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30일 목요일

복효근 시인의 '목련꽃 브라자' 라는 시를 읽으며, 나는 벌거벗은 샐리 만의 사진을 떠올렸다. 그녀의 사진이 벌거벗었다고 표현한 까닭에는 그녀가 그녀 사진의 피사체로 벗거벗은 자신의 아이들의 몸을 삼았다는 점에도 의미가 있지만, 그보다 더 큰 바탕에는 그녀의 사진이 보기에 불편함을 느낄 정도로 벌거벗은 사실과 진실을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사진이 그녀의 시각을 빌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철저히 자신의 주관적 시각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 같다. (적어도 그녀가 자신의 사진에 표현한 의미들을 보면) 아이들의 삶과 성장과정은 우리가 여겼던 것 만큼 평화롭지 않다고 그녀는 말한다. 때론 찬바람이, 때론 폭풍우가 몰아쳐 갈등과 화해와 부끄러움 등 나열할 수도 없을만큼의 감정들이 드러난, 있는 그대로의 아이들의 성장을 표현한 그녀의 사진들. 나는 그녀의 사진 속의 날 것의 느낌을 복효근의 시 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복효근의 시는 샐리만의 사진과는 달리 여자라는 존재를 수치스럽게 하는 무엇이 있다. 그의 시에는 객관성이 상실되어 있기 때문이다. 남자의 시각에서 여성을 바라보는 것과 여성의 아름다움을 (자신의 딸의 사춘기를) 목련꽃으로 비유했다는 점, 그리고 여성의 속옷을 훔쳐보며 여성의 아름다움을 드러냈다는 그 불순해 보이는 과정이 나에게는 퍽이나 불쾌하게 다가왔다. 어쩌면 그 모든 불쾌함의 근원은 훔쳐보았다는 시각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여성의 사춘기를 진실로 표현하기 보다는 남성의 시각에 비친, 어느 정도의 환상성을 가미한 주관적인 시각에서 말을 했다는 점 또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처음에는 샐리만의 사진과 복효근 시인의 시가 은밀한 것을 드러내기에 일맥상통한 작품들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을 하면 할 수록, 그 둘은 확연히 다른 작품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둘은 시각적 본질이 다르다. 샐리 만은 자신만의 시각에서 벗어나 아이들의 삶을 진실 그대로 바라보려고 했지만, 복효근 시인은 아버지의 입장에서 (그리고 남자의 입장에서) 부끄러운 여성의 사춘기를 아름답게 드러내고 미화한다. 복효근의 시가 여성의 사춘기를 미화하고 싶지 않은 나에게는 불순하게 다가오지만, 감히 그의 시가 공공연한 불순함을 담고 있다고 말하진 않겠다. 모든 것이 시각의 본질에서 비롯되는 차이이고 감상이니까. 나는 개인적으로 아름답게 바라보기보다는 드러내려하는 샐리 만의 사진들이 더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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