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30일 수요일

나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그 어떤 말을, 단어들을 뱉어내도 속이 시원스럽지 않았고, 연속적으로 덮쳐오는 답답증에 결국 나는 말을 잃을 수 밖에 없었다. 요즘은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렇게나 쉽게 내 던지던 농담조차도 쉽지 않고, 대화 속의 나는 무중력 상태의 우주를 혼자 둥둥 떠다니거 같은 엉뚱한 기분이 많이 든다.

2010년 6월 24일 목요일

나르시스트가 되기엔 자신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2010년 6월 23일 수요일

진짜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어제 다큐를 찍으면서 난생처음 카메라라는 것을 만져보았다. 딱 그 순간의 한 컷을 찍기 위한 카메라는 여러번 만져보았지만, 동작의 시간을 담는 카메라는 처음이었다. 카메라에 달려있는 조그마한 화면을 통해 바라본 세계는 경이로웠다. 마치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다른 세계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고작 카메라 한대일 뿐인데.. 아무리 실제를 있는 그대로 담는 다큐라 해도 카메라를 통해 재생산된 현실은 그게 현실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비스러웠다.

이창동 감독이 언젠가 그런 얘기를 했었다. 영화라는게 현실을 신비화시키기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그 신비감을 벗겨내려 한다. 아직 배운 것 없는 초짜라 제대로 잘 알지 못하지만, 지금은 그의 말의 부스러기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꺼 같다.

이창동 감독과는 영화를 만드는 기본의 지향점이 다른 듯한 이와이 슌지 감독의 Picnic 을 보았다. 이와이 슌지는 장면 하나 하나를 신비스럽게 만든다. 거친 영상과 아름다운 음악, 그리고 정신병원의 환자라는 주인공과 왜곡과 과장이 뒤섞여 표현된 주인공이 죄의식을 느끼는 장면, 이 모든 것들이 영화를 신비롭게 만들고 있었다. 상상의 나래 속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는 그의 솜씨는 그 영화와 주인공들이 정말 존재하는 세계이고 사람이라 믿고 싶을 정도로 진실되었고 수려하였다. 그가 그런 영화를 만드는 것과 반대로, 이창동 감독은 철저하게 현실 속의 인물과 그 인물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치열하게 만든다. 그의 영화에는 신비감보다는 현실에서만 알 수 있는 진실과 사실이 들어 있다. 나 또한 현실적인 영화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서 더 필요로 하지 않을까 싶어, 현실적인 영화들을 추종한 적이 있었다. 현실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부대끼고 살아가는 현실의 있는 그대로를 드라마틱한 사건들과 섞어 시나리오를 만들기도 했었다. 그런데 직접 시나리오를 쓰면 쓸수록, 현실과 영화의 세계의 경계가 없어지면서 도대체 현실과는 다른 영화의 세계만의 매력은 무엇인지 모호해졌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도 영화의 세계에서 주된 놀이가 되어야할 현실에 대한 경계가 사라지면서 재미는 사라지고 점점 진부해져갔다. 그런데 오늘 이와이 슌지의 영화를 보면서 도대체 내가 지향하는 영화의 세계는 어떤 세계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진실된 세계를 이야기하고 싶고, 생각하고 싶고, 만들고 싶다. 그런데 도무지 진짜의 현실과 이창동 감독이 말하는 영화의 세계, 이와이 슌지가 그리고 있는 영화의 세계, 그리고 그들과는 다른 나만이 원하는 세계는 어떤 세계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생각을 해야해....... 생각을...

2010년 6월 20일 일요일

오래 된, 낡은 건물들을 보면 위태로운 기분이 든다. 사회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 아마도 낡은 것의 아름다움을 새로움으로 갈아치우려하는 현대사회와 현대인들의 무분별한 습관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람들 각자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의 기준은 다르다. 나는 오래되어 황폐해지고 피폐해진 느낌의 이미지들이 좋다. 우리가 무심하게 지나쳤던 시간들을 저 창문의 창틀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 느낌이 너무 좋다. 아무리 하얀 벽에 때가 묻어있어도 그건 더러움이 아닌 세월의 때이기 때문에 깊게 볼수록 아름다워보이고, 검은 피폐함 또한 그것이 지녀 온 과거와 현재를 한번에 뭉뚱그려 보여주는 자화상이기에 아름답다.

2010년 6월 19일 토요일

What makes you feel alive?

2010년 6월 18일 금요일

경계도시2 와 시사콘서트 열광의 통일편



우리나라에선 자신이 좌파라 말하는 그 자체로써 죄인이 되기도 한다. 법의 처벌을 받는 건 아니지만 그것보다도 무서운, 누군지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돌팔매질을 당할 확률이 꽤나 높기 때문이다. 그럼 대한민국에서의 좌파는 도대체 무엇이기에 ? 사실 우리의 좌파는 과거의 인식 속에서 오류를 범한 선입견으로 자리잡아있다. 또한 그것은 우리나라 커다란 역사의 일부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단체적인 성향을 띈다. 6.25 전쟁으로 북한과 남한의 대치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군인들보다도 일반인들이 더 큰 피해와 상처를 입었다. 현재로 보면 50년도 더 지난 역사이지만 그 상처는 고스란히 지금의 국민들에게까지 세대물림 되어 있다. 지금의 우리들 인식 속의 좌파가 6.25 전쟁때 남한의 적이었던 북한/빨갱이/공산당를 뜻함을 보면 알 수 있다. 원래 좌파의 의미는 우파와는 반대되며 사회개혁이나 진보를 하려는 집단을 뜻하지만, 유독 대한민국 국민들의 대다수는 좌파를 남한의 사람들을 죽인 적이 있는 혹은 배신할 수도 있는 적으로 해석된다. 그 전쟁이 있고 난 지금까지 도대체 우리의 정치적 인식에 성장이 있었던 걸까.



오도된 좌파의 의미는 우리들 마음 속에 깊숙히 자리잡아, 좌파의 ㅈ자만 들어도 빨갱이라는 별명을 붙여줘 사회로부터 불이익을 당하게 한다. 경계도시2 에서의 송두율교수만 보아도 그렇다. 그는 그 자신을 북한과 남한 그 어느 곳에도 완전하게 소속되진 않지만 그 두 나라의 민족으로써 인정받고 싶음을 외치는 경계인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절대 경계라는 그 틈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나라다. 왜냐, 우파 아니면 좌파이니까. 남한사람 아니면 빨갱이니까. 송두율 교수가 북한의 초청과 초대로 몇번 북한을 다녀왔고 공산당에 가입되어있다는 이유로 그는 30여년동안 조국의 땅을 밟지 못하는 고통을 받았다. 그리고 그 자신이 경계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30여년 만에 돌아온 조국에서 그는 결국 자신의 존재를 경계인이 아닌 남한사람이라고 원치 않았던 전향을 하게 된다. 그 바탕엔 분명 오도된 우리들의 좌파의식이 깔려있었다. 북한에 다녀왔다는 그 이유만으로 그는 북한의 첩자, 빨갱이가 되었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았다. 물론 그가 활동은 전혀 하지 않았지만 공산당에 가입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다는, 영화를 찍던 감독과 경각심을 세워가며 보던 나의 이런 인식 또한 진보하지 못한 우리들의 레드콤플렉스에서 비롯된다. 부끄러운 사실이 아닐 수가 없다. 다른 나라에서 들으면 비웃을지도 모를 이야기다.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는 좌파 라는 단어의 제대로 된 정의를 내리지 못했다. 잘못된 정의로 북한의 ㅂ자만 나와도 빨갱이라는 오해와 의심은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다.



지금도 정치판에선 진보죽이기 활동이 활발하다. 진보라는 말 뒤에는 좌파, 빨갱이라는 수식어들과 욕설이 언제나와 같이 따라붙는다. 그들에게 되묻고 싶다. 당신이 아는 좌파는 무엇이냐고. 만약 당신의 답이 쳐 죽여야할 빨갱이라면 제대로 된 역사공부를 하고 오라고 말하고 싶다. 지금이라도 비틀어진 대한민국 국민들의 단체 편견을 바로 잡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만약에라도 통일이 되었을 때의 어려움을 하나라도 덜 수 있다. 통일 후의 경제적, 문화적 문제는 뒤로 미루더라도 서로에 대한 악감정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연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은 따로 살아가는 듯하지만 본래는 같은 민족이고 또 지금의 상태가 휴전선을 두고 있는 '분단국'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이에 대한 결말이 필요하게 때문이다. 통일은 언제 이루어질지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최소한의 준비라도 해야한다. 우리들의 관념 속에 일그러진 남한과 북한의 의미를 다시 되짚으면서, 현재의 대한민국이 증오하고 있는 여러 정치개념 또한 새로이 뿌리박을 수 있어야 한다.
오늘도 결국 날려버렸구나 라는 허무한 기분이 들지 않도록. 모처럼만에 한자리에서 책 한권을 뚝딱 해치웠다. 그리고 1차 수정 된 단편영화 시나리오 프린터도 했고. 블로그에 오늘 읽은 책이랑 어제 본 영화 <경계도시 2>에 대한 글만 쓰고 시나리오 보완 들어가야겠다.

현대소설을 읽다보면 이 시대를 대표하는 문학이라기보다는 바쁜 일상 속의 휴식같은 환상적이고 화려한 느낌이 많이 느껴진다. 모든 현대소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저런 실망감을 한번 느끼고 나니 현대소설을 읽는다는 자체가 괜히 가볍게 느껴져서 근래엔 잘 찾지 않고 있었다. (몇 명의 작가를 제외하고는)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날씨가 축축하니 후텁지근해서 그런지 가벼우면서 산뜻한, 그러면서도 충격의 신선함이 있는 글이 읽고 싶어졌다. 그래서 대충 제목 보고 고른 것이 '판타스틱 개미지옥'. 다 읽는데 한 서너시간쯤 걸린거 같다. 책 읽는 속도가 더딘 나로써는 굉장한 기록이다. 그래. 현대소설 가볍다. 그런데 소재가 가볍다거나 현 시대를 마주보는 눈이 가볍다기보다는 고전에 비해 접근이 가볍다. 그리고 친근하다. 그리 많이 보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읽어 온 한국현대소설을 통칭하자면 평범하고 일상적인 인물들의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에겐 이상한 낯섦이 있다. 바쁘게 살아가기에 돌아보지 못했던 아주 가까운 나의 주변인들의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작가의 상상력이 현실에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읽으면 읽을 수록 자연스레 몰입된다. 오늘의 '판타스틱 개미지옥' 도 그러하였다. 나 또한 백화점에서 일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백화점이 얼마나 지독한 자본력으로 움직이는지, 겉은 화려하지만 직원들을 위한 공간들은 어둡고, 그들의 말은 또 얼마나 거칠며, 짙은 담배냄새를 뿜고 다니며, 백화점 속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비인격적인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이 책과 나의 경험은 백화점의 모습이 단순한 백화점의 모습이 아닌, 자본주의인 현사회의 축소판이라고 말하였다. 무언가를 살 수 있는 사람만이 사람으로써 인정받을 수 있는 곳, 브랜드 하나에 나의 존재가치도 바뀔 수 있다는 그 우쭐함, 아주 비싼 물건을 사면서도 싸게 잘 샀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자기암시와 환상, 모든 현실의 걱정과 고민이 해결된 듯한 해소감. 이 모든 것들은 백화점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백화점 안에만 있으면 자신의 척박한 현실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환상의 세계로 온 듯한 기분이 느껴졌고, 사람들은 기분에 취해 소비를 하며 그것을 통해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곤 한다. 이건 결코 백화점 안에서의 문제가 아니다. 현대의 사람들 또한 시간이 지날 수록 자신이 비어감을 느끼고 그 허기를 채우기 위해 막무가내 소비를 하고, 그 소비를 메꾸기 위해 돈을 벌고, 또 소비를 하고, 이런 식의 메커니즘을 벗어나지 못해 비극적인 결말을 맺기도 하기 때문이다. 모두 진짜의 자신들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소설 속의 주인공들도 그리고 이 시대의 우리들도. 그렇기 때문에 남들이 사는 모습, 사는 것 등을 따라하고, 겉으로만 보이기에 화려하고 완벽한 것을 쫓아가는 것이 최고라 생각한다. 슬프고도 안타깝다. 이 소설을 읽기 시작한 사람이라면 단순한 재미로 읽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읽고 현 시대와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이 진정 찾아야 할 무언가를 찾아나설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10년 6월 17일 목요일

좋아하는 일을 할 때는 그에 따른 책임까지 짊어질 줄 알아야한다. 그리고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고 시작했다면, 그 과정에서 힘든 일이 있어도 참고 견뎌낼 줄 알아야한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을 한다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일이 익숙하고 진부해져 힘이 빠질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의 고통마저도 감수할 줄 알아야한다. 적어도 내가 하고 싶다는 의지로 시작한 일이니, 그 부분까지도 책임질 수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오늘 나의 취약점을 알아냈다. 미리 알고 있던 사실이라 딱히 신선하다 싶은 내용은 아니었지만. 무언가 만드는 일을 하려면 자신의 생각과 의견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만드는 것을 따라하고 도와줄 수 밖에 없어진다, 자신이 좋아하는 이야기든, 사진이든, 생각이든, 어쨋거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이 먼저 알아야 한다.

어쩌면 내가 하고 싶어하는 말하기를 잘 못하는 이유 또한 나만의 생각하기에 취약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만의 깊은 생각에 빠지지 못하고 곧잘, 얕은 생각 속에서만 허우적대다 결국 수렁에 빠져버리고 마는 잦은 경험들을 빗대어보면, 확실히 나는 나만의 생각이 부족하다.

나만의 생각과 나만의 말하기가 필요하다. 아마도 기나긴 연습을 거쳐야할 듯 하다.
강압적인 사람은 되기 싫다. 혼자만이 하는 일이 아니기에, 나와 타인들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고 동참하고, 그렇게 모두가 만들어 가는 작업이기때문에 결코 그걸 혼자만의 작업이고 성과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나의 말을 하면서 타인의 말도 잘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싶다.

2010년 6월 16일 수요일

'왜 이 일을 하고싶냐?' 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던건, 어쩌면 내가 그 대답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 일을 하고 싶다는 부탁을 하기까지의 생각들과 고민들이 분명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일에 발을 담그기까지 내가 해왔던 모든 열망들과 상상이 일종의 도피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나조차도 떨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에게서 비롯된 도피라면 나는 지금이라도 이 일의 시작을 말아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건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다. 나는 이 일이 자기발견의 통로라고 생각했다. 만약 이 일이 자기발견의 통로가 아니라, 나에게서 비롯된 의미없는 도피에 불과했다면, 나는 지금이라도 빨리 다른 통로를 찾아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에게서 가장 슬픈 사람은 자기발견을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특정의 그런 사람들이 슬프다기보다는 그런 사람들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또 그들을 단순한 소비의 중심체로 다루려고 하는 비인간적인 사회에서 느껴지는 슬프다 못한 잔혹함이다. 적어도 나는 그런 사람들이 되지 않으려 하며, 그런 사회의 만연한 의식이 나만의 통로로 인해 틈새가 마련되길 바라는 것이다.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을 근거로 나만 행복하게 살아가는 건, 혼자 살아갈 때에 느낄 수 있는 자만일 뿐이다.

그런데 이 글을 막 시작한 순간, 나는 느꼈다.
결코 내가 나로부터의 도피를 이 일의 시작점으로 삼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마도 나는 잔혹함을 행복으로 포장하는 이 사회로부터 도피를 하고 싶었던거 같다. 나를 나로써 인정해주지 않고, 너를 너로써 받아들여주지 않는 사회에 대해 나는 나고, 너는 너다 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던 거 같다. 그리고 그 말을 하기 위한 통로로써 영화나 영상을 하고 싶다는 열망을 품었고. 소설가 이청준은 사회로부터 자기 세계를 압박받고, 인정받지 못하고, 사회에 대한 불만이 많은 사람들이 바로 글을 쓰는 사람들이다, 현실에서 굴복당한 현실의 이야기를 자신이 창조하는 글을 통해 역전시킴으로써 일종의 만족감을 맛본다. 이런 그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속으로 뜨거운 무엇인가를 꾹꾹 참아내고 있었다. 그래. 나는 내가 싫어서 도피를 한게 아니다.


그 날의 '왜' 라는 질문은
방황하고 있던 나에게 세상을 향해 더욱 꼿꼿이 곤두서라고 말했다.
신념이 없는 말과 생각은 결국 시간이 흐르면 죽어버리고 만다. 아무리 대단한 말이고 생각이라할지라도 그냥 흘러가고 마는 농담과 같은 수준이 되어버린다. 신념, 지금 내게 필요한건 그것이다.

2010년 6월 15일 화요일

파괴창조라는 말이 있다. 파괴는 또 다른 창조를 가져온다는 뜻인데, 그 뜻을 알면서도 공사 현장을 목격하고나면 이상하게도 서글퍼져온다. 파괴가 시작되기 전까지 그 장소에 있었을 건물들, 분명 우리가 모르는, 그 속에 살아 온 사람들의 오랜 시간과 세월, 추억을 '새로움'이란 이름으로 파괴하려니 마음이 아파온다. 사람들은 그런 세월의 사라짐을 가슴 아파하지만 새로움의 화려함 앞에서 쉽게 잊고, 쉽게 받아들인다.

2010년 6월 14일 월요일


브라운관의 과장인지 아님 현실과 TV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의식의 공존인지.
한 장의 사진 속에서의 전혀 다른 두 배경은 별다른 경계가 없어 마치 한 장소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만약 그들이 소파에 앉아 영화를 보는 듯한 태도조차 취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마 이 사진을 단순히 특별한 공간의 창조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그들은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고, 또 그들이 바라보는 TV화면은 평면을 넘어 입체적인 모습으로써 즉, 다른 현실로써 그들의 의식 속으로 침투된다. 그리고 사진과 같이 한 공간 속에 그들이 영화를 본다라는 그 자체는 현실 속의 그들과 현실화되버린 그들의 의식 속의 영화를 공존할 수 있게 한다.
이런게 일종의 허무함이고 허탈감이라는 건가?
음식을 먹기도 전에 먹고 나서의 기분을 맛봐버리곤 그만, 먹기를 포기하고, 아이디어가 떠올라 글이 쓰고싶다는 기분에 부풀다가도 막상 컴퓨터 앞에 앉으면 쓰기 싫어진다. 무료한 기분에 친구에게 만나자는 연락을 하려다가도 헤어지고 돌아오는 그 길 위에서 다시 무료해질 기분을 생각하니 입맛이 똑 떨어진다. 그렇다고 쭉 혼자 있자니 목구멍까지 뭔가가 치밀어오르고, 움직이자니 그럴만한 쾌활이 없다.

시작도 하기전에 끝을 맛봐버리는 그 허무맹랑한 기분이 사람 사는 맛을 똑 떨어뜨려놓고 있다. 죽을만큼 답답하고 죽고 싶다는 말이 나올만큼 진부하고 허무하다. 머릿 속을 다시 맴돈다. 왜 살아가는 것인가. 차라리 토해내고 싶다. 목구멍을 꽉 틀어막아 뜨겁게 올라오는 무언가를 뱉어내지 못하게 막고 있는 그 것을.

2010년 6월 13일 일요일

소년은 시험을, 경쟁을 거부하였다. 친구들과 어른들은 소년을 겁쟁이라고 놀려댔다. 소년은 누군가를 밟고 일어서는 그 쾌감을 느끼면서까지 그 누군가를 진심으로 잃고 싶지 않다고 했다. 어른들은 그런 소년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경쟁을 통해 우리는 누군가를 잃지 않아, 그 속에서 더 많은 인생의 뜻과 의미를 알아가는 거지. 소년은 말했다. 나는 경쟁을 하면서 한번도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은 적이 없어요, 그 누군가가 누구이든 경쟁의 선에 놓이게 되면 나는 그를 미워하게돼요, 미워하지 않는데 이상하게 미워하게 돼요, 나는 그게 싫어요, 나와 그의 관계가 이상하게 멀어지는거 같아서 싫어요, 나는 내 안에서 고립되기 싫거든요.
"누구나 바르게 태어나 바르게 살다 바르게 죽고 싶어한다. 그러나 인생이란 마치 복병처럼 나타난 타인에 의해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삶을 만나게 되고 피할 수도 없이 그런 삶에 길들여진다. 2001년 이 긴장된 도시 안에서 아무리 날카로운 경계심을 세워도 어느새 나는 생각지도 않은 공간에서 나도 모르게 나쁜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다. - 여기 태어남부터 죽을 때까지 불행한 기운이 감도는 한 나쁜 남자가 있다. 너무나 검어서 흰 것이 때처럼 느껴지는.. 그의 순수한 눈빛은 여자의 일생을 불행으로 바꾼다. 그것이 너무나 잔인해서 마치 신의 계획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운명이라 말하고 싶다." - 김기덕
우리네 인생길은 그리 순탄치 않다. 길의 양 옆엔 따가운 햇빛의 한모금 그늘을 만들어 줄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그리고 커다랗게 우거진 그 나무들 아래에는 작고 귀여운 이름모를 들꽃들이 초여름의 시원한 바람에 살랑이고 있는 그런 따뜻한 길이라기보다는, 위협적일 정도로 커다란 건물들과 보란듯이 소외당하고 있는 작고 허름한 건물들이 빽빽하게 늘어선 회색빛의 삭막 속에서 운명과 실수와 실패와 성공이 질서없이 조직화되어있는 어느 골목길 같다. 양 갈래 길을 만났을 때, 이 길이 맞다 싶어 걸어왔지만, 그 길의 끝에 도착해보니 생각치도 못했던 운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때도 있고, 반대로 어쩔 수 없이 선택했던 길이 후에 큰 기회가 되어 다가오기도 한다. 우리는 언제나 복잡하게 엉켜있는 골목에서 서성인다. 생각하고 고민하고, 그렇게 걸어간다. 쉼없이 걸어간다. 들리는 건 나의 벅찬 숨소리뿐, 다른 세상의 소리는 숨을 죽인다.

2010년 6월 11일 금요일

그저 단순한 시간여행이 아니라 시간이동이 가능한 기차표를 끊을 수 있다면, 나는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을 다 털어버려, 지난 날로 돌아갈 것이다. 지금보다 더 풍요롭고, 화려한 삶을 꿈꾸지 않기 때문에 과거를 향한 나의 염원이 그리 초라하고 궁색한 변명이라는 여지는 피할 수 있을거라 본다. 그저 돌아가서 아무래도 괜찮다고 습관처럼 말했던 나에게 다시 말해주고 싶다. 현실을 완전한 밀실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현재와 현재의 나에 대한 불확실이고, 불확실의 토양 위에선 어짜피 불확실한 싹을 틔우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너의 불확실과 불확실의 미래 앞에 너무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는 그저 네가 틔우고 싶어하는 씨앗만 찾으면 된다.

2010년 6월 10일 목요일

대한민국에선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를 막론하고 학력이 크나큰 영향을 끼친다. 구지 학력이 필요없는 분야에서까지 학력은 그 사람의 됨됨이를 좌지우지한다. 소위 말하는 서연고 출신과 이름도 모르는 지방 삼류대 그리고 전문대학 출신에 대한 선입견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서연고 출신은 무엇을 해도 대단해보이고 그에 반대로 삼류대 출신은 뭘해도 미덥고 그저그래보이는 현상이 나타나곤 한다. 이번 타블로의 학력사건도 예외가 아니다. 이 정도까지 사건이 붉어지게 된 까닭에는 세계 일류 대학 출신의 수재가 힙합이라는 음악을 한다 라는 배경이 깔려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시선들을 보냈다. 그런 사람이 만든 음악은 어떤 음악일까, 그런 대학을 나왔으면서 연예인을 한다는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무슨 생각일까 등등. 그가 스탠포드 출신임을 대중들에게 각인시키면서 뭇사람들의 질타도 받았지만 그보다도 많은 덕을 본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그의 출세에 바탕이 되었던 일류대학 출신임을 완벽히 보여달라 요청하고 있고, 그에 대해 침묵하는 그를 보며 자신들이 기만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더 악착같이 달려드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타블로가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가수였다면 어땠을까?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써 음악으로만 승부를 봐야하는, 그러니까 학벌주의에 시큰둥한 반응을 하는 나라였다면 애시당초 그가 자신을 일류대 출신의 딴따라라 칭하며 출세할 수 있었을까? 숱한 공인들이 눈 가리기 아웅 식의 학력 위조 문제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긴 했으나, 이번 타블로 사건은 신정아 학력위조 이후로 가장 떠들썩한 사건이 아닌가 싶다. 어찌보면 그들의 사건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분야에 대한 능력과 학력의 상관관계가 학력 위조를 할 정도로 밀접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소한 일상에서도 간혹 자신이 전문대 출신임을 꺼려해 교묘하게 대학 이름을 속인다던가 혹은 아예 다른 출신이라 말을 하는 바람에 창피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또한 상대에 대한 평가에서 빠지지 않고 꼭 등장하는 질문이 바로 어디 출신이냐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만연화된 학력 위주 사회 속에서 학력이 사람과 능력을 판단하는데 중요하다는 인식을 피할 수 없는, 당연한 인식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일류대 출신은 능력이 좋을꺼야, 삼류대 출신은 좀 떨어지지 않을까.. 라는 타파하지 못한 선입견으로 타인을 판단하는걸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에, 해가 갈수록 일류대에 대한 열망은 커지고, 그렇게 다음 세대를 향한 입시부담과 무한경쟁은 심화된다. 결국 우리들이 선입견을 바꾸지 않는 한 미래는 바뀔 수 없다. 우리는 유명인들의 학력 위조에 유난히 예민하게 반응한다. 단지 그들이 그것으로부터 부와 명예를 얻었으며 또 공식화된 인정으로 많은 대중들을 기만했다고. 맞는 말이다. 그들은 예상치 못했던 대단한 학력을 앞세운 덕분에 많은 것들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일방적으로 질타하고 마녀사냥을 해서는 안된다. 그들 또한 학력 위주의 이 사회의 희생양이고 우리와 다를게 없는, 뭘해도 학력이라는 색안경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학력이 조금 좋고 나쁘다고 해서 다른 사람인가 보다 라고 생각하는 그 선입견부터가 문제이다. 이번 기회로 학력과 그 사람이 몸 담고 있는 분야의 능력에 대한 상관관계와, 우리가 만연하게 생각하는 출신의 환상에 대한 편견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본다.

2010년 6월 8일 화요일

하녀

저번에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하였다. 막 영화관에 도착하였을 때가 벌써 영화가 시작된지 2분정도 경과한지라 처음 보려고 했던 하녀는 포기하고 다른 것을 봤었다. 이런 나의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은 하녀 앞부분에 중요한 내용 없던데, 그냥 들어가서 보지그랬어, 다들 이런 반응이었다. 어... 그런데 오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앞 부분, 쓸모없는 내용이라기보다는 영화 전반에 걸친 상징적 느낌이 강하던데? 한 씬에 담긴 두 가지의 상반된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일을 하는 여자들과, 유흥과 소비를 즐기는 여자들. 일을 하는 여자들 그 속에는 주방일 하는 사람의 신분으로 은이가 첫 얼굴을 내민다. 시종일관 시끌벅적한 거리의 분위기 속을 일시 잠재우는 것은 한 여자의 자살. 하지만 이도 잠시뿐, 사람들은 호기심에 어린 눈으로 죽은 그녀를 바라보곤 멈추다 만 수다를 깔깔거리며 지나간다. 슬픈 분위기라곤 보이지 않는다. 그저 그녀가 죽어있는 그 자리에만 깔려져있는 정적에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나갈 뿐이다. 그 장면을 본 은이의 한마디, 야 구경가자. 일종의 암시이자 상징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젠 죽은 그녀의 흔적만이 남아있는 새벽의 그 거리를 다시 찾아와 지켜보았던 은이의 모습이..

김기영의 하녀와 임상수의 하녀를 비교하지 않겠다. 한 가정에 하녀가 고용된 후로 발생하는 사건들을 보여준다 뿐이지, 두 영화가 말하는 방향과 초점이 너무나 상반되기 때문이다. 다만 임상수의 순진하면서도 착한듯 맹한 은이의 캐릭터가 김기영의 하녀와 유사하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정말 아주 다른 작품이 탄생했다고봐도 무방하다. (김기영의 하녀는 맹하면서도 도발적인 팜므파탈을 가지고 있었다)

시대가 변했다. 김기영이 하녀를 말했던 60년대와 지금 우리들이 하녀를 말하는 방식은 아주 달라졌다. 고급 저택의 하녀로 고용되어 들어 온 은이에게 해라는 품격있는 고상한 말투로 자신의 속옷 빨래를 시킨다. 그리고 돈을 받고 당연하게 일하는 그녀에게 친절히 고맙다는 말을 건넨다. 그녀는 결코 은이를 막대하지 않는다. 해라의 남편인 훈 조차도 하녀라는 신분을 가진 그녀에게 막 대하는 법이 없다. 다정한 말투로 무언가를 시킬때도 강제적이기보다는 부드럽고 친근하다. 그들의 아이는 또 어떤가, 예의바르며 사근하게 군다. 그런 아이가 은이 또한 마음에 든다. 하지만 이런 그들의 친절은 은이가 훈과의 성적인 관계를 맺고 또 그 아이를 가지면서부터 180도 바뀐다. 해라와 해라의 모(母)는 아이를 지우지 않으려는 은이에게 보이지 않는 수를 써 아이를 유산시켜버리고, 미천하고 보잘 것 없는 그런 하녀의 신분을 짓밟는 말과 행동들을 서슴치 않고 행한다. 이런 그들의 변화는 원인과 결과가 따로 없는, 처음부터 당연한 것이었다. 그들의 친절은 자신들의 품격과 위상을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도구였을뿐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들은 아마도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던, 자신의 계급과는 전혀 다른 미천한 하녀라는 신분에 대한 의식을 품어왔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줌 지린 더러운 속옷을 손으로 직접 빨래하는 여자에 대한 그들의 막돼먹은 행동은 당연한 것이었다. 있는 자들은 있는 자들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우아한 식사를 하고 고상하게 책을 읽으며 그림들을 감상하고 또 베토벤을 연주하고 듣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아이에게 가르친다. 남에게 예의를 다하는 것은 남을 높여주는거 같지만 사실은 나 자신을 높이는 것이다 라고. 그들의 예의는 주위의 존경을 바라고 행하는, 자신들만의 고품격적인 세계를 창출하고자하는 일종의 계산된 행동이다. 은이가 마지막까지도 착각했던 그들의 진심 어린 친절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이 또한 그들 나름의 계급 나누기 방식이며 그 속에서 은이는 그들을 조롱하고자 복수를 도모한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보는 그 앞에서 자살을 하는 것. 보란 듯이 자살을 하는 거다. 그러면 아마 그들은 그들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는 죄책감에 평생을 살아가겠지, 란 생각을 했을거다, 아마도 은이는.. 하지만 그들의 세계를 조롱하려했던 은이는 되려 조롱을 당하고 만다. 결국 은이는 그들이 떠난 허황된 그들의 공간 안에서 처참하게 죽어간다. 그리고 은이의 예상과는 아주 다르게 그들은 죄책감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물론 이 또한 가식이지만) 다른 하녀들 앞에서 영어로 대화를 하며 또 다시 자신들의 세계에 금을 긋는다.

마지막 장면에서의 해라와 훈의 아이의 모습은 참으로 끔찍했다. 은이는 마지막까지 그래도 그 아이만큼은 자신에게 진심으로 친절하게 대해줬다고 고마워한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나면 그 아이의 친절이 정말 진심이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또한 그 아이가 미래의 해라와 훈과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 될 거란 무서우면서도 검은 기운이 감돈다.

임상수의 하녀는 욕망을 말하기보다는 계급을 말한다. 자본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고 말하는 지금 이 사회를 임상수를 조롱하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지만, 결국 별다른 대책없이 절대적으로 있는 자들에게 없는 자는 조롱당할 수 밖에 없는 허무함으로 끝을 맺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그 허무함 속에서 이 영화가 사회로부터 건진게 있다면 그건 다시 있는 자들에 대한 조롱일 것이다. 극 속에서 은이가 성공하지 못했던 그들을 향한 조롱을 현실 속의 관객들이 극 속의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조롱하는 것이다. 극 속에서 치졸한 냄새를 풍기며 대단하게도 자신들의 바운더리를 완성했던 해라와 훈과 미래의 그의 아이들을 보며 현실의 우리들이 품는 조롱만큼이나 대단한 힘을 가진 조롱 또한 없을 거라 생각한다.

2010년 6월 7일 월요일

현실의 재생산

십대들의 이지메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는 어느 누구도 영화의 목적을 위한 피해자 혹은 가해자로 설정하지 않고 있다. 그가 말하는건 오로지, 인간의 고통이고 릴리라는 가수의 노래의 영혼 속에서 그 고통을 위로받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 세계가 마냥 달콤하다고만 하기에 현실은 너무 길고 또한 가상의 안식은 영원할 수 없지만 현실은 멈추는 법 없이 흘러가는 법칙과도 같다. 자신의 팬사이트에서 글을 남기던 푸른 고양이가 현실에서 자신이 가장 증오했던 호시노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 하스미는 결국 호시노를 찔러 죽이게 된다. 그렇다면 이 죽음은 결국 이지메를 당했고, 자신의 주변인들까지 이지메를 시킨 호시노에 대한 복수였나.. 그건 아닌거 같다. 하스미는 언젠가 자신의 팬사이트에 등장한 푸른 고양이에게 개인적인 사연까지 물을정도로 그에대한 애정이 남달랐으며, 푸른 고양이 또한 가상세계에서 만난 샵지기 필리아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라이브콘서트에서 직접 만나자고 할 정도로. 그들은 릴리슈슈라는 가수를 통해 자신들의 고통과 고통받은 영혼의 갈라진 틈을 메꾸며, 서로가 서로를 고통받은 존재임을 인정하며 일종의 동질감에 대한 애정을 느꼈을 것이다. 분명 가상세계에선 모두가 고통을 위로받기 위해 릴리의 노래를 들으러 온 상처받은 자들이었는데, 현실에서 만난 둘은 한 사건의 피해자와 가해자의 신분으로 만나게 된다. 친구를 죽게하고, 잔인할 정도의 이지메를 주도한 호시노가 가상세계 속에선 상처를 치유받아야하는 사람으로 여겨졌다는 배신감, 같은 음악을 통해 위로 받았다는 불공평함이 하스미를 뒤섞으며 결국 하스미는 호시노를 죽이게 되는거 같다.

2010년 6월 6일 일요일

예술은 없었다 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고대부터 지금까지의 미술품들 중 진정 예술로써 인정되는 건 중세이후부터의 작품들이다, 한 마디로 작가는 예술의 본질과 기준에 대한 얘기를 했고, 그 얘기를 듣는 나는 그 기준과 본질의 모호성에 대한 아리송함을 느꼈다.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쨋거나 작가는 자신이 생각하는 예술이라는 기준을 바로 세워 끝을 맺었고, 나 또한 그와 같이 예술에 대한 나만의 기준과 본질을 세워야 함을 느꼈다. 하지만 답은 그리 호락호락 나오질 않았고 그 동안의 나는 많은 영화와 책을 읽으면서 그것들을 통해 내가 얻어내는 것은 무엇인지 또 나는 왜 그것들을 보기위해 영화관을 들어서고, 애써 시간을 내어 책을 읽는지 생각해보았다.

정확하진 않지만, 오늘 들었던 생각 중 하나는..
나는 영화와 책 속의 주인공들의 행동, 인생, 인생관, 가치관, 태도 등을 통해 그들이 아닌 나의 모습을 성찰하고 이해하고 이해받고 싶었던거 같다. 스토리를 위한 작품들을 보고나면 이상하릴만큼의 개운치 못한 느낌을 받곤 한다. 그것들을 보는 동안 나는 그것들에서 눈을 뗄 수 없을 만큼의 흥미와 재미 그리고 감동을 느끼지만, 그건 결국 그 순간일뿐이지 영화관을 나서고나면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허무함 또한 느낀다. 하지만 반대로 나의 모든 것들을 뒤돌아보고, 작품이 유도한 주제에 대한 생각에 골똘해지고, 또 작품 속에서 우연치않게 내가 걸어가야할 길의 동지들을 만나게되면 그들을 통해 나의 존재를 다시금 환기할 수 있게 되는데, 나는 이 때의 기쁨과 충족감이 좋다. 작품을 보는 순간의 짧은 기쁨이 아니라 작품을 다 보고나서 되새김질하면서 얻는 기쁨.
어쩌면 그 되새김질은 나를 살게하는 유일한일지도 모른다.

현실적인 여건도 되고, 그 여건만큼이나 나의 수준도 함양된다면 나도 그런 작품을 만들고 싶다.
다 보고서 영화관을 나올때 생각할 거리들이 많은 영화,
단순한 재미만이 아니라 의미가 중요한 영화,
단순히 영상의 매력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영상과 아우러지는 메세지를 담고 있는 영화 를 만들고 싶다. 나도.

뭐, 그게 나의 예술가치관이라면 가치관이겠지..?
마음 가는대로 살아라

쉽지만은 않았던 지난 날을 살아오면서 터득한 삶의 노하우 중의 하나가 아닐까, 진짜 내가 말하는 나의 자유를 행하라. 오늘의 추천책 코너에 있던 책의 표지문구에 쓰여져있었다. 마약, 불륜 등 많았던 시련들의 시간들을 지나 온 그녀가 그 때를 돌이켜보며 써내려간 책이었던거 같다.

하지만 그의 책소개 아래에는 자신의 자유를 행하면서 얻을 타인의 피해를 자유를 위해서였다고 합리화하는 작가의 태도에 대해 제발 어른이 좀 되라는 일침을 놓고 있었다, 누군가가.. 아마도 그는 작가의 불륜 경험에 대한 일침을 놓기 위함이었던거 같다.

그의 리플을 읽고나니 그럴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정이 있는 남자와 사랑에 빠져 그 둘은 행복을 찾았다한들, 가정이 전부였던 여자에겐 그들의 행복이 독이 되어버리고 만다. 더군다나 그와 그녀가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 떠나겠다는 선언이라도 있게되면, 가정 밖에 기댈 곳이 없었던 여자는 정말이지 무참하게 버려지고 추스릴 수 없을 것만같은 상처를 받게 된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과 자유를 행하는 것,
그 둘의 관계에 관심이 생겼다.


꼭 내 자유가 타인의 피해가 될 수 있다 라는 공식이 아니라, 나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의 자유를 행하기 때문에 내 자유는 엄연히 존중되어야한다 라는 자부심 속에 살아가는 한 남자의 속내와는 다른, 실제로는 그의 자유에 피해를 받지만 그가 자신에게 미치는 그 피해마저도 사실의 그의 자유에 대한 소산이기때문에 모든 걸 이해하는 주변인에 대한 상상을 했다. 문제는 그는 언제나 주변인에 대한 불평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왜 내 주변인은 타인을 고려하지 않은 자유를 행할까, 나는 이렇게나 내가 아닌 상대방만 생각하는데 왜 사람들은 그러는걸까, 라는 섭섭한 불만을 토로하는 것이다.

타인에 대해서 알면서도 일부러 꼬집어내지 않고 감내해야하는 부분들이 존재한다. 나 또한 그런 행동을 할지도 몰라, 라는 생각에서라기보다는 그런 당연한 부분까지 일일이 들춰내다보면 완벽한 사람에 대한 갈망과 동시에 현실의 사람에 대한 불만만 늘어가기 때문이다. 사람은 결코 완벽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알면서도 그들은 자신의 환상 속의 사람을 쉼없이 쫓아간다.

2010년 6월 5일 토요일

1.
미리 끊어놓았던 영화를 기다리면서 4명의 친구들이 모여 수다를 떠는 자리가 있었다, 어제. 사실 우리들이 하는 말의 대부분은 실없는 농에 불과하고 진지한 토론이라기보다는 서로에 대해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끄덕거림같은 동조와, 자신이 아는 부분에 대해선 광적으로 달려들어 그만큼의 자신을 보여주려는 과시가 묘하게 섞여있다. 그런 어제의 우리들에게 가장 맞아떨어지는 주제는 역시나 정치였고, 그 중에서도 몇 일전에 있었던 지방선거였다. 한나라당이니 민주당이니 이명박이니 고 노무현 대통령이니 정치엔 관심도 없는 젊은이들이니 요즘 대학생들은 데모도 안하는 학생들이니 뭐니.. 사실, 정치라는 주제가 확답적이고 그리 단촐한 대답이 유도될 수 없는 주제라 생각하는 나는 흥분할 때는 그들과 함께 흥분하지만, 흥분되지 않는 그런 날엔 그저 그들의 말을 들으며 곱씹으며 정치보다는 그 말을 하는 그들 자체를 분석하기도 한다.


정치비판에 이제 입이 닳아 없어지려고 한다.





2.
버스를 타고 가다 그런 생각을 했다. 버스 안에서 했던 생각이라고 하기엔 조금 어이없고 쌩뚱맞지만.. "나는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의 모습이 보였지만 그게 나의 모습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거울 그 자체를 믿을 수 없기도 했지만, 사실 거울에 비친 나라는 자신을 더 믿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 또한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하나이지 못했다. 100명의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100명의 내가 되고, 1000명의 사람들을 만나면 1000명의 내가 어지럽게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나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보는 거울을 믿을 수 없기도 했고, 100명의 나를 하나의 나로 합일시킬 자신 또한 없었다. 나는 도대체 누군가.."






3.
특정 당을 싫어하긴 하지만, 앞 뒤 못 가릴정도로 전적으로 그들과 그들의 말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그들아 하는 말들 중에서 극히 드물지만 그래도 괜찮다 싶은 발언들이 나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경우는 아주아주 드물더라. 어쨋거나 그들의 말도 들어보면 일리가 있긴하다. 문제라면 그들의 생각과 가치관이 나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 문제이지. 쨋거나 그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언제나 중간에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편협하지 않은 태도를 보이려고 노력한다.

두 명의 후보를 두고 고민을 했다. 사실 둘 다 그리 탐탁치 않았기에 농담삼아 기권을 하더라도 투표는 해야하지 않겠냐는 말을 서슴치않고 하고 다녔었다. 그 정도로 구미가 조금이라도 당기는 쪽이 없었다. 고민에 빠진 나에게 아버지는 1번을 찍으라고 넌지시 말을 흘리셨다. 당신의 말에 의해면 당신의 진급승진에 1번후보의 영향이 지대하며, 혹시라도 2번후보가 당선되었을 경우 당신은 은퇴날까지 승진은 불가능할꺼라는 말이었다. 사실 말하자면 나는 아버지를 그리 좋아하지도 않고, 아버지의 저 말은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나의 찡그린 얼굴 위로 아버지는 명예에 대한 욕심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연세에 대한 욕심어린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기우뚱하게 나를 쳐다보는 그 눈빛이 느껴졌고 괜시리 나는 무언가 북받치는 기분을 느꼈다.

사람은 나이에 따라 변해가야하고, 짊어져야하는 책임이 있으며 또한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기에 나 자신의 충만함보다는 타인이 보았을때 충만한 사람이면 좋겠다라는 욕망을 품고 살아간다. 어쩌면 그건 욕망이라기보다는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가지고 있는 단촐한 욕심이며 또 살아가는 이유가 아닌가? 그리고 어쩌면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아직도 찾지 못했기 때문에 타인의 잣대와 시선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한것이 아닐까? 자신의 거울을 직시하여 보지 못하고 100명의 사람들에게 휘둘리는 100개의 어지러운 자아들의 퍼즐을 맞추어 자신이 되지 못하는 하나의 자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게 아닐까?

2010년 6월 4일 금요일

'사람들은 다르다.' 라는 말은 사실 '타고나길 모두가 다른 사람이었다.' 라고 단순한 해석보다는 어쩌면 '사람들은 저마다 살아 온 시간들과 경험들이 다르고, 그것들을 떠올리는 가치관과 생각들이 다르기 때문에, 결국 모두가 달라진다.' 라는 해석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외면하는 영화를 보고 나온 다섯명의 친구들 중 모두가 그랬듯 그 영화를 폄하하는 친구들도 있겠지만, 반대로 그 영화를 통해 깊은 감명을 받고 나오는 친구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그 영화 속에서 보편적으로 이해 받을 수 없었던 기억 속의 자신을 찾았을 것이고, 그를 통해 일종의 동질감과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잠재되어있는 자신의 모습을 찾는 것이며 또한 그를 통해 자신과 동일시되는 감정을 느끼는 것인데, 간혹 우리는 무비판적인 흡입력으로 나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영화 속의 주인공을 자신과 동일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심하게는 영화 속의 세계와 나의 세계를 구별하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어찌보면 이건 그리 새로운 경향의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모두가 어림짐작으로 알고는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까놓고 말하지는 못했던 사실이 아닌가.

아주 사소한 예를 들자면, 가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가 다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가상의 영화를 보고서도 그것이 가짜의 세계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현실에서 혼동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그건 아이들에게 아직 임의의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는 능력이 발달되지 않아서이지, 영화 '극장전'의 동수의 경우처럼 생각하지 않고서 무작정 현실의 세계에 가상의 세계를 동일시한 것과는 사뭇 다르다.



예전에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 모두는 이기적이다, 자신을 위해 영화를 만들고, 또 관객들은 자신을 위해 영화를 보러오고, 그 영화 속에서 자신과 자신만의 생각을 찾고선 극장을 나선다. 지금 생각해보건데 이 말은 아마도 홍상수감독이 한 얘기가 아닐까 싶다. 이 말이 영화 '극장전'을 보는 내내 수도 없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홍상수감독이 아니라도 상관은 없다. 어쨋거나 내 생각 속에선 이 말이 '극장전'을 쏙 빼닮은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동수는 선배의 회고전을 보고 극장을 나서면서, 그 영화가 자신과 쏙 빼닮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영화를 본 듯한, 영화 속의 여주인공으로 연기했던 영실을 보고선 그녀를 뒤쫓아간다. 그녀를 보고는 그녀 또한 자신과 같이 선배의 영화를 기념하며 촬영현장을 둘러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수는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고, 나중에는 영화에서처럼 그녀와의 잠자리를 요구하고선 같이 죽자고 말하지만, 그런 그에게 그녀는 영화를 잘 못 본거 같다는 말을 남기고는 떠난다. 그리고 동수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생각을 해야 내가 살 수 있어, 생각을 해야해 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길을 걸어가고 있다.



사실 동수의 오도된 자신만의 생각과 감정은 영화의 무자비한 동일시와 관련이 크다. 영화를 한번 더 생각해보고 그 내용물들을 한차례 자신만의 방식으로 걸러보지도 않고서 무조건적으로 그를 수용하고 일체화시켰을 때의 고립을 홍상수감독은 말하고 있다. 어쩌면 그 영화가 그의 삶과 기억에 굉장히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어, 그를 통해 깊은 감명과 감동을 받아서 그런거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건 현실 세계에서 인정받을 수 없는 자신만의 생각이라는 추상성에 대한 말이지, 동수처럼 현실과 가상을 혼돈하면서까지 현실에서 추상성을 인정받기란 꽤나 힘들기 때문이다. 덧붙여 극장 속의 인물들은 실제가 아닌 연기를 하는 것이며, 나 자신 또한 그것이 현실과 비슷하지만 현실과는 아주 다른 세계를 맛보러 들어간다는 부분은 인정하고서 극장을 들어선다.



영화관을 처음 들어섰던 유년이 기억난다. 2시간여동안을 달콤한 나만의 환상 속에서 젖어있다가 현실로 돌아오려했을 때의 그 허무함. 하지만 그건 또 다른 영화의 존재 이유가 되는 듯하다. 현실을 거스름을 인정하면서 영화를 바라보면서 얻는 그 짧은 달콤함, 쾌감, 그것들을 느끼러 우리는 극장을 들어선다.

2010년 6월 3일 목요일

나라는 존재를 비우고서 들어선 극장의 그 영화가 과연, 재미있을까?



(원했던 순서가 아닌데 그냥 귀찮아서 냅둔다..)
그저께 새벽, 추천받은 영화 '토니 타키타니'를 보았다. 가벼운 러닝타임 덕분에 가벼운 새벽을 맞이할 수 있을꺼란 생각은 아주 잠시, 보는 내내 영화와 이미지에 대한 혼란을 느꼈다. 이 영화는 몇 장의 사진과 아주 단편적인 영상에 서정적인 음악이 어우러져 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흐르는 강처럼 한 줄기의 이야기로 이루어져있는 일반 영화와는 사뭇 달랐다. 이야기가 진행되어간다는 느낌보다는 정지되어 있는 이미지든, 아주 짧은 단편의 영상이든 어쨋거나 토막, 토막의 이미지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리고 일반 스토리를 말하는 영화들에서는 두드러지게 느낄 수 없었던 이미지가 주는 세기가 유난히 강하게 다가왔다. 그런 외로움과 고독을 말하는 이미지들의 한 묶음을 보고 있자니, 영화가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과 함께 영화 속에서의 이미지는 무엇인가 라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이미지들의 향연인 영화를 처음 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영화들은 스토리를 위한 이미지를 사용한 경우였지, 이번처럼 스토리보다 이미지가 중시되는 경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았다고 하기에는 조금 무색하고, 음악이 어우러진 이미지 전시회를 봤다고 말하는게 오히려 적당한 영화, 토니 타키타니. 그 속의 이미지들은 위의 캡쳐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군더더기없이 모던하면서도 깔끔한,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청취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 설정과 탁한 잿빛의 배경이 어우러지면서 그 속에서 외로운 주인공의 뒷모습이 더욱 처연하고도 처절하게 느껴진다. 배우의 정면 모습보다는 측면이나 뒷모습이 많이 쓰이면서 직설적으로 감정을 주기보다는 다소 간접적으로 그렇기에 표정이 보이지 않는 그에 대한 결핍을 보는 이의 감정으로 충분히 채울 수 있게끔 유도해준다.
그런데 인물의 고독과 외로움은 항상 저런 느낌이어야 하는걸까? 어떻게보면 저건 이미지가 갖을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아닌가? 그러니까 정확하게 다시 말하자면, 영화라는 통로를 사용해 인물이 현재 지니고 있는 감정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이미지를 사용함으로써 이 영화가 고독과 외로움을 만들어내는데에 한계를 갖고 있는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나는 결코 이미지를 통해 영화를 말하는게 나쁘다 혹은 잘못되었다 라는 말을 하려는게 아니다. 단지, 내 생각에는 이왕 들어선 영화라는 통로에서 인물의 감정을 적나라한 화면을 통해 보여준다기 보다는 그 감정을 보는 이가 유추할 수 있게끔, 인물이 겪는 사건들과 그에 대응하는 행동으로 보여줄 수도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배낭에 한보따리 식량과 짐을 짊어지고서 집을 나온 철 없는 십대소년이 해가 지기 시작하자 뿔뿔이 저마다의 집으로 떠나는 친구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저 외로운 것이 아니라 떠나는 친구들의 뒷모습을 보다가 불끈 주먹을 쥐고 오른 뒷산에서 굴러 넘어지면서 배낭을 잃어버림으로써 어두워 길도 보이지 않고 축축한 산 중에 홀로 남아 있음을 본인이 깨닳을 때, 우리는 소년의 외로움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집은 나옴으로써 일종의 자신의 인생에서 버린 일부분이 되었지만 아끼고 아끼는 물건들을 담은, 자신의 마지막 보물로써 여겨지던 가방을 잃어버림으로써 그가 느꼈을 허탈감과 외로움과 주인을 잃었을 가방과 같이 자신 또한 가방에게서 버려졌음을 다시 한번 더 상기 시킬 수 있다. 이렇게 인물의 외로움을 표현하기 위한 여러가지 방법들 중 나는 인물이 직접 그 사건 속에 휘말리고 그 사건이 인물의 태도와 감정을 유도케하는 방법이 그냥 보여주기 형식보다는 훨씬 인상적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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