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 31일 월요일

이미지 라는게 연예인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보통 사람들의 인간관계에서도 존재하는 게 바로 이미지이다. 가령, 제 3자에게 누군가를 소개할때 '걔 어때?' 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그를 떠올리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래서 이미지는 상당히 주관적이다. 나의 생각 속에 있던 그를 꺼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같은 것을 보더라도 저마다 떠올리는 생각과 느낌들은 다르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지만 그에 대한 이미지들이 아주 다른 경우를 보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그를 착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그를 이상하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가 아주 악질이라고 답한다. 이런 현상은 그가 만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 따라 다양한 이미지를 형성하게 된다.

사실 이미지가 무서운 이유는 편견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참한 이미지의 그녀가 늦은 새벽까지 클럽에 남아 현란한 조명 아래서 교태스러운 춤을 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현상과 같다. 그녀의 춤을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는 한, 믿을 사람은 믿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실을 그저 우스갯소리라 하고 넘길 것이다. 그녀는 다소곳하다 라는 이미지 즉, 그녀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 그러니까 편견이 그녀에 대한 이미지를 가득 메우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녀의 교태를 쉬이 받아들일 수가 없다.

하지만 이미지는 개인이 받은 대상에 대한 하나의 단상일 뿐, 그 사람의 전부를 말해주진 않는다. 그녀가 가진 수천가지 이미지들 중 내가 본 이미지라곤 참하다 라는 하나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들은 자신이 느끼는 주관적인 하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을 객관성이라 믿고 그녀의 전부를 판단하곤 한다. 마치 그것이 그녀의 전부인양. 내 머릿 속을 벗어나지 못하는 어리석은 단상을 그녀의 전부라 여기고, 단정하고, 단언하는 모양이 꽤나 우스울 때가 많다.

그럴 줄은 몰랐다 라는 말이 태어난 곳인지도 모른다. 주관성이 객관성의 옷을 입고서, 자신이 진리라고 말하는 그 순간이. 우리는 우리의 머리를 맴도는 한정적인 생각들의 말들로 세상과 사람에 대한 잣대를 들이대고 판단하고 때론 비난을 일삼기도 한다. 마치 그것이 법전에 나온 법인양. 자신의 가치와 기준에서 태어난 말인줄도 모르고.

2010년 5월 29일 토요일

습관은 항상 그렇다. 상대의 사소한 습관의 발견은 언제나 흥미롭다. 내가 이 사람의 습관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사람이 되었구나 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호감이 있던 상대였다면 그 습관마저도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예쁘게 보이거나 혹은 습관을 갖게 된 연유에 대해 슬퍼진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마치 그와 내가 건너 온 끝이 없이 길었던 시간의 강들의 미동없는 진부함처럼 상대가 지겨워져 오는 중심점에 또한 습관이 있다. 어느 날 나를 반하게 했던 그의 사소하며 앙증맞았던 습관이 꼴보기도 싫은 짓꺼리가 되고 나는 언제나 그랬듯 반쯤은 별 생각 없는 말투로 그를 나무란다. 그가 무안을 느낄 정도로. 그리고 감정의 체에 채 거르지 않은 말들을 일부러 내뱉는다. 일부러.

2010년 5월 27일 목요일

맛있는 거 먹고 싶다.
좋아하는 누군가와 마주보며 별 것도 아닌 얘기에 시시덕거리면서
너와 함께 하는 그 시간이 좋아서 한번, 그리고 음식이 맛있어서 또 한번 그런 행복감을 느끼고 싶다. 충만해지고 싶어.

내일 일어나서 가츠동 만들어서 먹어야지. 기절할정도로 맛있게 만들테다.
그리고 어제 먹다 남은 떡볶이랑 순대랑 파전이랑 다 만들어서 한 상 거하게 해놓고 먹을테다!!

2010년 5월 24일 월요일

애기를 때리는 엄마를 봤다. 4~5살쯤 된 아이였는데, 처음엔 등을 돌리고 있어서 꾸짖는 소리와 함께 찰싹, 찰싹 소리만 들려 단순하게 아이 엉덩이를 때리나보다 싶었는데 이게 왠걸, 그 소리가 연이어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엄마가 애기 뺨을 사정없이 갈기고 있더라. 시뻘개진 얼굴로 비명 한번 안지르고 맞고 있는 걸 보니 이게 처음 있었던 일은 아니었는 듯. 계속 되는 구타에 다른 아기 엄마랑 몇몇이서 하지말라고 말렸더니 대꾸도 없이 택시에 타더라구. 그런데 이상하게도 택시는 출발을 않고, 기사 아저씨가 자꾸 뒷좌석을 힐끔거리는게 수상해 다가가보니 택시 안에서도 역시나. 결국 택시 문 억지로 열고서 참지 못한 다른 아기 엄마가 뭐라했고, 그래도 자기 잘못한건 아는지 대답도 못하는 아기 엄마와 피 터질꺼같이 시뻘개져 퉁퉁 부은 얼굴에 증오와 미움이 섞인 아이의 눈동자를 보고나니 정말 맥이 빠지고 할 말이 없어지더라.

그건 벌을 주는 것이 아닌 엄연한 학대였다. 또 어른의 분풀이었다.
그 엄마에게 아이는 단지 어른의 분풀이에 저항할 힘 없는, 그렇기 때문에 분풀이에 아주 적합한 도구에 불과해 보였다.

하지만 엄마가 자신의 자식을 학대하는 괴물이 되기까지의
처지와 상황이 있었을 것이고 (우울증이라던지)
그렇기 때문에 완전히 그 엄마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물론 그 엄마가 아이를 구타했던 그 때의 그 순간은 정말이지
태어나서 봤던 광경들 중의 가장 끔찍했던 장면이었지만.

또 한편으론 아이가 .. 난 참 그 아이가 자꾸 마음에 걸린다.
그 아이의 눈이. 엄마가 어찌됐거나 아이는 엄마의 행동을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약자인데, 그 아이가 얼마나
불안한 정서를 지니고 있을지, 자신의 엄마를 어떤 사람이라고 여길지 생각하면 할수록 내가 더 죄스럽게 느껴졌다.

아이도 엄마도 상처가 많은 사람인듯 했다.
누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세상이 그런건지, 사람이 그런건지,
세상의 악도 미움도 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인데..
"이미 짐작하신 분들도 계시겠습니다만 일기를 적거나 편지를 쓰거나 그런 일에 자주 매달리는 사람들은 대개가 바깥 세계에서 자기 욕망의 실현에 실패를 하는 경향이 많은 쪽이기 쉽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현실의 질서에는 자신이 굴복하고 실패할 수 밖에 없으므로 이번에는 그 세계가 거꾸로 자신에게 굴복해 올 수 밖에 없도록, 그 세계 자체를 아예 뒤바꿔 놓을 수 있을 어떤 새로운 질서를 음모하기 시작한단 말입니다. 좀 더 문학적인 표현을 빌려 말한다면, 자기의 삶이 근거를 마련하려는 일종의 복수심이지요."
- 이청준 '지배와 해방 - 언어사회학 시설3', <자서전들 씁시다>

2010년 5월 23일 일요일

“글 쓰는 과정은 언제나 폭로의 과정이며 그것은 상처받기 쉬운 일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 말은 그것이 고백적이거나 회고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현실이다.”
시간이 추억으로 쌓이듯, 하루를 이루는 시간들이 먼지로 쌓여가듯, 어쨋거나 무언가가 지나가고 밤이 찾아오는 듯한 서늘함이 목구멍까지 콱 뿌리박힌다. 같은 곳에서 같은 곳으로 불어오고 또 쌓여가는 먼지들의 텁텁함이 가득 들어찬다.

내가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안다. 무언가를 외치고 표현할만큼 가득차지 못했다는 것을 내 자신이 가장 절실히 알고 있다. 그래서 손에 집히는 대로 마구잡이로 먹어대야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2010년 5월 20일 목요일

이창동 감독의 <시>

시는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학생시절 문학의 한 부분으로써의 시를 배울때 우리는 시의 첫행에서 시작해 마지막행까지 생선 뼈를 바르듯 낱낱히 해체시킴과 조합을 반복해 시를 배우곤 했었다. 가슴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시험을 치기위한 분석자의 입장에서 시를 바라봤었다. 단어를 칼같이 해석하고 선생님이 가르쳐 준 의미 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던, 그런 불운한 시를 배워왔던 우리들에게 그런 의미에서 이창동 감독의 <시>는 현대인들에게 인생에 한번쯤은 봐야하는 영화들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싶다. <시>를 보는 내내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메세지들을 조합하려고 했지만 그리 명쾌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이 영화는 플롯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메세지보다 영화 전체가 한 편의 시 그 자체로써 부각되는 의미가 더 강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다 보고서 영화관을 나설때면 시 한편 제대로 봤구나 하는 기분이 들것이다.

두뇌를 회전하며 봐야하는 작품들이 있는 반면, 이렇게 가슴으로 느껴야 하는 작품들도 있다. 그건 음악이든, 연극이든, 문학작품이든, 영화든 상관없이 모든 예술작품에서 공통되는 점일 것이다. 그건 아마도 우리가 삶에서 예술을 갈망하는 이유이다. 진심으로,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을 통해 우리들은 여러 감정을 느끼고 그럼으로써 다시 한번 살아있고 살아있음을 직간접적으로 느끼면서 삶의 부족함에 대한 위안을 얻는 것이다. 그래야 이 지옥같은 현실에서 숨 한번 틔우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것이 아니겠는가.

영화 <시> 속의 주인공 미자는 시를 쓰고 싶어하는 할머니이다. 그녀가 시를 배우면서 얻게 된 새로운 눈으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찾아다니지만, 그녀의 현실은 성폭력 가해자가 된 외손주의 뒤치닥거리로 추하기 짝이 없다. 피해자에 대한 죄책감으로 허덕이면서도 외손주를 끔찍이 여기는 모순된 모습을 보이고 또 피해자 부모의 억울한 그 울음을 가슴 아프게 지켜봤으면서도 그 사건이 외손주의 장래에 걸림돌이 될까 합의금 500만원을 겨우 마련한다. 세상이 지천에 깔린 꽃들마냥 아름다운 줄만 알았던 미자에게 자신의 코 앞에 닥친 현실의 세상은 더럽고 추하기 짝이 없으며 그런 곳에서 자신은 시를 쓰기 위해 아름다움을 찾아야하는 모순은 미자를 혼란스럽게 한다. 시가 쓰여지지 않아 고통스러워 하던 미자가 시를 완성하던 그 날 밤. 여느 때와 같은 밤이었지만 여느 때와는 달리 집의 식탁에 홀로 덩그러니 앉아 시를 완성하는 미자. 지금까지 참아왔던 가슴 속의 이야기들이 쉼없이 써내려져 간다. 외손주를 경찰에게 넘기고 난 후였다.

아름다움을 보는 눈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름다운 줄 아는 마음이다.
진실로 그것이 아름다운 한 줄기 섬광이 되어 가슴 속으로 스며들고 아직은 옅기만 한 그 섬광 한 줄기를 한 줄의 시로 표현하는 것, 그것은 모든 예술의 기본이다.

우리 모두는 이기적인 사람들이라는 얘기를 누군가가 했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영화를 만들고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각자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그 영화를 소유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이기적인 사람들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절대 내색하지 않는 미자의 진심을 읽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이 영화가 진심과 한 맥락을 이루고 있다는 생각 또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등떠밀려 피해자의 어머니에게 손자의 잘못을 봐달라고 사정하기 위해 찾아가던 걸음 도중, 반할 수 밖에 없었던 자연의 정취에 도취된 자신의 생각들을 쏟아내어 놓고 돌아서던 길에 보였던 그녀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피해자 부모에게 해야할 말은 하지 않고 엉뚱한 말들만 해서 지었던 표정의 정도를 넘어선 당혹감을 그녀는 말하고 있었다. 분명 떨어진 살구를 보고 느꼈던 자신의 감정은 진심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이 피해자 부모를 세워다놓고 이런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진심을 알았기 때문에 후에 피해자의 부모는 미자를 바라보며 도와달라는 연민의 눈빛을 보낼 수 있었다. 진심과 진심은 통하는 법이니.

어쨋든 생각할 거리가 많은 영화이다.
영화를 보고 돌아오며 짧았던 밤길을 걸으면서, 참으로 소담하면서도 광활한 영화 한편을 보았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절반은 만족인 영화이다. 모두가 꼭 보길..

2010년 5월 19일 수요일

사랑하는 남자는 연인의 '결점'에만, 여자의 변덕과 약점에만 애착을 갖는 것은 아니다. 얼굴의 주름, 기미, 낡아빠진 옷과 비뚤어진 걸음걸이가 모든 아름다움보다 훨씬 더 지속적으로 그리고 집요하게 그를 사로잡는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감각은 머릿속에 둥지를 트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창문, 구름, 나무를 뇌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것을 보는 장소에서 느낀다는 설이 있는데, 그러한 주장이 옳다면 우리는 애인을 바라볼 때도 우리 외부에 있게 된다. 하지만 고통스러울 정도로 긴장하며 완전히 마음을 빼앗긴 채. 현혹된 우리의 감각은 여자의 광휘 속을 새들 무리처럼 빙빙 돈다. 그리고 새들이 잎이 무성한 나무의 은신처에서 보호처를 찾듯이 온갖 감각은 애인의 육체의 그늘진 주름, 품위 없는 동작, 눈에 잘 띄지 않는 결점 속으로 도피해 그곳에서 안전하게 은신처에 몸을 숨긴다. 그리고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은 바로 이 곳, 즉 결점이 있는 곳, 비난받을 만한 곳에 한 여자를 숭배하는 남자의 화살처럼 빠른 연정이 둥지를 튼다는 사실을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어른들의 세계를 무섭다고 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솔직함이 때론 잔혹함이 될때가 있다. 가령 미워하는 친구에게 혹은 자신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서슴없이 그건 마음에 들지않아, 너는 그래서 미워 그러니 다음에는 그러지마 라는 말을 하곤한다. 아이들은 그 말들이 상대를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 모르고 말을 한다. 아주 단순히 떠오르는 생각들을 그 때, 그 때 말하는 것 뿐이지 그들이 별 다른 잘못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 말은 생각을 대변하는 말일 뿐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한 마디로 자신의 생각에 다른 사람이 이 말을 들으면 아플 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이 없는, 아직까지는 자신의 머릿 속에 타인을 집어넣기엔 어려서, 상대가 듣기 좋은 말과 나쁜 말을 구분하지 못하고서 그저 자신이 했던 생각에만 충족되는 말을 하면 되는 건줄 안다. 그건 잘못이 아니다. 아이들은 그렇게 솔직한거기 때문에.

하지만 좋은 말과 나쁜 말을 구분할 줄 아는 어른들에겐 아이들과 반대로 비밀이 많다. 상대의 얼굴을 보고 내뱉는 말들의 대부분은 상대를 고려한 말들이다.정말 싸울 요량으로 했던 말들이 아니라면. 정상적인 대화에서 그들은 했던 생각의 전부를 말로 쏟아붓진 않는다. 절반은 순화시켜 말 할지라도 나머지 절반은 자신의 머릿 속에 꽁꽁 숨겨둔다. 그래서 간혹 대화를 하다보면 상대가 말을 하고 있으면서도 무언가 숨기고 있는게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가 하는 말과 진심이 많이 다를 수도 있겠다 라는 의심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벌어지고 벌어지는 사소한 의심의 간극은 남을 배려했기 때문에 생긴 어른들의 말의 세계에 대한 불신이 되기도 한다. 차라리 듣기 좋은 말 백번 들을 바에야 시원스레 말하는 아이들의 솔직함이 낫다는 생각을 하게되기도 하는 것이다.

말에는 진정성이 담겨있어야 한다. 거짓말이 때론 약이 될때도 있지만, 그런 경우라면 분명 거짓말 속에도 진심이 들어있었을 것이다. 진심이 다른 방향으로 표현된 것이 거짓말인 것이다. 가끔 사소한 일로 다툼을 시작하다가 헤어지자는 말로 끝을 맺어 놓고는 멀쩡하게 다음날 다시 만나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커플들을 자주 본다. 그들은 그렇게도 무거운 헤어지자는 말을 홧김이라는 단순화로 얼버무린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무거운줄 모르고 너무 쉽게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거 같다. 말에는 상대에 대한 예의와 배려와 무게가 실려있기 때문에 함부러 사용해선 안된다. 단순히 생각을 표현하는 도구적인 존재 그 이상으로 말에는 무수한 의미와 가치들이 실려있다. 말은 나를 보여주는 나의 일부분이다.

죽느냐 사느냐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다.
잔혹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속마음으로 참아내는 것이 더 고귀한가?
또는 난관의 바다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고
맞싸워 없애 버리는 것이 고귀한가?
죽는 것은 자는 것. 그것 뿐이다.
육체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속아픔과
천만 가지 괴로움을 잠으로써 끝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열렬히 희구할 종말이 아닌가 !
죽는 것은 자는 것. 자는 것은 어쩌면 꿈 꾸는 것.
그렇다. 거기 문제가 있다. 이 썩을 인생 잡답을 벗어 던진 후
그 죽음의 잠 속에 무슨 꿈이 생길지,
그래서 주저하게 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오래 살아야 한다는 불행이 있는 것이다.
세상의 채찍과 멸시, 압제자의 횡포,
교만한 자의 작태, 무시당한 사랑의 아픔,
법의 지둔한 원조, 관리의 건방진 꼴,
참을성 있는 착한 이가 못난 놈에게서 받는 수모..
누가 이 따위들을 참겠는가 ? 만일 단도 하나만으로
스스로 자신을 잠재울 수 있다면, 누가 짐을 지고,
피곤한 목숨에 눌려 끙끙대며 땀 흘리겠는가 ?
죽음 후에 있을 그 무엇에 대한 두려움,
아무 길손도 되돌아오지 못하는 그 미지의 나라가 의지를 흔들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불행을 재촉하느니
차라리 주어진 불행을 참으라 하지 않는다면 -
이리하여 깊은 사색은 우리를 모두 비겁자로 만들고,
그래서 서슬 푸른 결단의 색깔이
창백한 사색의 색깔에 덮여 빛을 잃고
의기 충천하던 굉장한 계획도
이것 때문에 그 힘찬 물결이 꺾이고
행동이라는 이름을 잃는 것이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에 나오는 미오와 타쿠미의 사랑에 흠뻑 빠지고 나서 현실의 사랑을 시작하려면 조금 아니 아주 많이 힘이 들꺼같다. 말 한마디를 건네는것조차 부끄러웠던 고등학교때의 짝사랑과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낳아 행복하게 살아가지만 갑작스런 아내의 죽음에 힘들어하는 남편과 아이를 위해 '비의 계절' 동안만 아내가 잠깐 그들을 찾아온다. 사실 '비의 계절' 동안 찾아왔던 아내는 9년이라는 미래를 건너뛴 20살 아내의 꿈이었고, 그들은 그런 꿈같은 그녀를 맞이해 6주간의 달콤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말을 하지 못했지만 서로가 서로를 짝사랑했다는 사실과 20살의 아내는 자신의 꿈을 통해 28살에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한 남자와 그녀의 꿈을 통해서 본 자신의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찾아간다는 이야기. 애절한 마음을 간직한채 간절히 기다리고 또 자신보다도 상대를 더 사랑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이 영화를 보면서 과연 사랑이 실제로 저렇게 이상적일 수가 있을까 싶었다.

너무 익숙해져 참지 못하고 늘어놓았던 말들이 상대에겐 천둥과도 같은 상처가 되기도 하고, 처음에 반했던 그 모습들이 시간에 퇴색해져 미워보이기도 하고, 애써 노력하지 않으면 더 이상 서로를 위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지 않기도 하고, 관계를 유지하지 못할정도로 지치고 힘이 들어 이별을 고하기도 하고, 또 다른 제 3의 인물과 사랑에 빠져 그에게 이별을 고하기도 하는 것이 현실이 사랑이 아니던가. 현실의 사랑을 하고 그 사랑에 수긍하면서도 우리는 한편으론 이상적인 사랑을 꿈꾼다. 나와 그가 이런 사랑을 현실에서 실현하기에는 현실은 너무나도 팍팍하고 애꿎은 장애물들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극장에 들어가 이런 사랑이야기를 본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크면 클수록 신이 될 수 없는 인간의 고통은 커져만 간다. 지상에서의 사랑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는 법. 너무 이상적인 사랑에 맹목했다가는 현실의 사랑의 티끌만한 장애물에도 사랑을 탓하게 되는데, 그런 그의 머릿 속엔 이상적인 사랑이 사랑의 표본으로 자리잡고 있어 그 어떠한 사랑의 달콤함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홀로 허공을 헤매이는 외로움을 맛보게 될 것이다. 이상을 말하는 영화를 보는 건 현실의 불충분을 충족시키는 정도가 딱 좋은 거 같다. 더 이상도 이하도,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겐 버거운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만나러 갑니다> 를 보고난 후엔 <사과> 를 연이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꺼같다. ㅋㅋ

그런데 확실히 둘 중에서 <지금, 만나러 갑니다> 가 더 아름답긴 하다.

2010년 5월 18일 화요일

아무도 모른다

도시 한복판. 해가 뜨는 아침에서 어둠이 잦아드는 저녁이 될때까지 나의 존재를 일부러 인식시키려 하지 않는이상에야 아무도 나를 모른다. 존재를 부각하지 않아서라기보다는 사실, 도시의 사람들은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다. 최대한 밀착해서 앉게 되는 지하철에서조차 우리들은 아무 말이 없다. 서로를 알아야할 이유도 없을 뿐더러 서로에게 관여할 관심 또한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하철 속 사람들을 제대로 응시하는 것에 민망함을 느끼곤, 아무도 모를 곁눈짓으로만 서로를 염탐한다.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속의 어른들이 그렇다. 세상으로 버림받아 점점 세상으로부터 멀어져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곁눈짓으로 보면서도 그들에게 관여하지 않는다. 어른들의 무관심 속, 덕분에 세상으로부터 존재를 부여받지 못한 아이들 중 하나가 죽어 땅에 묻히는 순간까지 세상과 어른들은 그들의 존재를, 아무도 모른다.

이 영화를 보면서 감히 내가 그런 어른들을 향해 비난의 말을 뱉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호해줘야할 사람들을 보고서도 그냥 돌아섰던 적이 없지않아 있었던거 같다란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생각에만 그쳤었지 실제로 그들을 감싸안아 준 적은 제대로 있었나 싶었다. 이런 나의 행동이 아무도 모른다 속의 어른들의 무심함과 다를게 뭐가 있나 싶다.

개인주의의 도를 넘어선 서로에게 마음의 얼굴을 내밀지 않는 사회.
어쩌면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이 떠나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자신의 영역이 버거울 정도로 넓어 다른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야박함이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가 끔찍한 점은 픽션이라는 어느정도의 과장이 가미된 이야기가 아닌 실화를 토대로 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스토리가 되기 이전에 실제 있었던 사건이라니. 한 마디로 이 영화의 잔인함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가 만들어낸 결과물 중 하나라는 점이다.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아이들을 수상쩍게는 생각하지만 금새 아무렇지 않게 여겨버리는 무관심한 어른들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고, 어린 아이들을 내버려두고서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 떠나 1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는 이기적인 엄마가 살아간다. 자기만을 향해 있어 남들을 얼마나 괴롭게했는지도 모르는 무관심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도 모르고 지내왔던 우리들에게 던지는 일침과도 같은 영화이다.

2010년 5월 17일 월요일

상상력

광인, 연인, 시인은 모두
상상으로 꽉 차 있다.
광막한 지옥이 다 담을 수 없이 많은 악마를 보는 자,
그건 광인, 연인도 미치기는 마찬가지.
집시의 검은 낯짝에서 헬렌의 아리따움을 본다.
시인의 눈은, 황홀 속에
하늘에서 땅으로, 땅에서 하늘로 구르며
알 수 없는 사물의 형상을 상상으로 빚어내면,
시인의 붓은 그것들을 형체로 바꾸어,
허깨비에서 존재의 자리와 이름을 부여한다.

-셰익스피어 <소네트집>
그럴수도 있다 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라는 우물은 너무나 좁은 거 같다. 세상엔 나만의 시계만 돌아가는 건 아니니까. 나라는 시간이 바삐 움직이는 만큼 너의 시간도, 그리고 그의 시간도, 우리 모두의 시간이 같이 변화하는 거니까. 나만을 향해 굽어있는 시계바늘을 조금은 자중해도 괜찮을꺼 같다. 그리고 타인들의 시선에서 타인들의 시계를 그리고 나의 시계를 바라보는 방법을 익혀두는 것도 좋을꺼 같다.

그런 면에서, 알고보면 세상의 모든 일과 사람들은 쉬이 비난할 수 없다.

한 끝 차이만 벗어나면 이해할 수 있다.

2010년 5월 13일 목요일

부산국제단편영화제가 어제 시작되었다. 마침 가까운 영화관에서 상영 중인지라 오늘 일 마치고 가서 봤다. 이번 전주영화제 가서도 느낀 점인데, 영화제에 초청된 영화들에는 한계가 없다. 그리고 사회가 말하는 '적당한, 보통의' 라는 형용사도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가끔 생각하곤 하는 엉뚱한 생각들, 입 밖으로 내기에는 사회의 편견들이 무서워 하지 못했던 생각들, 이상한 애 로 오인받을 수 있을 법한 생각들 등등. 모든 이야기들이 영화란 통로로 재탄생 됨을 보니 마치 깜깜한 영화관 속 나 혼자 어디론가 떠나있는 기분이었다. 캬- 영화란 이런거구나 싶은 기분이 무척이나 들었었다.



오늘 봤던 단편들은 죄다 외국꺼였는데 외국 단편들은 '단편'이라는 짧지만 강한 임팩트에 힘을 많이 주는 듯하다. 그래서 꽤나 매력적이었다. 그리 많이 보진 않았지만 내가 봤던 우리나라 단편들은 대부분이 주제가 무겁고 이야기를 전개해가는 과정 또한 음습하고 무거운 경우가 많았던거 같은데, 오늘 봤던 단편들에선 무거운 얘기를 진행하는 중임에도 자체적으로 산뜻해지려는 힘이 강하다는 걸 엿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속의 철학에 관한 묘사를 하고 있는데도, 심지어는 흑백의 화면으로 모두가 검은 장례복을 입고서 죽은 사람이 뉘여진 관을 앞에 두고서도 간혹 터지는 검은 옷을 입은 그들의 웃음이 어디론가 날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여겨졌다는 점에서만 봐도 무거움 속 산뜻함을 엿볼 수 있지 않은가. 묘하다. 억지로 가벼워지려하지 않는데도 산뜻할 수 있다는 점이.



아.. 단편영화.....
김기영의 하녀

김기영의 '하녀' 속의 하녀는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와도 같다. 순간 순간 일어나는 감정의 본능에 충실히, 너무도 충실히 실행에 옮기니 광기 어린 사람 같다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광기 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우리의 본질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체에 거르지 않아 방금 잡은 듯 팔딱거리는 그녀의 감정들이 감추고 싶을 정도로 적나라하다. 아버지는 같지만 자신의 아이는 안주인의 강요 아닌 강요로 사산되고 안주인의 아이는 멀쩡히 세상 밖으로 나와 사랑받고 있는 모습을 본 그녀의 분노는 극에 달해, 그들이 한 눈 팔고 있는 사이 그들의 둘째아들을 죽이게 된다. 그리고 또 그녀는 집주인을 예사롭게 보지 않는 자신의 친구에게도 서슴없이 칼을 드밀며 공격해댄다. 극에 치달은 그녀의 감정들은 분노와 질투를 넘나들며 헐떡거린다. 팔딱댄다. 마치 방금 배를 갈라 김이 모락모락 나는 날짐승의 오장육부를 보는 듯하다. 아마도 그녀가 하녀 속의 그녀가 아니었다면, 김기영이 만들어낸 팜므파탈적인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저런 감정을 그리고 표현을 할 수 있었을까. 일반적 이란 말로는 도저히 그녀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아무리 분노를 하고 질투를 느껴도 어느정도는 자기 감정의 체에 걸러 표현을 하기 나름인데 그녀는 숨기지 않고 날카로운 발톱을 이리저리 흔들어댄다. 어찌보면 너무나 순수해서 그런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녀는 거침없다.

gmail 만들다

기념적인 날이로군.
그 동안 사이트별로 블로그란 블로그는 다 만들어서 사용해봤는데 제대로 정착해서 뿌리 박은 블로그가 없었다. 그만큼 내 근본이 게으르다는 말이 될수도 혹은 나에게 맞는 블로그가 없었다는 말이 될수도 ? 직감적으로 전자일 확률이 높다는 걸 알면서도, 후자의 영향이 더 깊을꺼라고 박박 우기는 나. 쨋든, 나두... 이제는 좀 정착하고 싶어요...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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