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25일 월요일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있다. 모든 판결이 끝이 나고 '나'의 처형이 이뤄지기 전의 내용까지 읽었으니 얼쭈 다 읽은 셈이나 다름없다. 이상하게 나는 이렇게 무신경하고 무관심한 주인공들에게 끌린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의 '나' 처럼. 물론 요우조우는 이방인의 '나' 보다 아주 많이 아파했고 자괴했고 그런 굴레 속에서 벗어날 수 없어 괴로워했지만 말이다. 이방인의 '나' 는 철저하게 무신경하다. 살인죄로 재판장에 선 그는 어머니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았다는 증언들로 위기를 맞고, 처형이라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그가 정말 어머니의 죽음 앞에 의연했을까? 물론 소설 상의 그의 태도와 그의 속마음 그리고 그의 말들이 온통 무관심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과연 그 무관심이 순수의 무관심이었을까 나는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만일 그것이 불순한 무관심이었다면 그가 처형의 위기까지 가야할 필요가 있었을까. 우리는 항상 단면을 보고 살아간다. 단면이 아닌 이면을 보기란 힘이 들고, 그것은 불확실한 추측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 속에서 헤매느니 차라리 단면 속에서 오해를 빚으며 살아가는 편이 낫다고 암묵적으로 판단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재판장에서 쏟아지는 말들이 모두 사실이라고 볼 수 없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사실이라 믿고 판단하고 판정한다. 물론 그의 죄의식 없는 표정이 이런 결과에 한 몫하였지만. 그가 가진 사실이란게 그는 어머니의 죽음에 아파하지도 울지도 괴로워하지도 않고, 어머니를 묻고 온 다음 날 천연덕스럽게 바닷가로 놀러간 패륜아이기에 결국 그는 처형의 판결을 떠안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살인이 일어난 바닷가에서도, 그가 앉아 있는 재판장에서도 그를 향해 맹렬히 내리쬐는 햇빛이 그가 느끼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숨겨진 고통이었고 죄의식을 대변하는 것이라면, 또한 그것이 무관심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그의 이면이라면, 그의 처형을 재판했던 모두는 어떤 사람들이 되는 것일까. 나는 이 소설을 통해 현상과 단면과 이면이 가진 괴리에 대한 생각을 조금 했다. 나는 항상 단면보다는 이면을 주장해 온 사람이었지만, 이면의 이야기들은 언제나 나를 혼란스럽게 하고 그렇기에 단면을 바라봄에 더 쾌활함을 느끼기도 했었다. 단면과 이면의 경계 쯤에 서 있는 듯하다, 나는. 그리고 불확실로 점철된 말들을 사실로만 가득한 삶 속에 투영시키며 나를 향한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 싶은 위기의 마음도 들었었다. 이 세상에서 효용가능한 불확실성이 존재할까. 오늘 내가 찾았던 '나'의 보이지 않았던 이면의 불확실성처럼, 다른 사람들의 시각에 왜곡될 진귀함이 존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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