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16일 수요일

'왜 이 일을 하고싶냐?' 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던건, 어쩌면 내가 그 대답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 일을 하고 싶다는 부탁을 하기까지의 생각들과 고민들이 분명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일에 발을 담그기까지 내가 해왔던 모든 열망들과 상상이 일종의 도피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나조차도 떨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에게서 비롯된 도피라면 나는 지금이라도 이 일의 시작을 말아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건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다. 나는 이 일이 자기발견의 통로라고 생각했다. 만약 이 일이 자기발견의 통로가 아니라, 나에게서 비롯된 의미없는 도피에 불과했다면, 나는 지금이라도 빨리 다른 통로를 찾아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에게서 가장 슬픈 사람은 자기발견을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특정의 그런 사람들이 슬프다기보다는 그런 사람들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또 그들을 단순한 소비의 중심체로 다루려고 하는 비인간적인 사회에서 느껴지는 슬프다 못한 잔혹함이다. 적어도 나는 그런 사람들이 되지 않으려 하며, 그런 사회의 만연한 의식이 나만의 통로로 인해 틈새가 마련되길 바라는 것이다.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을 근거로 나만 행복하게 살아가는 건, 혼자 살아갈 때에 느낄 수 있는 자만일 뿐이다.

그런데 이 글을 막 시작한 순간, 나는 느꼈다.
결코 내가 나로부터의 도피를 이 일의 시작점으로 삼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마도 나는 잔혹함을 행복으로 포장하는 이 사회로부터 도피를 하고 싶었던거 같다. 나를 나로써 인정해주지 않고, 너를 너로써 받아들여주지 않는 사회에 대해 나는 나고, 너는 너다 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던 거 같다. 그리고 그 말을 하기 위한 통로로써 영화나 영상을 하고 싶다는 열망을 품었고. 소설가 이청준은 사회로부터 자기 세계를 압박받고, 인정받지 못하고, 사회에 대한 불만이 많은 사람들이 바로 글을 쓰는 사람들이다, 현실에서 굴복당한 현실의 이야기를 자신이 창조하는 글을 통해 역전시킴으로써 일종의 만족감을 맛본다. 이런 그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속으로 뜨거운 무엇인가를 꾹꾹 참아내고 있었다. 그래. 나는 내가 싫어서 도피를 한게 아니다.


그 날의 '왜' 라는 질문은
방황하고 있던 나에게 세상을 향해 더욱 꼿꼿이 곤두서라고 말했다.
신념이 없는 말과 생각은 결국 시간이 흐르면 죽어버리고 만다. 아무리 대단한 말이고 생각이라할지라도 그냥 흘러가고 마는 농담과 같은 수준이 되어버린다. 신념, 지금 내게 필요한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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