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28일 수요일

한나절 실컷 잠에 빠진다. 늘어지게 아주 얼큰하게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면 묵직한 하반신이 마치 나무토막처럼 느껴진다. 뜬 눈으로 보이는 세상은 이 세상이 아닌것만 같다. 제대로 정신이 돌아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그 때까지의 나는 이 세상 사람도 꿈의 세상의 사람도 아니다. 그 사이에 끼어 나 홀로 굳어간다. 그렇게 긴 긴 잠과 경계의 사이에서 벗어나면, 나는 행복할 정도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만다. 잠들기 전의 나를 괴롭혔던 모든 기억들, 감정들은 기억나지 않는다. 전혀 없었던 일들이 되어버린다. 나의 마음 속에서 밀어내려했던 사람에 대한 미움도 증오도 애정도 별 일이 아니었던 것만 같다. 그를 다시 미워하기까지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지만, 나는 벌써 그 힘들을 꿈의 나라에 다 소모해버렸다. 이 모든 것들이 긍정적 인식의 과정이라면 좋겠다. 하지만 나는 수차례 반복되어진 이런 과정들을 통해 점점 나의 존재와 감정을 소멸해가고 있는 중이다. 내 기억 속에서의 사람들을 이렇게 하나 둘 씩 지워가는 건지도 모른다. 미워했던 사람에 대한 기억도, 행복할 정도로 즐겁게 웃었던 기억도,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의 미소도 나는 모조리 잠의 세계를 통해 지워나가는 지도 모른다.

나는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나의 의식 속의 모든 기억들이 너무나 불투명하다. 처음으로 그것에 초조해져온다. 나의 사랑했던 사람도, 미움도, 괴로움도 대부분이 나에게서 너무나 멀어져있다, 지금.
나는 사실 울음이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녀의 말의 뉘앙스 때문이었는지,
그 카페에 흐르고 있던 음악때문이었는지,
그녀의 입에서 흘러 나온 사랑 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는지,
뭐 때문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순간 나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는 건 아주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어찌할 줄 몰라하는 표정과 동시에 머쓱한 미소를 입으로 짓고 있었다. 사실 그 미소가 그녀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는 걸. 그것을 그녀가 작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면, 그것이 진심과 진실이 아니고 뭐겠냐고.

2010년 7월 27일 화요일

한번도 진심을 담아 하지 않았던 말이 하나 있다. 외롭다.
나에게 외롭다 라는 말은 목구멍에서 톡 하고 메마른 소리를 내며 뱉어내어지는 순간, 그만 혀를 콱 하고 깨물어버릴 그런 말이었다. 이 지경이라면 그건 아마도 외롭다는 것이 단순한 말 이상으로 나의 삶을 구성해 온 일부에 속한다는 뜻이 된다. 그 일부가 부정적이라는 건 읽는 이의 짐작 나름이고. 사람은 정말 겉으로는 알 수 없는 존재이다. 또한 그 사람을 오랜 기간 알고 많은 대화를 나눴다고 해서 알고 있다 라고 말할 수도 없을 뿐더러. 나 또한 나의 글들이 타인들이 기억하고 있는 나의 이미지와 아주 많이, 저 멀리 강 건너편에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게 누군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멀게 느낀다는 걸 알고 있다.

외롭다.
어쩌면 너무나 오래 익숙해져왔기에 나 스스로 그것을 부정하려 든건지도 모른다. 혹은 내가 너무 외로워 타인들이 말하는 외롭다는 말을 공감해 줄 공간을 내어주고 싶지 않아, 일부러 외롭다는 말을 더 기피했다던가. 나는 결코 내가 외롭지 않은 동물이라 생각했다.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외로워지고 싶지 않아 나는 타인에 대한 방어벽을 더욱 철저하게 쌓았는지도 모른다. 고백같은 이 글을 쓰면서 점점 확신이 드는 건, 정말 내가 외롭고 외로웠다는 것이다. 그리고 외로워지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타인으로부터 내 외로움을 보장받으려는 나약함을 거부하고 싶다는 것이다. 나는 두 손이 없다. 절단된 손목만이 나의 외로움과 그간의 세계와의 괴리를 보여준다. 피도 한방울 나지 않는다. 나는 잘린 두 손목을 바지춤에 넣고선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나의 손들이 존재하지 않음을 알지 못하겠지. 어쩌면 나는 그 사실에 쾌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다친 자신의 손을 들고서 나를 찾아와 위로해달라는 그들의 태도에, 나는 보이지 않게 비웃었는지 모른다, 더 잘난듯 행동했는지 모른다. 나는 잘린 손목으로도 이렇게나 의연하게 살아가는데 너는 이런 일로 고통스러워하니? 역시 사람이란 나약해. 라고 나 자신에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라도 내 자신을 다독였는지도 모른다.

나의 글들의 대부분에서는 어렵지 않게 '나' 라는 존재와 '불확실의 단어들' 을 찾을 수 있다. 나는 어느순간 나 자신을 잃어버렸음을 깨닳았다. 그렇게 되기까지 특별한 사건이나 사람을 만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정말 그냥, 마치 저녁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붉게 변하는 하늘을 등에 지고서 양 손엔 묵직한 장바구니 두개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다 문득 돌아본 고개에 전기가 틔인듯, 어떤 메세지가 가슴으로 꽂힐때처럼. 정말 그랬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상 중의 하나였고, 나는 그 메세지 또한 늘 그랬던 나의 일상 중의 하나라 여겼다. 그렇게 잃어버린 나를 떠올리고 나서 내가 가장 먼저 눈을 뜬 것은, 나의 존재에 대한 허덕임과 갈망이었다. 세상 그 어디에도 나라는 조각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 라는 하나의 완성품을 만들고 싶었다. 지금도.

외로움을 비껴가기 위해 만들어 놓은 나의 벽들이 이렇게나 나를 괴롭히고 있는지 몰랐다. 그래. 어쩌면 모르고도 잘 살아갈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 그렇지만 정말 나는 그 벽을 허물어야만 하는 어떤 이유를 가슴에 품고 있다. 그 이유를 위해서라도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가야만 한다. 마음의 한걸음을.

2010년 7월 24일 토요일

누구를 동정하여 사랑한다고 함은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아니함을 의미한다.

이 말은 '참고 견딤' 이라는
뿌리로부터가 아니고
감정이라는 명사에서 만들고 있는
언어들에서도
이 말은 대개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 말이 부차적인 좋지 않은 감정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말의 어원이 지닌 신비한 힘이
이 말을 다른 빛을 띠도록 하여,
그것에 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부과한다.

‘함께하는 감정’ 이란 어원의 동정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함께 체험한다는 것,
꼭 마찬가지로 모든 다른 감정도
함께 느낄 수 있음을 의미한다.

기쁨, 두려움, 행복, 고통 등.
이러한 동정은 따라서 감정적 표상력의 극치를,
감정 텔레파시의 기법을 의미한다.
감정체계에서 그것은 제일 높은 위치를 차지한다.

그녀가 몰래 토마스의 서랍을
샅샅이 뒤졌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오히려 그녀의 두 손을 잡고
그녀 손가락 끝에 키스했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그 순간
스스로가 그녀 손톱 밑의 고통을 느꼈기 때문이다.
마치 그녀의 손가락 신경이
직접 그의 뇌와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테레사를 이해하고 있었고,
그는 그녀에게 화를 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오히려 더욱더 사랑했던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밀란 쿤데라
가장 좋은 것은 텍스트 속에서 그 의미를 알아차리는 것

나는 아직도 알 수 없다. 저 한장면을..
맥락 속에서 예고도 없이 등장한 저 장면을 이해는 하지만 쉬이 받아들일 수는 없다. 사실로 말하자면 나는 저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모를 뿐이다. 바다에서 건져올려지는 쌩뚱맞고도 기이한 손모양 동상을 감정선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분석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해석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사실 나는 지독할 정도로 분석적인 사람이지만, 영화를 분석/해석 한다 라는 말은 영화를 만든 사람을 위배하는 행위라 생각하는데, 우습게도 자꾸만 분석하고 싶어진다.
그래. 그럼 분석을 하면 되잖아. 근데 또 다른 문제가 여기서 발생한다. 나는 자의적인 해석을 하게 된다. 영화 뿐만이 아니라 요즘의 현대미술에서도 부딪치는 문제인데, 작품의 표현이 모호해지고 어려워질수록 관객들에게 왜곡과 오도된 견해를 심어줄 수 있는 의향이 커진다. 물론, 작품과 작가의 의도에 따라 의도될 수도 있겠지만은, 그 또한 관객들에게는 하나의 혼란이기 때문에 작품과의 괴리가 생기게 된다. 작가의 의도를 관객이 바로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이 얼마나 큰 슬픔인가. 그래서 나는 저 장면의 받아들임을 계속 보류하고 있다. 감독의 의도를 알아차릴만큼 지금의 내가 대단한 사람도 아닐 뿐더러, 하찮은 나의 해석이 영화의 영혼을 갉아먹어버릴지도 모르니.

2010년 7월 23일 금요일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안개 속의 풍경' 을 봤다.

음.. 뭐라고 해야할까
이 영화를 보고서 나는 또 다시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에 빠진다. 아빠를 찾기 위한 볼라와 알렉산더의 여정을 보면서, 2시간 가량 나와는 상관도 없는 그들이 있지도 않은 아빠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면서 나는 무엇을 느끼고 어떤 감흥에 빠지는가. 결국 이 감독이 영화를 만든 목적과 이 영화를 대중에게 선보이는 이유, 그러니까 원론적으로 영화란 만드는 사람과 보는 사람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에 대한 자아 성찰이다.

따지고 보면 현실과 가상공간의 스토리는 별로 다를게 없다.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게 현실이라는 말도 있잖나. 그럼 과연 우리들은 현실과 다를게 없는 영화를 왜 만들며,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사건들을 왜 굳이 영화를 통해 보려고 하는가.. 관음증? 대리만족? 감정이입? 재미추구?

어떤 대답도 성에 차질 않는다. 음........

2010년 7월 21일 수요일

아 오랜만에 블로그 진입.
한창 오빠가 빌려준 넷북을 사용하다가 데스크탑의 시원스러운 화면을 보고 있으니 뭔가 기분이 요상함. 또한 노트북 그 특유의 자글자글한 키보드가 아닌 자판이 커다란 키보드를 치고 있으니 오타가 잦다. 쓰면서 오타 고르느라고 조금 짜증이 치솟아 오르려함. 뭔가 불편하군.

지금 내 앞에는 달력이 있지. 벌써 8월의 페이지를 펼쳐보이고 있고. 8월엔 해야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아, 오늘부터 7월의 막바지까지는 8월에 예정될 이들의 준비운동을 하게 될꺼같다. 아아 새로운 날들이여, 어서 오시오. 난 잘 해내고 싶어.

2010년 7월 6일 화요일

이제나 저제나
간절함

집념
원래 세계의 경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머리는 청량한 숲이라기보다는 앞 뒤, 심지어는 양 옆의 구멍마저 틀어막힌 삭막한 구조의 공간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공간 속에서는 무엇이든 자신을 확신시켜주는 꼬리표가 있어야하고 반드시 그와 대조되는 또 다른 무언가가 존재하여야지만 가능했다. 확신과 이분법만으로 세상의 모든 창을 들여다보는 나의 이 머리구조는 단순하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들을 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었는데, 덕분에 나는 한시도 가슴 깨끗한 숨쉬기를 할 수가 없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에 과연 답이 있고, 명확한 정의가 있을까.
내가 만든 이분법은 결국 세상의 모든 것들에게서 뿜어져나오는 모호함에서 비롯되어졌는데, 그것들은 언제나 음과 양 이라는 세계와 그 두 세계를 지탱해주는 중심점을 모두 갖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세계들이 조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자체에 혼란스러워했다. 그래서 내 나름의 선 긋기를 시작하였었다. 결국 그 기준은 무조건 존재해야한다는 이분법을 만들어내었고, 그 이분법적 사고를 통해 나는 둘 중의 어떤 것에 내 자신을 확신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강박을 느꼈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답을 달고 다니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세상을 살아간다기 보다는, 나의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고
세상의 모든 답들은 세상의 도처에 깔려있다기 보다는,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세계관 속에 담겨 있다는 사실을 나는 다소 늦게 깨닳았다. 왜냐하면 나는 '나'라는 존재인식에 굉장히 취약했고, 나를 인식하기 위해 아주 많은 시간을 소모해왔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면 참으로 신기한 공간이다. 나라는 공간은.
내가 만든 나의 이분법적 세계를 허물면서 나는 더 '나'에게 가까워져가고 있고
세상의 답을 찾아가는 나의 창문의 폭은 위로 아래로 그리고 양 옆으로 쭉쭉 넓어져 가고 있다.
내 자신이 아직은 미숙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다는 점 빼고는 나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블로그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