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W 마지막 회를 보고서 자고 있는 엄마 옆에 기우뚱하게 누워 닭똥같은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흑흑흑.
고통과 절망 속에서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
(지금도 무사히 생활하고 있을 지 알 수 없는 아이들에게)
어떤 세상이 왔으면 좋겠어요? 라고 물었던 무모했던 물음과
수줍은 듯 웃으며 말하는 아이들의 표정과 희망의 메세지에서
나는 조금 부끄러웠다.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니?
라는 질문에 나는 완벽하진 않지만 세상을 바꾸는데 조금의 힘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대답을 했었다. 세상을 바꾼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절반도 체감하지 못한채, 무의식적으로 흘렸었던 말.
저번 인문학 수업시간의 주제는 세상의 진실이었고, 선생님께서는 열심히 진실의 의미와 우리가 외면했던 진실은 언젠간 폭력적인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돌아온다 라 말씀하시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진실을 더욱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라 하셨다. 진실은 파괴적이기에 선천적으로 인간들은 그것을 외면하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라는 말씀과 함께.
어떤 사람이 선생님께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왜 희생을 하면서까지 진실을 알아야 합니까? 굳이 진실을 알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살아갈 수 있는데요, 그리고 진실을 깨우치기 위해선 분명 누군가와 우리들의 희생이 필요한데, 굳이 그렇게까지 알아야 하는 겁니까?
그건 마치 내가 살아가는 이유와 함께 살아가는 삶의 경계에 중첩된 질문이었다. 내가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은 분명 나의 행복과 만족만 충족되면 괜찮은 곳이 될 수 있다. 나의 행복과 만족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의 가장 큰 몫을 차지하기에. 하지만 나의 행복과 만족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그들'과 '우리'들의 삶을 함께 할 필요까진 없는 것이다. 간혹 하는 봉사활동이 아니라 내 인생의 전부를 바쳐야 하는 의미의 진실이라면 더더욱.
이기적이지만 어쩔 수 없다고 분명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요즘처럼 많은 것들이 풍족하고, 또 그 풍족 속에서 결핍을 모르고 자라난 우리들의 세대라면 더욱이. 자유가 없는 세상이라는 말보다 돈이 한 푼 더 있는 삶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세대들이니까, 그런 정신을 가진 채 세상을 살아가도록 우리의 등 뒤에 숨은 누군가가 만들어낸 세상의 진실이 바로 그것이니까.
하지만 어제 W를 보면서 나의 이기심이 나의 진실은 아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마지막회의 방송이라 더욱 더 그랬을테고. 단지 숨어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 동안의 진심들이. 이스라엘의 점령에 자신들의 나라를 찾길 원하는 팔레스타인의 자유 운동가와 33명의 광부들을 위해 직접 현장을 찾아왔던 칠레의 대통령의 따뜻함과 그들을 도와주었던 여러 사람들 그리고 세상 끝의 희망들이 폭탄과 날아오는 돌멩이에 맞아 산산조각이 나고 마는 전쟁 속에서 희망을 염원하며 웃던 아이들의 얼굴들, 그 속의 진심들이 내 안에도 살아있음이 느껴졌다.
영화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느냐는 질문에 패닉이 된 나는
그 질문의 속 뜻이 일종의 희생이 아니냐고 되물었었다.
사실 그건 희생이 아니라 어쩌면 당연한 행방일지도 모른다.
내가 그토록 원했던 세상의 단면이 아닌 이면을 찾아가는 길과 의미가 모조리 그 질문 속에 숨어있음을 나는 어제서야 깨닳았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제부턴 책임감과 용기의 문제가 될 것이다.
2010년 10월 28일 목요일
2010년 10월 25일 월요일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있다. 모든 판결이 끝이 나고 '나'의 처형이 이뤄지기 전의 내용까지 읽었으니 얼쭈 다 읽은 셈이나 다름없다. 이상하게 나는 이렇게 무신경하고 무관심한 주인공들에게 끌린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의 '나' 처럼. 물론 요우조우는 이방인의 '나' 보다 아주 많이 아파했고 자괴했고 그런 굴레 속에서 벗어날 수 없어 괴로워했지만 말이다. 이방인의 '나' 는 철저하게 무신경하다. 살인죄로 재판장에 선 그는 어머니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았다는 증언들로 위기를 맞고, 처형이라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그가 정말 어머니의 죽음 앞에 의연했을까? 물론 소설 상의 그의 태도와 그의 속마음 그리고 그의 말들이 온통 무관심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과연 그 무관심이 순수의 무관심이었을까 나는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만일 그것이 불순한 무관심이었다면 그가 처형의 위기까지 가야할 필요가 있었을까. 우리는 항상 단면을 보고 살아간다. 단면이 아닌 이면을 보기란 힘이 들고, 그것은 불확실한 추측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 속에서 헤매느니 차라리 단면 속에서 오해를 빚으며 살아가는 편이 낫다고 암묵적으로 판단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재판장에서 쏟아지는 말들이 모두 사실이라고 볼 수 없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사실이라 믿고 판단하고 판정한다. 물론 그의 죄의식 없는 표정이 이런 결과에 한 몫하였지만. 그가 가진 사실이란게 그는 어머니의 죽음에 아파하지도 울지도 괴로워하지도 않고, 어머니를 묻고 온 다음 날 천연덕스럽게 바닷가로 놀러간 패륜아이기에 결국 그는 처형의 판결을 떠안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살인이 일어난 바닷가에서도, 그가 앉아 있는 재판장에서도 그를 향해 맹렬히 내리쬐는 햇빛이 그가 느끼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숨겨진 고통이었고 죄의식을 대변하는 것이라면, 또한 그것이 무관심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그의 이면이라면, 그의 처형을 재판했던 모두는 어떤 사람들이 되는 것일까. 나는 이 소설을 통해 현상과 단면과 이면이 가진 괴리에 대한 생각을 조금 했다. 나는 항상 단면보다는 이면을 주장해 온 사람이었지만, 이면의 이야기들은 언제나 나를 혼란스럽게 하고 그렇기에 단면을 바라봄에 더 쾌활함을 느끼기도 했었다. 단면과 이면의 경계 쯤에 서 있는 듯하다, 나는. 그리고 불확실로 점철된 말들을 사실로만 가득한 삶 속에 투영시키며 나를 향한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 싶은 위기의 마음도 들었었다. 이 세상에서 효용가능한 불확실성이 존재할까. 오늘 내가 찾았던 '나'의 보이지 않았던 이면의 불확실성처럼, 다른 사람들의 시각에 왜곡될 진귀함이 존재할 수 있을까.
2010년 10월 23일 토요일
몇 달 만에 극단을 다녀왔다. 호되게 혼이 났다. 현재의 나의 태도에 대한 질책이라기보다는 나의 인생 전반에 대한 혼구녕에 나는 그만 바닥만 계속 보고 있었던 것 같다. 마땅히 떠오르는 극단의 모습이 바닥 밖에 없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쳐다보고 있었나보다. 많은 말들을 들었는데 아무런 기억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 흔한 단어들 조차,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단지 딱딱한 테이블 위를 나뒹굴던 죽은 바나나와 그의 몸 곳곳에 새겨진 검은 멍들의 고통들 밖에,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내가 그 곳에서 상처를 받았거나 혼이 난 것에 대한 상징이라기보다는 단순히 지금이 새벽인지라 그런건지도 모르겠다.
2010년 10월 22일 금요일
2010년 10월 20일 수요일
2010년 10월 16일 토요일

영어영문으로 학과를 옮기고 난 후부터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씩은 숙제가 나와, 자연스레 작문을 하게 된다. 원어민 작문 수업의 두번째 숙제가 바로 내가 좋아하는 예술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이었는데 나는 이 사진에 대한 묘사 설명을 했었다. 이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의 감흥이 아직 가시지 않은 지라, 어찌나 신나고 뿌듯한 마음으로 글을 썼던지. 할머니의 곁에 함께 누워있는 저 옷의 온기가 따사롭다. 따뜻함과 동시에 약간의 비릿함을 안고 있는 것 같다. 누워있는 여인의 나체와 그 나체 곳곳을 사로 잡고 있는 주름들과 바싹 마른 듯한 건조함. 빛을 바랜 듯한 하늘빛의 드레스는 한 때 그녀가 그것을 입은 채 거닐었을 거리들과 그런 그녀를 동경의 눈으로 바라봤을 기억 속의 그들에 대한 아련함을 가지고 있다. 아기의 사진과 푸른빛 그녀의 드레스가 안겨주는 평온함, 하지만 죽은 듯 눈을 감은 그녀의 표정은 왠지 모르게 고통스러워 보인다. 그녀의 고통이 죽음 때문일까? 죽음을 앞 둔 사람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건 죽음보다도 언제 다가올 지 모를 죽음을 기다리는 동안의 시간이 아닐까. 질끈 감은 두 눈 위를 지금도 스쳐지나가고 있을 삶의 고통들과 덧없음. 그녀는 차라리 지금 감은 이 눈으로 죽은 듯 영원을 살아가길 바라고 있을 지도 모른다. 아무런 존재도 의식도 없이 연기처럼 안개처럼 누군가의 앞에 홀연히 나타났다가 금새 사라지는 무언이 되길 원하는 지도 모른다. 언제나 끝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의 고통은 그랬던 것 같다. 질끈 눈을 감고서 지금의 내가 사라지길 기도할 뿐이다.
2010년 10월 8일 금요일
올해 여름부터 (홀로) 시작했었던 프로젝트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아주 처음의 시작이니, 주제를 부여한 세밀한 프로젝트보다는 2010 여름부터 겨울까지 라는 기간을 중심으로, 사진을 찍어 정리하고 때로는 글도 함께 새겨 넣는 아주 단순한 행위를 하고 있다. 비록 요즘은 사진을 찍고 현상하는 데만도 급급하지만, 바쁜 일들이 끝나면 곧 본격 이어갈 예정이니 일단 거기서 비롯되는 죄책감은 덜자고. 어쨋거나.. 그저께였나 그그저께였나, 어두운 방 안에서 스탠드 하나만 켜 놓고서 책을 뒤적거리다가 공부도 되지 않는 시큰둥한 마음에 불현듯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Partial Project , 11월의 프로젝트이고 되도록이면 한글을 사용하고 싶지만 아직은 영어 단어의 뉘앙스로만 이해되는지라, 아직까지는 저 이름이 가장 그럴싸하다고 본다. 친구들의 사진을 찍는 것이다. 단순히 그들이 음식을 먹고 무언가를 마시고 수다를 떨고 잠깐 졸기도 하는 그런 일상의 사진이 아닌, 내가 바라보고 생각하는 그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물론 그를 생각하면 대번에 떠오르는 그의 모습과 습관 말투 같은 것들은 모조리 불온전하고 주관적인 나의 머리와 본능에서 나올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상대에게 이런 제스춰를 요구했을 때, 분명 상대는 고개를 갸우뚱 할 일도 많을 것이다. 내가 얻고자 하는 효과가 바로 그것이다. 아주 단순하고, 누구나 들으면 그렇게나 당연하고 뻔한 서로에 관한 이야기를 왜 굳이 사진으로까지 만드느냐고 할 지도 모르지만, 내가 하고프고 나타내고픈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알지 못하는,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그의 모습들을 그려내고 그 과정을 통해 그 또한 내 안에 숨 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나라는 거울을 통해 들여다 보는 것. 그러면서 우리는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나는 포즈를 취하는 그를 바라보며 모든 것을 다 드러내어 놓고 있는 그의 사지와 표정을 통해 나를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진솔한 마음과 시간이 필요할 듯 하다. 물론 둘 다에 해당하는 말이고. 결국 적극적으로 행동해야겠다는 생각을 끝으로 벌써 반절은 시작되어버린 듯한 11월 프로젝트에 관한 상상을 끝마쳤었다. 기대된다. 그나저나 당장 10월엔 무엇을..? 나를 내려 놓기 프로젝트, 뭐 이런건 어떨가 싶다며 하하.
시험기간이 되니 공부 빼곤 다 하고픈 심정이다.
Partial Project , 11월의 프로젝트이고 되도록이면 한글을 사용하고 싶지만 아직은 영어 단어의 뉘앙스로만 이해되는지라, 아직까지는 저 이름이 가장 그럴싸하다고 본다. 친구들의 사진을 찍는 것이다. 단순히 그들이 음식을 먹고 무언가를 마시고 수다를 떨고 잠깐 졸기도 하는 그런 일상의 사진이 아닌, 내가 바라보고 생각하는 그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물론 그를 생각하면 대번에 떠오르는 그의 모습과 습관 말투 같은 것들은 모조리 불온전하고 주관적인 나의 머리와 본능에서 나올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상대에게 이런 제스춰를 요구했을 때, 분명 상대는 고개를 갸우뚱 할 일도 많을 것이다. 내가 얻고자 하는 효과가 바로 그것이다. 아주 단순하고, 누구나 들으면 그렇게나 당연하고 뻔한 서로에 관한 이야기를 왜 굳이 사진으로까지 만드느냐고 할 지도 모르지만, 내가 하고프고 나타내고픈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알지 못하는,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그의 모습들을 그려내고 그 과정을 통해 그 또한 내 안에 숨 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나라는 거울을 통해 들여다 보는 것. 그러면서 우리는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나는 포즈를 취하는 그를 바라보며 모든 것을 다 드러내어 놓고 있는 그의 사지와 표정을 통해 나를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진솔한 마음과 시간이 필요할 듯 하다. 물론 둘 다에 해당하는 말이고. 결국 적극적으로 행동해야겠다는 생각을 끝으로 벌써 반절은 시작되어버린 듯한 11월 프로젝트에 관한 상상을 끝마쳤었다. 기대된다. 그나저나 당장 10월엔 무엇을..? 나를 내려 놓기 프로젝트, 뭐 이런건 어떨가 싶다며 하하.
시험기간이 되니 공부 빼곤 다 하고픈 심정이다.
내 생애 첫 흑백사진
이 사진이 현상되기까지 5일이 걸렸다. 보통의 컬러필름이 넉넉잡아 1시간 안에 현상됨을 염두하자면 이는 엄청난 인내의 결과인 셈이다. 이제는 어지간한 사진관에서는 흑백필름을 다루지 않으니까, 부산에서도 흑백필름 손질을 하는 곳이 한 곳인가 밖에 없다고 한다. 결국 내 필름도 택배로 어딘가에 보내어졌다가 다시 돌아온 셈이었다. 그래서 다짐했다. 다음엔 찍을 사진 다 찍어 놓고서 필름들 몽땅 모아서 현상하리라. 필름 한 통을 5일 동안 기다리느라 자라같던 내 목이 기린목이 된 걸 보니 흑백 현상이 여간 힘든 일이더라고.
자신들의 행복에만 눈이 밝고 다른 이들의 불행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물론 이 글을 적으면서도 나는 무조건적인 당당함을 느낄 수 없다. 나의 기억 속에는 없지만, 분명 나에게도 나의 행복에만 눈이 멀어 다른 사람들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던 순간이 있었을지도 모르니.) 그런 비대칭적인 행복과 불행, 누군가는 행복하지만 누군가는 불행하다는 그 상황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행복과 불행은 언제나 교차적이고 시간적이고, 특히나 그 불행이 관계에 따른 상대적인 차이라면 그 차이가 관계에 대한 이해에서 다시 극복될 수 있는 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정말 문제는 자신의 행복에 두 눈이 젖어버려 다른 사람들의 불행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 무관심한 태도이다. 그 태도가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언제든지 그들은 자신의 혀에 닿는 달콤함과 쓴맛에만 민감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위를 돌아보지 않는다.
2010년 10월 4일 월요일
자두소녀
자두
에 관한 모든 기억들을 긁어 모은 것 같다.
초등학생 때 학교에서 야영을 했던 적이 있다. 다음날 이른 새벽 산행을 위해 모두가 산을 향하던 중 나와 친구는 그 길을 이탈하고서 친구의 집으로 달려갔었다. 일종의 도망인 셈이었다. 이런 사실을 모르셨던 친구의 엄마는 나와 친구를 위해 냉장고에서 차가운 자두 두알을 건네 주셨고, 자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나는 차마 먹지 못해 손에 쥐고 있었다. 유독 습기가 꿉꿉한 여름이이었는데 더운 날씨에 빨간 자두의 껍질 위로 수증기가 맺혔고 나는 그 축축한 물방울들을 손으로 닦아내며 구름이 잔뜩한 하늘을 올려다보았었다.
하하 나에게는 별 것 아닌 기억도 신비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에 관한 모든 기억들을 긁어 모은 것 같다.
초등학생 때 학교에서 야영을 했던 적이 있다. 다음날 이른 새벽 산행을 위해 모두가 산을 향하던 중 나와 친구는 그 길을 이탈하고서 친구의 집으로 달려갔었다. 일종의 도망인 셈이었다. 이런 사실을 모르셨던 친구의 엄마는 나와 친구를 위해 냉장고에서 차가운 자두 두알을 건네 주셨고, 자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나는 차마 먹지 못해 손에 쥐고 있었다. 유독 습기가 꿉꿉한 여름이이었는데 더운 날씨에 빨간 자두의 껍질 위로 수증기가 맺혔고 나는 그 축축한 물방울들을 손으로 닦아내며 구름이 잔뜩한 하늘을 올려다보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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