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 12일 목요일

<11시> 이라는 연극을 보았다. 고장난 손목시계 속의 11시 55분, 두 남녀가 만난다. 여자는 위태롭게 지하철 난간에 서 있는데 놀란 남자가 달려와 여자를 제지한다. 술에 잔뜩 취한 여자는 남자에게 참견하지 말라고 하지만, 정작 그의 앞에서 그녀는 눈물을 터뜨리고 만다. 여자는 남자가 안고 있는 피켓에 관심을 가지곤 남자의 품에서 그것을 빼앗아, 신이나서 피켓의 말들을 읊어댄다. '건강한 산모를 죽인 병원을....' 갑작스럽게 발랄하게 글을 읽던 여자의 말들이 조롱처럼 느껴진다. 머쓱하고 미안해진 여자는 남자에게 조심스럽게 피켓을 건내고, 그가 자신이 일전에 블로그에서 봤던 사연의 주인공임을 깨닫는다. 아내를 잃은 남자의 사연이 드러나면서 여자 또한 4년 사귄 남자친구에게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별선고를 받았다는 말을 꺼낸다. 그러면서 자신은 정말 자살이 하고 싶어서 지하철 난간에 서 있었던 것이라며 고백한다. 후에 그들은 살고자는 희망을 말들을 서로에게 던지지만 지하철 사고로 목숨을 잃고 만다.

남자의 아내는 죽었지만 그 대신으로 아이는 살아있으며, 여자는 남자친구와의 아이를 낙태시키는 수술을 하면서 골반염에 걸려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여자로써의 가치를 잃고 절망에 휩싸인 여자는 자신은 살 이유가 없기에 죽고 싶다고 말을 하지만, 남자는 살고 싶어 발버둥쳤지만 결국 죽은 자신의 아내를 떠올린다. 어떤이는 죽고 싶어하지만 또 다른 어떤이는 살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죽어야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박민규의 단편소설을 떠올렸다. 삶과 죽음 그 사이. 죽고 싶어서 목을 매려다가 저 멀리 건물 옥상의 산모가 방금 낳은 자신의 태아를 목졸라 죽이려는 모습을 보고는 그 여자에게 아이를 죽이지 말라고 큰 소리를 친다. 정작 자신은 죽으려고 천장에 줄을 매달아 놓은 상태이면서도 말이다. 아이가 엄마에게서 나오기 위해 통과했던 질의 동그란 입구와 남자가 목을 매려고 묶어 놓았던 줄의 동그란 모양새는 닮았다. 그건 생명의 문과 죽음의 문턱의 닮은꼴을 뜻하는데, 그렇게 삶과 죽음은 닮은 것들이란 것이다. <11시>에서도 여자는 죽고 싶어 한다. 그녀의 죽음이 뜻하는 건 뭐였을까. 완전한 결말? 혹은 도피? 아니면 다른 희망으로의 전진? 나는 워낙 죽음에 관대한 사람인지라 박민규의 소설 조차도 나의 의도대로 왜곡하며 죽음에 대한 예찬을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죽고 싶다는 여자에게 남자는 죽으면 편안은 하겠지만, 과연 행복할까요? 라 묻는데, 과연 나는 죽고 싶다는 말이 행복을 염원하는 말일까 라는 의문을 한다. 죽고 싶다는 말은 현실과 현재에 대한 충동적 도피로써 행복을 염한다기 보다는 불행을 피하고픈 것이다. 사후의 세계는 알 수 없기에 그 세계의 정체는 일단 차후에 두고서라도 가끔은 현실을 피해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분명. 단지 도망갈 수만 있다면.. 그런데 현실에서의 도망은 비현실적이야 란 생각이 드는 순간 우리는 위험한 유혹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선택을 충동적이라 비난할 생각은 없다. 아무리 충동적일지라도 순간의 선택이기 때문에, 나는 분명 그 순간에서도 진심으로 생각하고 했을 선택이기에, 적어도 나는.. 징그러울 정도로 주관적으로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선택에 대한 후회는 하지 않기에. 그렇기에 나는 나 자신의 죽음에는 관대하지만 타인의 죽음에는 관대하지 못한거 같다.

어쨋거나 삶에 대한 가치 판단에 대한 말을 했던 여자에게 나는 연민을 느꼈다. 지하철 난간에 위태롭게 서 있는 그녀를 보며 나는 나를 떠올렸고, 언젠가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은 조금 죽어있지만, 그래도 내 안에서 숨을 쉬는 가치판단에 대한 압박과 고통을 느끼는 나 자신이 떠올라서 나는 그녀가 슬펐다. 그리고 어렴풋한 유년의 기억이 밀려왔다. 어두운 옷장에 들어가 있었던 어릴 적의 기억이..

댓글 없음:

댓글 쓰기

블로그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