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31일 월요일

나는 조금 멍청했다. 수강신청을 2주 앞둔 지금에서야 복수전공 공지를 발견한 나... 복수전공 하고싶다고 작년 2학기 시작되자부터 외쳐댔었는데 결국 하지 못했다. 모르고 못했으면 원망이라도 덜한데, 알고서 그것도 매일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갔으면서도, 미처 확인하지 못해서 생길 불찰이라 화는 나는데 어찌할 방도가 없다. ㅠㅠ

아침 목욕을 다녀왔다. 설날 이틀 전이라서 그런지 월요일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복작복작했었다. 대충 예상은 했었지만 막상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있는 걸 보니 심기가 불편해졌다. 탕만 대충 몇번 들낙거리고, 어젯밤에 바른 바디로션 때문인지 밀어도 밀어도 미끈거리기만하고 나오지 않는 때에 신경질이 나 그냥 나와버렸다. 그래도 뜨거운 공기에 땀이 빠져서 그런지 찬바람에 온 몸이 시원해져서 좋았다. 점심먹고서 나른해지는 걸 보니 그래도 목욕했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친구들끼리 책 읽는 모임(아직 이름이 없는 상태)을 마련했다. 주최자는 내가 아니지만, 친구들과 함께 모여 책을 이야기하고 자신들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을 걸 생각하니 뿌듯하다. 몇 십년 전만해도 친구들과 세상과 책을 이야기하는 것이 그리 특별한 풍경이 아니었는데 우리들에게는 책 한권을 읽는 것조차도 모임을 마련해 숙제처럼 (일종의 의무로써) 그것을 행해야한다는게 안타깝다. 섭섭한 일인 것 같다.

그래서 이번주에 읽을 책은 요즘 화제가 되고 있다는 (친구에게 들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현재 절반을 조금 넘겨서 읽고 있는데, 내 호기심에 한껏 불을 지폈던 일상 속의 도덕적 딜레마들이 이 책을 빌미로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다. 하하하. 재밌긴한데 조금 어려워서 지루한 면도 있고 머리를 아프게 하는 구석은 굉장히 많다. 한 챕터 읽고 생각하고, 쉬고, 졸고 를 몇 번 더 반복해야 다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어제는 천국의 나날들 이라는 영화를 봤다. 이 영화를 알게 된건, 친구와 함께 들렀던 헌 책방의 DVD코너에서 였다. DVD 코너는 꼭 살 목적으로 가지 않아도, 그저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는 곳인데, 그 날도 늘과 같이 영화 제목을 구경하고, 내가 봤던 것들과 보지 않았던 것, 보고 싶었던 것 등등을 유심하게 살펴보고 있었다. 천국의 나날들은 제목만으로 나를 사로잡았던 영화였는데, 비싼 가격에 결국 사지 못하고 나왔었다. 그런데 어제 영화 보면서 후회했었다. 사올껄!!

어떤 관계 속에서 나를 얼마만큼 보여줘야하는지, 얼마만큼 양보와 타협과 이해를 해줘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이해는 끝도 없이 해주는게 좋다고 생각은 하지만, 정말 끝도 없이 해주다 보면 결국 끝에 내가 그를 이해한다는 마음은 진솔하지 못한, 관계의 의무에서 비롯되는 껍데기식의 이해가 될꺼같아서 두렵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게 되는 일인데, 어떻게 한도 끝도 없는 이해가 가능할 수 있을까.
항상 관계 속에서 나는 언제나 받아주는 입장인 것 같다. 하지만 그건 내가 나 자신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나와 관계하는 모든 사람들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사람은 항상 자신이 남들로부터 받은 것에서보다 남들에게 준 것에 대한 기억이 더 강하고, 거기서 강렬한 마음을 얻기 때문에 그것이 나 자신에 대한 오해인지 내 안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의 오해인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너무 말이 없어서, 이런 갈등이 비롯되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2011년 1월 26일 수요일

몰리에르의 희곡 '인간 혐오자'에 등장하는 주인공이자 자신의 아집에 갇혀 살아가는 알세스트. 그는 자신이 속해 있는 궁정, 사교계층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마음 속에 숨어있는 진실을 숨기고 타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위선적으로 말하고 속물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불순하다 여기며 진실의 숭고함을 끈임없이 주장한다. 그는 그런 자신의 태도를 당연하게 여기며, 세태와는 달리 진실이라는 세상의 근본적 고결함을 순고하게 지키기 위해 사회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한다. 사회와 사람들의 무리 속에 섞일 수 없었던 그의 올곧은 고결함을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필랭트는 너무 꼿꼿한 그의 태도를 나무라며 누그러뜨릴 것을 권유하지만 그는 그런 그의 조언조차도 위선이라 여기며 쓴소리를 멈추지 않는다. (심지어 사랑하는 여자에게까지, 사랑이라는 매혹적인 감정의 소용돌이에 홀려있는 와중에도 그는 진실의 이성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무수히 노력한다. 결국 그녀가 그에게서 손을 놓아버리지만.) 숨김없이 말하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며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그렇게 해야한다고 말하는 그의 주장에는 틀림없는 진실이 담겨있지만, 친밀한 관계 속에서조차 한치의 타협도 받아들이지 않는 그의 태도는 인색하기 짝이 없다. 분명, 그에게나 우리들에게 진실이 중요하고 또 고귀한 존재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인간 혐오자' 속의 인간 혐오자인 알세스트처럼 무조건 드러내는 것만이 진실로 다가가기 위한 방법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숨기는 것이 진실이 되기도 한다. 숨겨야만 해결이 보이고 모두에게 행복을 주는, 옳은 길이 되기도 한다.

진실이 드러나는 것과 진실을 숨기는 은밀한 통로.
근래에 상류계층에 환멸을 느끼고 인간으로써의 진정한 삶을 찾아 떠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주로 접하다보니 그들의 위선적인 삶과 진실에 대한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인간 혐오자'를 보다보면 그들의 위선과 진실이 충돌하는 선이 아주 극명하게 드러난다. 강직하고 언제나 올곧은 알세스트의 사랑을 받기 때문에 조금은 의아한, 스무살의 나이에 이혼을 하고 모든 남자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또 그것을 잘못된 일이라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여자. 그녀와 알세스트를 흠모하는 또 다른 여자의 대화를 보면, 그들은 다른 곳에서 들은 서로에 대한 헌담을 폭로하며 지금까지 자신들을 포장해주었던 극 속에서의 아름다운 수식어들을 더럽힌다. 하나는 아름답고 친절하며 모든 남자들에게 사랑을 받는 어여쁜 여자였고, 다른 하나는 아름답지도 않고 여성적인 매력은 없지만 여자 알세스트라고 불리어도 어색함이 없는, 보통의 여자들의 매력과는 사뭇 다른 독특한 매력을 가진 여자였다. 하지만 위선으로 포장된 그 둘의 껍데기는 그들이 없는 자리에서 주변 사람들이 꼬집은 헌담, 그러니까 어찌보면 사람들이 직접 말해 주지 않았던, 그들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면서 위선이 가진 양면을 적나라게 보여준다. 포장된 것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거슬리지 않지만, 잘 포장된 포장지가 어쩌다가 벗겨지게 되는 순간은 진실이 제 몸을 고스란히 드러냈을 때보다 더 격한 반응을 몰고 온다. 인간적인 환멸과 혐오는 그 속에서 배로 증폭된다. 그 전제에는 진실을 숨기는, 평온한 상태에는 한계가 분명히 존재하며 인간들이란게 원래 위선이 어정쩡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우스꽝스러운 자태를 더 즐겨하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모든 혐오는 알세스트가 느꼈던 것처럼 진실과 거짓에 있는 것이 아닌 인간의 악한 본성 그 자체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악한 본성만을 보고서 탈사회를 감행한 알세스트는 너무나 고결해 우둔했다고 볼 수 있다. 선한 본성을 치료삼아 인간에게 조금이라도 연민을 가질 수 있었다면 그는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이진 못하더라도 바라보면서 살 수 있었을텐데. 그래서 타협은 위험하면서도 중요한 선택인 것 같다.

무튼 무척이나 재밌다. 이 희곡. 어설프게 웃기도 하면서 단숨이 읽어버렸다. 읽는 내내 주인공들의 옷차림이나 생김새가 상상되어서 더 재밌었다. 아.. 이 말이 제일 멋지고 숨가쁜거 같다. '재밌다' 라는 말.

2011년 1월 25일 화요일

매주 일요일 오전에서 오후로 넘어가기 전 즈음 방영되는 영화 프로그램에서 우연치않게 '아이엠러브' 라는 이탈리아 영화 예고편을 보았었다. 작년인가 제작년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이었다는데(아마도 작년?) 너무 궁금해서 오늘 보러 갔었다. 개인적으로 조조영화를 좋아하는데 이 영화 벌써 조조시간대 잘려먹혔다. 하루에 단 3번 상영, 오후에 하나, 저녁부터 밤까지 두개. 불과 5일 전에 개봉한 영화 시간대를 벌써 잘라먹다니. 아직 지방의 예술영화 환경은 너무나 열악하다. 그나마 여긴 센텀 롯데시네마에서 만든 아트관이라도 있어서 망정이지 안그랬으면 개봉과 동시에 예술 영화를 본다는 거 꿈도 꿀 수 없다. 인터넷 개봉 날짜는 떠 있는데, 서울에서는 상영하는 곳도 많은데, 정작 나는 볼 수 없을 때 얼마나 짜증나는지 모른다! 특수 영화관(시네마테크, 국도예술관)에서 특 별 상 영 을 해주거나 그 곳에 DVD가 입수 되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자칭 영화 도시라고 말하는 부산이 이 정도인데 다른 지방은 아주 그럴 기회 조차 없는거 아닌가 걱정이 된다. 많은, 모든 사람들은 다양한 문화를 즐길 권리가 있는데 그럴만한 기본 요건이 충족되지 못하고 있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무튼, 잡소리 다 넣어두고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기본 정보가 있는 상태에서 갔기에 꽤나 흥미롭게 봤다. 보는 중간에 실잠같은 졸음이 잠깐 들었던 것 빼면.(근데 생각해보면 웃긴게 엠마와 안토니오가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는 장면, 한마디로 야한 장면에서 난 졸았다ㅋㅋ 사실 그 장면을 보면서 그 동안 영화들이 섹스장면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생각했었다. 아마도 그것들은 진심의 사랑을 보여주기보다는 기존의 것들보다 더 야하게 찍을 것을 목적으로 삼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어이없게도 울뻔했다. 너무 너무 너무 울컥하는 그 감동이 단숨에 몰려왔기 때문에.

'아이엠러브'를 소개하는 리포터는 이 영화이 채털리부인의 연인을 닮아있다고 했다. 주인공 엠마는 러시아 출신이지만 이탈리아로 시집을 와 이탈리아 사람처럼 지낸다. 건실하게 아이들 셋을 길렀고 이탈리아의 대단한 가문의 며느리로써 자신의 몫을 다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삶에 지쳐가게 되고 그 즈음 아들, 에도의 친구이자 요리사인 안토니오를 만나게 된다. 처음 그를 주방에서 만났을 때, 그는 우연스럽게도 러시아 음식을 만들고 있었고 엠마는 거기서 자신이 그리워했던 고향의 향수를 만나게 된다. 다음 날 안토니오의 식당을 찾아가고 거기서 안토니오가 만들어 준 새우요리를 먹으며 안토니오에게서 사랑을 느끼게 된다. (이 장면 정말 일품이다. 붉은 새우의 몸과 붉은 그녀의 입술 그리고 그 장면 안에서 묘하게 푸르스름하던 그녀의 눈동자. 접시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면서부터 가게 안의 소음들은 사라지고 오로지 상기된 그녀와 접시만 살아난다. 처음으로 그녀는 이 영화에서 행복한, 물론 비명은 지르지 않는다, 표정을 짓게 되며 그 표정은 마치 지상에서 잠깐 숨을 멎었던 물고기가 물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생기있고 유연하게 미끄러지는, 그 때 그 움직임과 닮았다.) 그러고나서 몇 달이 흐른 뒤, 그녀는 자신의 딸이 동성애자라는 사실과 그런 딸에게 현재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며, 딸이 쓴 쪽지를 통해 그 사람을 향한 딸의 진실된 사랑을 보게 된다. 그리고 엠마는 산로메로 떠난다. 그 곳에서 그녀는 안토니오와 재회하게 되고, 산 속 깊숙이 숨어있는 그의 농장에서 사랑을 시작하게 된다. 온갖 자연이 뿜어대는 소리와 아무 것도 숨기지 않는, 있는 그대로인 자연 안에서 어떤 현실의 무게나 그 동안 그녀를 짓눌러왔던 형식, 격식 따위 던져버리고 엠마는 사랑을 하고 그 속에서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삶의 기쁨을 느끼게 된다.(그들의 사랑의 배경이 되는 자연의 모습과 그 속에서 관계를 맺는 그들의 모습은 다분히 원초적이다. 하지만 이 영화 속에서 그녀의 사랑은 원초적인 사랑이라는 본래의 뉘앙스보다는 한단계 상승되어 있다. 원초적이기는 하지만 감히 원초적이라 말할 수 없는, 어쩌면 엠마의 껍데기에서만 맴돌던 사랑을 탈피했기 때문에 더 성숙하고 인간 근본적일 수 밖에 없는, 그런 사랑.)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안토니오가 우하 스프를 만들어 엠마의 가족 식탁에 올리게 되면서 균열의 조짐을 엿보인다. 우하 스프는 엠마와 아들인 에도의 둘 사이를 애정어리게 이어주던 매개체였다. 다른 가족들은 그 스프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우하 스프는 단순한 스프가 아닌 이탈리아 한 가운데에서 외롭게 자신의 존재를 외치던, 러시아인인 엠마의 향수이며 본질이다. 그 영화 속에서, 그러니까 그 집안에서 우하 스프를 만든다는 것은 엠마의 본질과 영혼과 통한다는 뜻이며. 더불어 안토니오가 엠마에게 바치고 싶었던 사랑인 셈이다. 그것을 눈치챈 아들 에도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사고로 죽게 된다. (돌에 머리를 부딪친 아들의 사고 장면과 병원에서 그의 죽음을 고하는 의사 그리고 가족들의 슬픔을 담는 카메라는 너무 담담하게 절제되어 있다.) 아들이 죽은 사고에 연루된 엠마는 그 죄책감을 떨쳐내지 못한다. (나는 이 장면에서 엠마가 그로 인한 죄책감에 다시는 안토니오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자신이 사랑했던 아들이 자신의 사랑 때문에 죽게되었으며, 자신과 안토니오 사이의 비밀은 아들의 죽음이라는 상처가 되어버렸으니 영원히 그녀의 영혼은 복구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아들의 장례가 치뤄지고 죄책감에 그녀는 남편에게 자신은 안토니오를 사랑한다고 고하게 되고 급히 짐을 싸서 집을 뛰쳐나온다. (그녀가 안토니오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고하는 순간 지금까지 그녀가 쥐고 있었던 남편에 대한 사랑은 뿌리 뽑히게 된다. 그는 매몰차게 그녀에게 말했기 때문이다, 너의 존재는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었다고. 한 마디로 그녀의 가정 속에서 그녀는 엄마이자 아내라는 역할극에 불과했다는 뜻.) 그녀는 짐을 싸고서 아주 편한, 지금까지 볼 수 없을 정도로 평온한 복장을 하고서 등장한다. (이 장면에서 웃은 사람들 꽤 많다. 내 생각에는 그 복장이어야만 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지금까지 보여줬던 상류층의 우아함을 단숨에 벗어버린 터라 누군가에게는 당혹스러우면서도 우스꽝스러웠을 것 같다.) 떠나는 문 앞에서 그녀의 눈은 딸을 향하고 딸은 그런 엄마를 향해 미소 짓는다. 그리고 딸의 애인(여자친구)이 그런 둘 사이의 교감을 눈치채고서 떨리는 눈동자로 딸의 이름을 부르게 되고 집안의 분위기는 술렁인다, 그리고 돌아보면 엠마가 떠난 문은 휑하게 흔들리고 있다.
영화는 이렇게 끝이 난다. 함께 봤던 누군가의 입을 빌리자면 이게 끝이야? 할때 정말이지 끝이 난다. 엠마와 안토니오로 추정되는 두 남녀가 누더기 차림으로 엉켜있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결국 엠마는 안토니오에게 다시 돌아간다. 자신의 아들의 죽음의 상처를 건너 안토니오라는 사랑을 향해 다리를 건넌 셈이 되는데, 왜 하필이면 엠마는 그에게로 돌아가나, 고민이 들었다. 물론 영화 속에서 그녀가 그런 선택을 하는 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왜 굳이 감독은 그런 방향으로 의도한 걸까. 아마도 그건 엠마가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가정 속에서 다시 죽은 듯 살아가기에 너무나 강렬하고 아름다운 생명의 기쁨을 맛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누구도 뿌리칠 수 없는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찬, 생명력이 무르익어있는 순간을 맛보았기에 다시 고통을 느낄 여유가 없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그녀에게 안토니오는 일종의 탈출구였을 것이다. 해방과 생명을 위한 탈출구가 아닌 죽음을 위한 탈출구, 자신의 아들을 죽게 만든 안토니오와 자신과의 관계 속에 자신을 가두어 놓고 벌을 받기 위해 안토니오와의 사랑을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엠마는 톨스토이의 안나카레니나 속의 안나와도 닮은 구석이 꽤나 많은 여자이다. 안나는 이성으로 짝지어진 자신의 결혼 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자신의 남편와 아이를 모두 버리고서 열정적인 사랑을 찾아간다. 안나의 결말은 엠마의 행복한 마지막과 아주 다르지만, 사랑을 선택하게 된 배경과 사랑 앞에서 느낀 두 사람의 기쁨, 환희, 행복함의 감정은 아주 닮아 있다.

아마 이 영화를 본다면 결코 스토리 속에서 불륜이나 신파같은 어리석은 말들을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다 보여주고 설명해주는 것 같은데도 장면들은 비밀스럽고 절제되어 있다. 사랑을 설명하지 않지만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일정한 순서와 스토리들을 밟아감에도 불구하고 신선함을 느낄 수 있다. 적절하게 숨길 때와 적절하게 드러낼 때를 알기 때문이다. 스토리를 위한 영화가 아닌 영화를 위한, 영화적으로 잘 만들어진 영화같다. 무엇보다도 설명하려 들지 않고 화면 구성과 소리를 통해서만 분위기를 보여주려고 한 노력이 멋지다. 내 안에 새로운 영화가 될 듯.

2011년 1월 23일 일요일

어제 오후 3시에 텝스시험 치러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중학교에 갔었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아니지만 동네에서 십분거리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학교가 우리 동네에 있는지도 몰랐던 곳에 가서 시험을 쳤었다. 아.. 학교 콘크리트 벽 너무 춥다. 단순히 춥다가 아니라 이건 마치 불어오는 바람만 막아줄 뿐 냉랭한 공기는 밖이나 안이나 다름이 없더라. 히터 돌아가는 소리가 나긴 나는데 이거 뭐 밖인지 안인지도 모를 정도로 추위에 떨면서 시험을 쳤으니 결과는 말 다한 셈인거같군. 텝스 처음 쳐봤는데 나름 스트레스받으면서 재밌게 쳤던 것 같다. 하하. 이 시험을 치기 위해 공부를 했던 것도 아니고, 그냥 내 스스로의 진단 평가를 위해 순수한 의도로 쳤던 시험인지라 처음 텝스 시험지 받고서 헉 했었다. 문제는 왜 그렇게 많은지, 시간은 왜 그렇게 짧은지, 영어를 위한 테스트가 아니라 영어 기술 평가 테스트네 싶은 생각이 머릿 속에서 종횡무진. 하지만 영어실력을 쌓고 또 테스트를 하기 위해선 현재 시행되고 있는 국가 인정 시험 중에선 텝스가 제일로 나은 듯.(물론 이 판단의 기준은 나에게 있음) 올해 하반기쯤엔 토플로 갈아타야지. 이힛. 영어공부 요고요고, 잊고 있었던 나의 오기에 불을 질러주는군.

2011년 1월 21일 금요일

어제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 연극을 보았다. 알렉산더 젤딘이라는 외국 연출가의 작품이었는데.. 현대적으로 잘 각색된 무대나 의상 디자인은 무척이나 돋보였고 전통극임에도 불구하고 그 세련됨을 잃지 않고 있었다. 덕분에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도 이 시대의 극으로 새롭게, 아주 훌륭히 재탄생시킨듯.

요즘 영상을 가미한 연극들이 종종 보인다. (내가 봤던 현대의 연극에선 대부분 그런 듯) 하지만 지금까지 봤던 연극들 중에서 어제 맥베스가 그 둘의 결합을 가장 효과적으로 잘 사용한 듯. 맥베스의 내면 심리 분위기를 묘사하기 위해 박제 부엉이의 눈을 클로즈업하고 피부색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적외선카메라(심지어 어둠 속에서 적외선 카메라로 본 사람의 얼굴은 창백하면서도 무언가 적나라하고 인간답지 않아 보이는 기묘한 느낌을 준다)로 맥베스의 정면, 측면 등의 얼굴을 불안정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아마 그 영상이 없었더라면 어제의 연극은 이도 저도 아닌 단순히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올리기 위한 목적에 불과한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상 속에 맥베스의 내면이 있었기에 관객들은 그의 심리에 정확하게 초점을 맞출 수 있었고(설령 그 영상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 흐름을 따라 극을 잘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영상과 연극의 궁합이 잘 맞는 연극을 볼 수 있었던 건 정말이지 큰 기쁨이다)

가장 최고의 장면을 꼽으라면 던컨왕의 아들과 맥더프의 무리들이 군사들을 이끌고 온갖 야망과 죄책감에 타락한 맥베스를 처치하러 온 장면인데, 맥베스는 어지러워진 무대의 한 가운데에 앉아 촛불을 들고서 인생이란 걸어다니는 그림자라 말하며 자신의 삶에 대한 회한과 후회, 그리고 이젠 정말 끝에 서 있는, 그 이후엔 아무것도 없는 자신의 삶과 허물어진 야망의 껍데기를 은근히 드러낸다. 그리고 던컨 왕의 아들과 맥더프의 무리들은 무대의 한 가운데에 허무하게 앉아 있는 맥베스의 주위를 원을 그리면서 계속 걸어다닌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 그들이 서로를 마주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 그들로부터 포위를 당하면서 고립된 맥베스의 비극과 최후를 비유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매우 인상적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들과 분위기를 저렇게 눈에 보이게, 그것도 아주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는 구나 라는 감탄이 들 정도로.. 무튼, 어제의 연극에서나 희곡에서나 맥베스의 마지막 그 대사는 정말로 멋지다. 인생이란 걸어다니는 그림자에 불과하다라니... 멋지다.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그 무대가 갖고 있던 현대적 의미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같이 보러 간 친구는 무대가 너무 산만하다고 했지만. 독특하게도 조명이 비추는 곳만을 무대라 설정하고 극을 진행한듯. 그러니까 보통 지금까지 우리들이 보아왔던 연극들에서는 관객들의 눈 앞에 보이는 무대의 전반이 극을 진행하는 무대였고 그 무대 위에서 배우가 연기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 무대의 뒷켠을 만들어 무대 위에서의 자신의 임무가 끝난 배우들은 다음 장면을 준비하기 위해 퇴장을 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내가 배웠던 연극이론에선 그것이 연극의 기본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 연극에서는 그 틀이 무너져 있었다. 조명이 드러나지 않은 암흑의 무대 위에서 배우들은 옷을 갈아입기도 하고(관객들의 입장에서는 다음 장면을 준비하는 그 움직임이 어색했지만 극 중에선 충분히 그 곳을 제 3의 연극 장소로 설정한 듯 했다) 다른 사람들의 연극을 보면서 서 있기도 했다.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기존의 무대가 가진 무대와 무대 밖의 세계에 존재하는 엄격한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의도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중반부에 쌩뚱맞게도 관객들에게 대화를 걸었던 배우의 연기 또한. 무대와 객석의 세계를 흩뜨리면서 관객들에게 혼란을 맛보여주기 위해 의도한 설정인 듯. 물론 그 대화의 상대로 지목된 사람이 함께 갔던 친구라 당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흥미로웠지만 말이다. 배우로 무대에 등장한 사람이 배우가 아닌 것처럼 (마치 진행되고 있는 쇼 중간에 쉬는 시간에 흐름을 끊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미리 준비한 바람잡이 역할처럼) 관객에게 대화를 걸었지만, 정작 관객들은 그 대화에 쉽게 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서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만드는 건 무대를 향한 관객의 딱딱하고도 오만한 시선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오만에는 절대 악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객석에 앉아 배우들의 연기를 어떤 잔치의 쇼를 보기 위한, 연극 속의 관객의 입장으로서 자신들을 연극에 참여하는 사람들 중 하나라고 여기기 보다는 배우들의 모습들을 단순히 보기 위한, 어찌보면 순수한 방관적 목도일 수도, 어찌보면 배우들의 연기를 팔짱끼고 바라보기에만 그치는 수동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오만이다. (물론 이 오만이라는 단어는 연극 자체에서 무대가 갖는 오만일 확률이 크다, 내 생각에는) 그렇지만 그 오만이 부정적이든 단순한 단어이든 간에 어느 누구도 객석의 오만을 탓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건 연극이 발생된 이후로 근래까지 있어왔던 연극이라는 한 장르의 한계의 일부이기에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단순히 경계가 있음과 흐트러짐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수동적인 관객들은 우스꽝스럽게 놀라면서도 신선함을 느낄 수 있으니, 그 시도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보러가면 종종 느끼는 것인데 그의 작품에는 적어도 3시간의 러닝타임이 필요한 것 같다. 어제 맥베스는 1시간 40분 짜리였는데, 짧은 시간 안에 모든 내용을 다 담은지라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보지 못하고 간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많이 버거웠을 것 같다. 배우들과 극이 흘러가는 전개의 속도가 너무 빠르고 허겁지겁이라 여운을 남길 수 있는 지점과 갈등의 중심점이 흐트러지면서 모호해진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던 것 같다.

2011년 1월 20일 목요일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살아가는 곳이라는 말을 납득하기까지 힘이 들었다. 저 말은 세상에 대한 이치와 도덕성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저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곧, 나는 비도덕적이며 불순한 인간임을 증명하는 듯 했기 때문이다. 사실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가슴이나 경험 혹은 무의식적인 마음으로 기억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자주 방문을 닫고 지내고 그렇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게도 생각이나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가족들은 나를 잘 알고 있다. 내가 그들의 귀에 부질없는 말을 잘 내뱉곤 한다는 사실을. 사실 나는 조금 억울하다. 내가 하는 모든 말들은 내가 옳고 당연하다고 생각한 지점에서 태어난 것인데 말이다. 그들의 머릿 속에 들어간 나의 말은 언제나 하나의 생각으로 받아들여지기 보다는, 어떤 시험의 답을 매기는 것처럼 정답이냐 아니냐에 무게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말은 그들에게 언제나 오답이다.

조금 답답한게 무엇이냐면. 나에게 오답이란 다수의 사람들이 행복하고 즐겁더라도 소수의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고통스러워하는 순간, 발생되는 어떤 불순한 원리이다. 그리고 그런 원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세상과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이런 세상의 오답을 너무 정확하게 찝어내기 때문에 나의 말들은 오답이라 생각하고 무조건적으로 반박한다. 한편으로 그들의 의도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아직 사회에 나가지 않은, 적어도 사회생활을 몇 년에서 몇 십년까지 해 온 그들보다 사회와 사회의 때를 잘 모르는 애송이이기 때문에 세상의 그릇됨을 더 적나라하게 발설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은 나를 위해 일찌감치 나의 의식을 고쳐주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도 사회에서 나이가 들고 머리가 더 무거워지면 변할까. 오답을 오답이라 말하지 않고서, 알면서도 그 사실을 숨기고 그저 나 혼자만 잘 살면 된다는 착각을 하게 될까. 변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지만, 오답을 오답이라 말하지 않는 건 정말 나쁜 짓인데 말이다. 이 세상은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라는 말을 믿기 어려웠던 배경에는, 누군가가 나를 걱정해주지 않아도 혹은 내가 누군가를 염려하지 않아도 나는 나 혼자 잘 살고 있다는 착각이 깃들여 있었다. 물론 생각은 그렇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 어느 누구도 혼자 방문을 닫고서 빛도 없고 창문도 없고 누군가와 소통할 구석도 없는 그런 골방에서 오래토록 지낼 수는 없다. 또한 처음보는 사람의 사고나 고통의 현장을 아무렇지 않은 듯 콧노래를 부르며 지나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와 연관되어 있지 않더라도 나는 누군가의 상황 감정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고 그 사람을 연민하기도 한다. 그것이 나와 모든 사람들 사이에 연결된 아주 가느다란 고리이다. 그 고리의 감정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다시는 누군가를 그냥 지나치거나 누군가를 가혹하게 만드는 세상의 오답을 무시하지 못할 것 같다. 시간이 흐르고 내가 나이가 먹어 지금의 우리 엄마 아빠의 나이가 되면 나는 변할지 모른다. 지금보다 욕을 잘하는 사람이 되어 있을 수도 있고, 괴팍한 성미를 이기지 못하고 매일같이 신경질을 부릴지도 모른다. 그렇더 하더라도 세상을 그늘을 돌아보고 오답을 오답이라고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입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한 끗만 잘 못 태어났어도 나는 지금 현재 있는 이 곳이 아닌 세상의 그늘진 지옥에서 누군가를 대신해 살아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세상사니까.

2011년 1월 14일 금요일

친구들은 연락이 뜸해진 나에게 자주 물어온다. 요즘 뭐하고 살아. 그냥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대답하면서도 머쓱해진다. 아, 나 너무 잉여스럽게 살아가는건가 싶은 생각에. 여유로운 생활을 지향했던 때가 있었는데, 요즘은 그 여유가 조금 부끄럽게 느껴진다. 반드시 이뤄야하는 임무가 생겨서 그런가?

미국의 소설가 겸 극작가인 베티 스미스가 지은 '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 이란 책을 읽으며 희망의 근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했었다. 일전의 나는 희망의 근원은 미래에 있기 때문에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희망은 사치이며 허세에 불과하다고 여겼었다. 희망을 가지라는 말은 나에게 도리어 삶의 뒷편으로 한 걸음 퇴보하라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책 속의 주인공 프랜시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희망이란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타고나는 인간 내재적인 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였다. 마치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에게 신이 붙여주는 일종의 부적같은. 차가운 바닷가에 널려있는 미끈하고도 딱딱한 자갈의 표면같은 껍질 속에 갇혀 있는 희망. 마음 속 아주 깊은 곳에서 죽은 듯 잠자고 있는 희망을 흔들어 깨운 자들은 희망의 행복 안에서 즐겁게 살아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은 아주 아주 슬프게 살아갈 것이다. 그런 생각까지 하고 나니, 어쩔 수 없이 살아가기는 하지만 절망과 외로움 속에서 아주 아주 슬프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인생의 목표 하나가 더 생겨버렸다. 헌신이라기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선 상에서 아주 사소한 일일지라도 그들을 위하고 함께 할 수 있도록, 언제나 그들을 향한 나의 이런 마음을 잊지 않고서 살아가고 싶다.


영화를 보고 책을 읽은 것 외에도, 자기 소개서와 학업 계획서를 쓰고 있었다. 나를 뒤돌아보고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최선의 선택과 어떤 목표를 향해 달렸던 것 같은데 다시 돌아보니 그 시간들을 어쩜 그렇게도 허무하고 초라하게 보낸건지, 한편으로 많은 후회를 했다. 나를 위하고, 나에게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결정했던 선택들이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도피와 어렸던 마음이 뒤섞여 혼란 아닌 혼란 속에서 앞, 뒤 없이 충동적으로 결정했던 선택들도 있었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하지만 그 덕분에 지금의 나는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하는 것인지에 대한 시작점이 명확해졌다. 이제 다시는 나를 위한 모든 선택들과 임무들 앞에서 피하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라는 말을 다시는 잊지 말아야지. 지금 이 시간과 선택들도 몇 년이 지나 다시 돌아본다면, 많이 미숙하고 어리석었던 결정이었다고 나의 부족함을 탓하고 후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언제나 선택은 어렵고 신중했다는 점을 귀하게 여긴다면 그 후회 또한 나의 인생 중의 하나였다고 너그러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지치고 자괴감이 넘치는 글을 쓰고 있노라면 나 또한 힘이 쭉 빠진다. 하지만 어쩌겠나, 그런 과정이 있어야 발전도 있는 법이니. 2011년의 시작은 생각보다 꽤나 무겁다. 진솔한 사람이 되어야지.

2011년 1월 5일 수요일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으면서 마음에 드는 구절들을 표시해 두었었다. 노트에 손으로 직접 적으려다가 방대한 양에 할 수 없이 오늘 아침에 워드로 옮겼다. 작년에 그의 또 다른 책인 농담을 읽으면서 흥미로웠지만 얼마 읽지 못하고 도서관에 반납한 기억이 난다. 일단 읽기가 무척이나 어려웠었다. 휴식을 취하고 싶어 들었던 책에서 도리어 정신적 피로를 느꼈으니 말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으면서도 나는 틈틈히 쉬어야 했고, 도저히 두뇌회전이 이루어 지지 않는 날에는 덮을 수 밖에 없었다. 그의 문체나 책의 특성이라기보다는 그의 문장을 그가 말하고자 하는 인상으로 해독하여 읽고자 했던 나의 욕구이자 욕심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말하면 과장이겠지만, 그의 문장 속에서 나는 수면 아래로 숨어 있는 나를 바라볼 수 있었다. 나를 표출하기보다는 나의 내밀성을 타인들이 눈치채지 않도록 지켜야한다는 강박 속에서 어느 하나도 유연하게 움직일 수 없었던 나의 속 알맹이를 그가 발라주었다고 해도 그건 과언이 아니다.


이분법을 이렇게나 멋지게 흐트러 놓을 수 있는 건가 싶었다.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잡을 수 없는 인생의 시계를 가벼움이라 칭하고, 또 그것을 무거움이라 말할 수 있는 그의 언변과 걷잡을 수 없이 넓어 고독이 절로 흘러나오는 그의 사상에 부러움을 느꼈다. 인생과 사랑과 역사. 모두가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한 번의 선택만이 존중받을 수 있는, 가벼운 것들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가볍기 때문에 지나가고 나면 언제나 무거움이 남는다. (책을 읽은지가 몇 일이나 지나서, 책의 완전한 내용이나 그가 말하고자 했던 말들이 완벽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단지 그 속에서 그와 내가 교감했던 인상정도만이 남아있을 뿐.)


사실 이분법이 나에게 가져다 준 강박은 실로 대단했다. 검은 것은 두렵고, 무섭고, 추악한 것이며 흰 것은 아름답고, 순결하고, 순수하다. 거짓말은 언제나 누군가를 아프게 하고, 불신적이며, 비도덕적이다 하지만 진실은 흰색이 보여주는 상징만큼이나 고결하고, 숭고하며 거짓말이 만들어내는 세상의 위배들을 청결하게 해 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당연하게 자리잡은 편견같은 이분법을 나는 증오했었다. 거짓말이 추악하다는 사람들의 말에 거짓말은 진실보다 아름답다는 말을 하고 싶었고, 검은 것은 악마이며 흰 것을 천사라고 말하는 자들의 입에 그들의 눈에 비친 검은색의 추악함보다 더 검고 끈적한 액체를 뿌려주고 싶었다. 나의 귀에 들린 그들의 입에는 그들만의 이분법이 우월적인 편견으로 내려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꼭 그래야만 한다는, 그들의 고집을 기어이 엎고 싶었지만, 나에게는 그만한 요량이 없었다. 아니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그들의 비위를 마춰주기 위해 그렇다고 대답을 해 왔던 내 안의 나를 밀란 쿤데라의 유연성을 통해 끄집어 낼 수 있었다.


정신적인 자유 속에서 미끄러지듯 유연하게 헤엄치고 있는 그의 움직임이 부럽다.

2011년 1월 1일 토요일

새로운 시간의 장막이 오른다. 어제 밤에 엄마와 단촐하게 (과일 음료와 다름 없는, 아직 어린 맛의) 와인을 마시면서 텔레비전으로 제야의 종소리를 듣고 있었다. 우리는 굉장히 시니컬하게 내일은 똑같은 내일이고 오늘은 똑같은 오늘인데 뭘 저렇게 다들 호들갑인가, 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근데 막상 오늘이 다가오고, 핸드폰의 날짜가 2011년 1월 1일을 가르키고, 아침 알람 또한 2011년 1월 1일 이라 정확하게 말을 하며 나를 깨우니, 이거 뭔가 기분이 심상치 않다. 어제와 같은 어제는 지나갔지만, 오늘은 정녕 어제와 같은 오늘이 아닌 것만 같은 기분이다. 새해만 되면 늘 그렇듯 무엇이든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는 궁색한 다짐은 하지 않으려 했건만, 도저히 그러지 않고서는 오늘이 지나가지 않을 것만 같다. 그래서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시간들과 다짐으로 다음 무대를 준비하려 한다. 새로운 시간의 장막이 오른다. 설레이기보다는 떨리고, 불확실과 불안정한 마음에 온통 적적함이 가득하지만, 열심히 잘 해내보고 싶다. 모두들 화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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