠다. 자꾸 채근을 한다. 너는 언제 인턴을 시작할 것이냐, 구체적인 너의 삶의 계획은 무엇이냐, 어떤 직장에 취직하고 싶으냐 등등.  가장 듣기 싫은 말은 내 인생을 뻔히 보고 있다는 듯한 거만한 뉘앙스로 나의 장래를 점지하는 말들이다. 신물이 울컥 솟구친다. 넌더리가 난다.

나의 세계 안에서 나는 한번도 내가 이상주의적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몽상가가 아니었다. 단지 나는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판단을 하고 싶었고, 사람에게 사랑스런 연민을 품을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이런 바람들은 나의 외부 세계와 언제나 충돌. 충돌로 인해 무참히 부서진 마음의 잔해들은 편린처럼 기억 속에 여전히 박혀 있다.

기억의 상처에 뒤엉켜 나는 지독한 환멸을 느낀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계가 과연 있기는 한걸까.
나이가 들어갈수록 세상에 대한 괴리가 커지고 있다.
나는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에 직면했고, 이것도 저것도 하기 싫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타인과 나의 각기 다른 가치관 충돌이라고는 납득할 수 없을 만큼 환멸적인 세상이 여기에 있다. 옳고 그름의 경계는 흐트러진 지 오래이다.

속상함은 끊이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

2011년 11월 25일 금요일

살다보면 누군가와 만남을 갖거나 혹은 어떤 일을 할 때, "싫으면 할 수 없고." 라는 말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존재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직 잘 납득이 되지 않는 말이다. 그건 아마도 심리적인 요인 때문일지도 모른다. 특히 그것이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문제일 경우에는 불편함이 배가 된다.

타인이 나를 싫어하는 상황을 나는 아직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모든 이들이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아니다. 단지 나는 누군가에게 모난 사람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이 싫을 뿐이다. 그의 기억 속에 혹은 나의 이름을 올리는 그의 입에 내가 모난 사람으로 남는다는 건 분명 비극이며 수치이다. 그 자리에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의 말이 남긴 그의 기억 속의 나라는 존재는 쉬이 무시할 수가 없다. 괴롭다. 그래서 나는 안과 밖이 다른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안의 내 모습, 나의 말들은 밖의 상황에 따라 종종 무시되곤 한다. 그리고 주눅이 든다.

"싫으면 할 수 없고."
속 시원하게 말하고 싶다. 요즘 말대로 정말 쿨한 척. 이 세상에서 나 혼자 쿨한 인간인 척. 쉽게 내뱉고 싶다. 그리고 타인의 시선에 한정될 수 밖에 없는(시선의 폭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 또한 내가 특정한 타인에게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은 한정적이니) 나의 이미지에서 탈피하고 싶다.

2011년 11월 23일 수요일

p. 37
  나라 전체로서는 정직함에 기댈 것이 아니라 필연성에 기대야 한다. 잘 살고 못 사는 것을 공무원과 정치인의 미덕과 양심에 기댈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그들의 법질서는 언제까지나 불안할 것이다.

p.43
  맨더빌은 사람의 마음과 행동을 위선적으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했지만 또한 위선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우리는 위선이 아니고서는 사회적 동물이 될 수가 없다. (......) 제가 하는 속생각이    
       남에게도 고스란히 다 드러나게 되어 있다면, 말을 할 줄 아는 이상, 남에게 상처받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장례 치르는 사람은 남의 죽음으로 돈을 벌지만 남들이 더 많이 죽어줬으면 좋겠다는 말은 꺼내서는 안되며, 남의 죽음 앞에서는 기쁘더라도 슬픈 시늉을 해야 한다. 그렇더라도 그것이 참된 속마음이라 믿고 도덕과 사회제도로 그런 믿음에 맞추어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남들 장례로 돈을 벌게 되어 좋다고 생각하거나 남의 죽음이 진실로 슬프게 생각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비난할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사람이 저를 먼저 생각하는 자연스러운 본성일 뿐이다. 달리 말하면, 위선 자체는 받아들일 수 있으나 위선에 대한 위선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자 했다.
  문득 내가 갈구하는 세계는 어떤 곳인가라는 물음이 가슴 속에서 치솟았다. 그 물음에 마음이 동해 나는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일상 속의 소소한 수다나 사소한 어긋남이라도 좋으니 오늘은 이곳에서 마음껏 회포를 풀고 싶다.

  '세계'란 단어에 하나의 이야기를 떠올랐다. 동화책 속의 이야기나 소설 속의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로 구축된 하나의 세계 말이다. 쉽게 말해서 가상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여기서는 실현될 수 없는, 오로지 이야기적인 세계. 나는 그런 세계를 무척이나 동경하는 사람이다. 그 세계가 가진 미덕은 현실을 반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기분에 젖을 수 있다는 사실에 있는데, 나는 그 점이 무척이나 좋다.

  여기서 어긋나는 이야기와 인연들 혹은 우연들이 그 곳에서는 당연하게 성립될 수 있다. 여기서는 불가능한 행복들이 거기서는 완벽해질 수 있다. 아. 갑자기 슬퍼져 온다. 그토록 행복한 세상이 여기서는 실현될 수 없다니. 아니, 더 깊이 말해서 그런 세상이 전혀 실현될 수 없다는 전적인 믿음이 내 안에 뿌리내려 있다니. 일종의 회의감이다. 그리고 비애이고 처연함이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과연 미래를 살아갈 수 있을까. 시간은 앞으로 흐르는데 자꾸 나는 뒷걸음질 치고 있는 기분이다. 도태와는 또 다른 어조의 소외.

2011년 11월 15일 화요일

그 동안 잊고 있었는데 가족들과 불화를 겪은 그 날 이후부터 사실상 나는 어느 정도의 경제적 독립을 했나 보다. 물론 자의가 아니었기에 독립이라는 단어에 어폐가 있긴 하지만.

방금 전 뜬금없이 엄마가 물었다. 9,10월 두 달치 핸드폰 요금은 어떻게 했냐고. 난 당연히 대답했다. 내지 않았으니 미납된 상태가 아니겠냐고. 그런데도 핸드폰 사용이 가능하냐고 엄마는 물었고, 나는 이런 질문이 안겨주는 식상함에 기분이 상해 말을 막 해 버렸다. 그런데 그러고 나니 속이 더 상한다.


안그래도 오늘 아침에 핸드폰 고지서를 받아 든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었다. 두 달치 핸드폰 요금이 자그만치 12만원. 하나의 문장만이 머리를 때리고 지나갔다. '감당할 길이 없다.'

더욱 더 슬픈 것은 지금 신문요금도 두 달치, 아니 이젠 석 달치나 밀렸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오만원이다.

결국 합을 하면 자그만치 17만원을 나는 당장 만들어야하는 셈이 된다. 그냥 앞 길이 막막해졌다.

비탄이 쏟아진다.

2011년 11월 13일 일요일

요즘만큼 살아있다는 기분을 투철하게 느낀 적이 없었다. 정신적 식량을 마구 마구 씹어 먹고 있다. 먹는 족족 모든 걸 소화하고 있진 않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다. 오늘은 지가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를 봤다. 영화를 보면서 어제 정성일 선생님의 말씀을 듣길 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본다'는 것의 의미, 그 동안 지각하지 못했던 나의 눈과 뇌에 그려지는 스크린의 상관관계. 영화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지만 가장 쉽게 간과되는 것들, 그 모든 것들이 베르토프의 영화 속에서 환생하고 있었다. 참으로 의미있는 일이다. 이 시대에 베르토프의 영화를, 정성일 선생님의 말씀을, 영화의 본질이 지닌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참 많다.
오늘, 하나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새벽이다. 하루동안 많은 양의 영화를 봤더니 눈이 아린다. 뇌는 용량 초과 상태이다. 영화에 대한 수다를 떨고 싶지만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면 끝이 없을 것 같다. 오늘은 일단 마감해야 할 것 같다. 내일이 다시 오길. 내일은 또 다른 선물을 나 자신에게 줄 예정이다. 물론 그 선물은 싱겁게도 오늘과 같은 영화 선물이 될 테지만, '봐야 한다'라는 의무감에 영화를 보는 기분과 '선물'로 영화를 보는 기분은 무척이나 다르니까. 내일의 선물을 개봉하기 위해 어서 잠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