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분명하다. 그랬다. 나는 생각치도 못했던 여러 장소에서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에게서 소외되었기 때문이다. 나의 외로움은 무관심 때문이다. 나의 외로움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마음 때문이다. 고로 나의 외로움은 수치이다. 무관심은 안과 밖을 따로 구분짓지 않고 언제나 불쑥 불쑥 솟아오른다.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한 무관심이기도 했고 나의 주변 것들에 대한 무관심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나를 소외시킨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나 자신이 이런 외로움을 느낄 줄 모르고 모든 것들에 무관심을 일관하며 살아왔는지에 대해. 아니, 어쩌면 유리처럼 약한 나의 이 감정을 대책없이 신뢰했던 나 자신에 대해 자책감이 든다. 나는 왜 이토록 외로워져야 하나. 나는 왜 이토록 외로운 감정을 생성한 것일까. 그것도 무식할 정도로 자의적으로 말이다.
푸념에 불과한 말들이 아닌 근본적인 말들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왜 이토록 타인들을 배척하는 것인가. 나는 왜 타인들이 나의 인생과 살결을 부대끼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타인들을 향해 웃음을 던지는 것일까. 만인에게 웃음은 단지 편협한 감정에 불과한 것인가. 물론 이 경우의 웃음은 호감을 사기 위한 웃음을 모두 제한다. 감정이 들어가지 않은, 정지된 웃음은 아무런 뜻 없는 표정만을 위한 표정인가. 모르겠다. 나는 타인들이 좋지도 싫지도 않다. 나는 나 자신 또한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인간의 탈을 쓰고 앉아 있는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사람인가 아니면 한낱 밤거리를 떠도는 영혼일 뿐인가. 그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다. 도대체 내 안에 있는 자는 누구인가.
문득 외롭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내 손으로 사람들의 손길을 거부하면서도 사람들이 나에게서 발길을 돌리는 행위를 야속하게 생각한다. 모순적이다. 나도 이해할 수 없는 나의 모습은 이질적이지만 현실이다. 나는 사람들이 나를 향해 웃어주는 것을 보며 때때로 외롭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의 웃음은 표정을 위한 표정일까 아니면 감정에 동한 표정일까. 사실 나의 이런 질문들은 부질없다. 웃음이 유효했던 시간은 이미 지나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왜, 도대체 왜, 이런 외로운 질문들을 한단 말인가. 질문이라 하기엔 너무도 과분한, 그저 황량한 말 뿐인 말을 나는 도대체 왜 하고 있는 걸까. 마음이 문득 외롭다. 이는 날씨가 추워져서가 아니다. 우연히, 아주 우역히 추웠던 내 마음이 겨울과 동하였기 때문이다.
2011년 12월 22일 목요일
글을 쓰지 않은 근 며칠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살아가다는 것은 곧 끊임없는 사건들의 연속이니, 제 아무리 미동 없는 삶을 살아간다 할지라도 그 속에 숱한 사건들과 감정의 소용돌이가 있음은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나의 일상을 그리고 나의 감정을 글로 옮기지 않은 근 며칠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차곡 차곡. 그리고 연속적으로, 때론 불연속적으로.
하지만 나는 여전하다. 여전히 방황하고 있고 여전히 멍청한 상태이다. 어쩐지 나의 정신은 항상 0점에 머물러 있다. 플러스적인 감정도, 마이너스적인 감정도 없이 항상 0점에 머물러 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얼기설기 엮어져 있었던 감정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나의 외로움은 거기서 시작된다. 내가 내 자신을 잃어버린 것 같은 허무함. 어떤 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기억 속에서조차 가물거리는 기억들.
그런 말을 했었다. 난 무언가에 얽매이는 게 너무 싫다고. 얽매이는 게 싫다고. 내 말을 듣고 있던 누군가가 대답했다. 얽매인다는 건 누군가와 만나고 있을 때나 느낄 수 있는 경험이고, 그때만 유효한 감정이잖아. 나는 답하였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 자체가 얽매이는 것이라고. 짝사랑이라 할지라도 사람은 누군가를 좋아하는 순간부터 그 사람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얽매게 되는 것이라고. 아니, 그 사람의 모든 것에 나 자신을 얽매게 되는 것이라고.
어쩌면 그건 자존심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가령, 예정된 약속 시간을 훨씬 넘긴 상대를 10분 더 기다려야 하는 순간에 느끼는 감정 말이다. 약속 시간에 딱 맞춰 도착한 나의 정성은 바보가 되고 더 이상 상대방의 반응에 순진한 웃음을 흘릴 수 없게 된다. (물론 이 경우 또한 시간이 흘러가면서 무뎌지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렇다) 이건 내가 남들보다 못나게 예민해서 느끼는 감정일지도 모르겠으나 무튼 그러하다. 자존심의 문제이다.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것만큼 그대는 나를 생각해주지 않는다는 자존심의 문제. 내가 10분 일찍 나와 그대를 기다리는 것만큼 그대는 추위에 떨고 있을 나를 걱정해주지 않는다는 것. 서글픈 목소리보다 자존심이 구겨지는 소리가 먼저 터져버린다.
그렇지만 나는 결코 오만한 사람은 아니다. 사실로 말하자면, 나는 오만한 사람이 못 된다. 난 그렇게 태어났으니까.
죽음에 대한 생각이 멎었다. 하지만 의문이 든다. 그만큼 내가 건전해진 것인지 아니면 퇴화하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분간이 되질 않는다. 나는 너무 멀쩡해지고 말았다. 나를 위협하는 이 환경에 적응을 한 것인지 아니면 체념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심각할 정도로 멀쩡해지고 말았다. 쏜살같이 달려가던 방황의 그림자가 그립다. 지금 내가 느끼는 방황은 사실 거짓말이 전부이다. 나는 방황을 하고 있지만 방황을 하고 있지 않다. 아무래도 나는 지금 퇴화를 시도 중인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니 외로워진다. 그래도 나에게, 적어도 나에게, 이렇게나 편협한 나에게, 세상이 그저 과분한 나에게 이런 공간과 하찮은 말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쏟아낼 수 있는 이런 시간이 있어서 나는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미약하지만 의식을 제한 무의식과 대화하는 이 시간이 너무나 좋다.
어제는 그 카페를 갔었다. 두 번째였다. 나를 울게 만들었던 그 곳을, 다시 갔었다. 그때 난 분위기에 벅차올랐었다. 그리고 내 앞에서 내 눈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그 사람의 두 눈과 입에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나 또한 눈으로 화답을 하는 수밖에. 무튼 그런 곳을 갔었다. 구조는 바뀌어 있었지만 공간을 둥둥 울리는 음악을 한 품에 안고 있는 스피커와 어두침침한 공기는 그대로였다. 첫 눈에 좋아하고 말았던 노르스름한 조명도 여전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음악을 들었고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함께 간 친구가 고른 LP음악을 들었다. 핑크 플로이드.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이름 그리고 그들의 앨범의 표지를. 그리고 나에게 두 번째 추억을 선사한 그곳까지 말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하다. 여전히 방황하고 있고 여전히 멍청한 상태이다. 어쩐지 나의 정신은 항상 0점에 머물러 있다. 플러스적인 감정도, 마이너스적인 감정도 없이 항상 0점에 머물러 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얼기설기 엮어져 있었던 감정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나의 외로움은 거기서 시작된다. 내가 내 자신을 잃어버린 것 같은 허무함. 어떤 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기억 속에서조차 가물거리는 기억들.
그런 말을 했었다. 난 무언가에 얽매이는 게 너무 싫다고. 얽매이는 게 싫다고. 내 말을 듣고 있던 누군가가 대답했다. 얽매인다는 건 누군가와 만나고 있을 때나 느낄 수 있는 경험이고, 그때만 유효한 감정이잖아. 나는 답하였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 자체가 얽매이는 것이라고. 짝사랑이라 할지라도 사람은 누군가를 좋아하는 순간부터 그 사람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얽매게 되는 것이라고. 아니, 그 사람의 모든 것에 나 자신을 얽매게 되는 것이라고.
어쩌면 그건 자존심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가령, 예정된 약속 시간을 훨씬 넘긴 상대를 10분 더 기다려야 하는 순간에 느끼는 감정 말이다. 약속 시간에 딱 맞춰 도착한 나의 정성은 바보가 되고 더 이상 상대방의 반응에 순진한 웃음을 흘릴 수 없게 된다. (물론 이 경우 또한 시간이 흘러가면서 무뎌지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렇다) 이건 내가 남들보다 못나게 예민해서 느끼는 감정일지도 모르겠으나 무튼 그러하다. 자존심의 문제이다.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것만큼 그대는 나를 생각해주지 않는다는 자존심의 문제. 내가 10분 일찍 나와 그대를 기다리는 것만큼 그대는 추위에 떨고 있을 나를 걱정해주지 않는다는 것. 서글픈 목소리보다 자존심이 구겨지는 소리가 먼저 터져버린다.
그렇지만 나는 결코 오만한 사람은 아니다. 사실로 말하자면, 나는 오만한 사람이 못 된다. 난 그렇게 태어났으니까.
죽음에 대한 생각이 멎었다. 하지만 의문이 든다. 그만큼 내가 건전해진 것인지 아니면 퇴화하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분간이 되질 않는다. 나는 너무 멀쩡해지고 말았다. 나를 위협하는 이 환경에 적응을 한 것인지 아니면 체념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심각할 정도로 멀쩡해지고 말았다. 쏜살같이 달려가던 방황의 그림자가 그립다. 지금 내가 느끼는 방황은 사실 거짓말이 전부이다. 나는 방황을 하고 있지만 방황을 하고 있지 않다. 아무래도 나는 지금 퇴화를 시도 중인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니 외로워진다. 그래도 나에게, 적어도 나에게, 이렇게나 편협한 나에게, 세상이 그저 과분한 나에게 이런 공간과 하찮은 말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쏟아낼 수 있는 이런 시간이 있어서 나는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미약하지만 의식을 제한 무의식과 대화하는 이 시간이 너무나 좋다.
어제는 그 카페를 갔었다. 두 번째였다. 나를 울게 만들었던 그 곳을, 다시 갔었다. 그때 난 분위기에 벅차올랐었다. 그리고 내 앞에서 내 눈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그 사람의 두 눈과 입에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나 또한 눈으로 화답을 하는 수밖에. 무튼 그런 곳을 갔었다. 구조는 바뀌어 있었지만 공간을 둥둥 울리는 음악을 한 품에 안고 있는 스피커와 어두침침한 공기는 그대로였다. 첫 눈에 좋아하고 말았던 노르스름한 조명도 여전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음악을 들었고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함께 간 친구가 고른 LP음악을 들었다. 핑크 플로이드.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이름 그리고 그들의 앨범의 표지를. 그리고 나에게 두 번째 추억을 선사한 그곳까지 말이다.
2011년 12월 11일 일요일
1.
사실 누군가가 그립다는 것은 나 자신이 그립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것은 나 자신과 대화를 하고 싶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나는 또 다른 너이고, 너는 또 다른 나가 아닌가.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되고. 우리는 너와 나의 물아일체를 꿈꾸며 상대방을 그리워 한다.
2.
혼자 길을 걷다보면 어느새 아팠던 마음이 치유되었다는 기분이 든다. 오늘처럼 살갗이 추운 날이면 더욱더. 차가운 공기를 크게 들이 마셨다 내뱉는 순간의 쾌감, 자연에게서 느끼는 절대순수의 쾌락. 그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겨울이 되어 너무나 행복하다.
사실 누군가가 그립다는 것은 나 자신이 그립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것은 나 자신과 대화를 하고 싶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나는 또 다른 너이고, 너는 또 다른 나가 아닌가.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되고. 우리는 너와 나의 물아일체를 꿈꾸며 상대방을 그리워 한다.
2.
혼자 길을 걷다보면 어느새 아팠던 마음이 치유되었다는 기분이 든다. 오늘처럼 살갗이 추운 날이면 더욱더. 차가운 공기를 크게 들이 마셨다 내뱉는 순간의 쾌감, 자연에게서 느끼는 절대순수의 쾌락. 그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겨울이 되어 너무나 행복하다.
2011년 12월 4일 일요일
그녀는 이전에 나로 하여금 인생이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여러 번 믿게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언젠가 내가 인생의 무의미함에 대해 깊게 탄식했을 때 니나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인생의 의미에 대해 묻는다면 그는 그 의미를 결코 알게 되지 못할 거예요. 그것을 묻지 않는 자만이 해답을 알아요. 그녀는 이것을 지나가면서 얘기했다. 생각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고양이와 장난을 치고 있었다. 니나는 그 당시 매우 불행했다. 두번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였고 내가 그녀를 가스 자살로부터 구해 주었을 때였다. 그녀는 분명 자기 인생을 내던졌다. 그러나 인생을 다시 얻은 그 순간 그녀는 또 한번 인생의 의미를 믿고 있었다. 아직 푸르죽죽하고 초췌한 모습으로 그녀는 말했다. 내가 의식을 잃기 시작한 때만큼 생을 미치도록 강력하게, 정말 지겨우면서도 멋지다고 느껴본 적이 전에는 없었어요. 이 이상 그녀다운 말이 있을까.
왜 나는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가.
왜 나는 어두운 지하실에나 앉아 부드러운 종말을 소망하는 것일까. 이제부터라도 정말 살아보려 하지 않는가.
루이저 린저의 '생의 한 가운데'
P.27
아무런 기대 없이 거리를 쏘다니다 들어간 가게에서 내 몸에 꼭 맞는 옷을 찾은 것 같은 기쁨!
오오 기쁘다. 그런데 아쉬움이 든다. 이 책을 1년만 일찍 읽었다면 나는 그 동안 덜 힘들었을 수도 있었을 거란 생각에. 요즘은 삶에 대한 회의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살아가는 것에 대해 농도 짙은 회의를 느끼곤 했었다. 아아. 때때로 삶 저편에 있을 아름다운 것들 때문에 삶을 등한시하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많이, 많이, 사무치도록 든다.
왜 나는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가.
왜 나는 어두운 지하실에나 앉아 부드러운 종말을 소망하는 것일까. 이제부터라도 정말 살아보려 하지 않는가.
루이저 린저의 '생의 한 가운데'
P.27
아무런 기대 없이 거리를 쏘다니다 들어간 가게에서 내 몸에 꼭 맞는 옷을 찾은 것 같은 기쁨!
오오 기쁘다. 그런데 아쉬움이 든다. 이 책을 1년만 일찍 읽었다면 나는 그 동안 덜 힘들었을 수도 있었을 거란 생각에. 요즘은 삶에 대한 회의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살아가는 것에 대해 농도 짙은 회의를 느끼곤 했었다. 아아. 때때로 삶 저편에 있을 아름다운 것들 때문에 삶을 등한시하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많이, 많이, 사무치도록 든다.
2011년 11월 27일 일요일
가끔은 살기 싫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나는 결사코 나의 목숨을 연명하는 일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나는 내가 살아가는 이 세계가 지겨울 뿐이다. 단지 싫을 뿐이다. 단지 환멸을 느낄 뿐이다. 멀미가 날 정도의 환멸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나면 삶에 대한 의욕이 뚝 떨어진다.
왜들 그렇게 조급한지 모르겠다. 자꾸 채근을 한다. 너는 언제 인턴을 시작할 것이냐, 구체적인 너의 삶의 계획은 무엇이냐, 어떤 직장에 취직하고 싶으냐 등등. 가장 듣기 싫은 말은 내 인생을 뻔히 보고 있다는 듯한 거만한 뉘앙스로 나의 장래를 점지하는 말들이다. 신물이 울컥 솟구친다. 넌더리가 난다.
나의 세계 안에서 나는 한번도 내가 이상주의적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몽상가가 아니었다. 단지 나는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판단을 하고 싶었고, 사람에게 사랑스런 연민을 품을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이런 바람들은 나의 외부 세계와 언제나 충돌. 충돌로 인해 무참히 부서진 마음의 잔해들은 편린처럼 기억 속에 여전히 박혀 있다.
기억의 상처에 뒤엉켜 나는 지독한 환멸을 느낀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계가 과연 있기는 한걸까.
나이가 들어갈수록 세상에 대한 괴리가 커지고 있다.
나는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에 직면했고, 이것도 저것도 하기 싫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타인과 나의 각기 다른 가치관 충돌이라고는 납득할 수 없을 만큼 환멸적인 세상이 여기에 있다. 옳고 그름의 경계는 흐트러진 지 오래이다.
속상함은 끊이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
왜들 그렇게 조급한지 모르겠다. 자꾸 채근을 한다. 너는 언제 인턴을 시작할 것이냐, 구체적인 너의 삶의 계획은 무엇이냐, 어떤 직장에 취직하고 싶으냐 등등. 가장 듣기 싫은 말은 내 인생을 뻔히 보고 있다는 듯한 거만한 뉘앙스로 나의 장래를 점지하는 말들이다. 신물이 울컥 솟구친다. 넌더리가 난다.
나의 세계 안에서 나는 한번도 내가 이상주의적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몽상가가 아니었다. 단지 나는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판단을 하고 싶었고, 사람에게 사랑스런 연민을 품을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이런 바람들은 나의 외부 세계와 언제나 충돌. 충돌로 인해 무참히 부서진 마음의 잔해들은 편린처럼 기억 속에 여전히 박혀 있다.
기억의 상처에 뒤엉켜 나는 지독한 환멸을 느낀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계가 과연 있기는 한걸까.
나이가 들어갈수록 세상에 대한 괴리가 커지고 있다.
나는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에 직면했고, 이것도 저것도 하기 싫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타인과 나의 각기 다른 가치관 충돌이라고는 납득할 수 없을 만큼 환멸적인 세상이 여기에 있다. 옳고 그름의 경계는 흐트러진 지 오래이다.
속상함은 끊이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
2011년 11월 25일 금요일
살다보면 누군가와 만남을 갖거나 혹은 어떤 일을 할 때, "싫으면 할 수 없고." 라는 말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존재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직 잘 납득이 되지 않는 말이다. 그건 아마도 심리적인 요인 때문일지도 모른다. 특히 그것이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문제일 경우에는 불편함이 배가 된다.
타인이 나를 싫어하는 상황을 나는 아직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모든 이들이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아니다. 단지 나는 누군가에게 모난 사람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이 싫을 뿐이다. 그의 기억 속에 혹은 나의 이름을 올리는 그의 입에 내가 모난 사람으로 남는다는 건 분명 비극이며 수치이다. 그 자리에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의 말이 남긴 그의 기억 속의 나라는 존재는 쉬이 무시할 수가 없다. 괴롭다. 그래서 나는 안과 밖이 다른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안의 내 모습, 나의 말들은 밖의 상황에 따라 종종 무시되곤 한다. 그리고 주눅이 든다.
"싫으면 할 수 없고."
속 시원하게 말하고 싶다. 요즘 말대로 정말 쿨한 척. 이 세상에서 나 혼자 쿨한 인간인 척. 쉽게 내뱉고 싶다. 그리고 타인의 시선에 한정될 수 밖에 없는(시선의 폭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 또한 내가 특정한 타인에게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은 한정적이니) 나의 이미지에서 탈피하고 싶다.
타인이 나를 싫어하는 상황을 나는 아직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모든 이들이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아니다. 단지 나는 누군가에게 모난 사람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이 싫을 뿐이다. 그의 기억 속에 혹은 나의 이름을 올리는 그의 입에 내가 모난 사람으로 남는다는 건 분명 비극이며 수치이다. 그 자리에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의 말이 남긴 그의 기억 속의 나라는 존재는 쉬이 무시할 수가 없다. 괴롭다. 그래서 나는 안과 밖이 다른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안의 내 모습, 나의 말들은 밖의 상황에 따라 종종 무시되곤 한다. 그리고 주눅이 든다.
"싫으면 할 수 없고."
속 시원하게 말하고 싶다. 요즘 말대로 정말 쿨한 척. 이 세상에서 나 혼자 쿨한 인간인 척. 쉽게 내뱉고 싶다. 그리고 타인의 시선에 한정될 수 밖에 없는(시선의 폭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 또한 내가 특정한 타인에게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은 한정적이니) 나의 이미지에서 탈피하고 싶다.
2011년 11월 23일 수요일
p. 37
나라 전체로서는 정직함에 기댈 것이 아니라 필연성에 기대야 한다. 잘 살고 못 사는 것을 공무원과 정치인의 미덕과 양심에 기댈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그들의 법질서는 언제까지나 불안할 것이다.
p.43
맨더빌은 사람의 마음과 행동을 위선적으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했지만 또한 위선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나라 전체로서는 정직함에 기댈 것이 아니라 필연성에 기대야 한다. 잘 살고 못 사는 것을 공무원과 정치인의 미덕과 양심에 기댈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그들의 법질서는 언제까지나 불안할 것이다.
p.43
맨더빌은 사람의 마음과 행동을 위선적으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했지만 또한 위선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우리는 위선이 아니고서는 사회적 동물이 될 수가 없다. (......) 제가 하는 속생각이
남에게도 고스란히 다 드러나게 되어 있다면, 말을 할 줄 아는 이상, 남에게 상처받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장례 치르는 사람은 남의 죽음으로 돈을 벌지만 남들이 더 많이 죽어줬으면 좋겠다는 말은 꺼내서는 안되며, 남의 죽음 앞에서는 기쁘더라도 슬픈 시늉을 해야 한다. 그렇더라도 그것이 참된 속마음이라 믿고 도덕과 사회제도로 그런 믿음에 맞추어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남들 장례로 돈을 벌게 되어 좋다고 생각하거나 남의 죽음이 진실로 슬프게 생각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비난할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사람이 저를 먼저 생각하는 자연스러운 본성일 뿐이다. 달리 말하면, 위선 자체는 받아들일 수 있으나 위선에 대한 위선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자 했다.
문득 내가 갈구하는 세계는 어떤 곳인가라는 물음이 가슴 속에서 치솟았다. 그 물음에 마음이 동해 나는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일상 속의 소소한 수다나 사소한 어긋남이라도 좋으니 오늘은 이곳에서 마음껏 회포를 풀고 싶다.
'세계'란 단어에 하나의 이야기를 떠올랐다. 동화책 속의 이야기나 소설 속의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로 구축된 하나의 세계 말이다. 쉽게 말해서 가상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여기서는 실현될 수 없는, 오로지 이야기적인 세계. 나는 그런 세계를 무척이나 동경하는 사람이다. 그 세계가 가진 미덕은 현실을 반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기분에 젖을 수 있다는 사실에 있는데, 나는 그 점이 무척이나 좋다.
여기서 어긋나는 이야기와 인연들 혹은 우연들이 그 곳에서는 당연하게 성립될 수 있다. 여기서는 불가능한 행복들이 거기서는 완벽해질 수 있다. 아. 갑자기 슬퍼져 온다. 그토록 행복한 세상이 여기서는 실현될 수 없다니. 아니, 더 깊이 말해서 그런 세상이 전혀 실현될 수 없다는 전적인 믿음이 내 안에 뿌리내려 있다니. 일종의 회의감이다. 그리고 비애이고 처연함이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과연 미래를 살아갈 수 있을까. 시간은 앞으로 흐르는데 자꾸 나는 뒷걸음질 치고 있는 기분이다. 도태와는 또 다른 어조의 소외.
'세계'란 단어에 하나의 이야기를 떠올랐다. 동화책 속의 이야기나 소설 속의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로 구축된 하나의 세계 말이다. 쉽게 말해서 가상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여기서는 실현될 수 없는, 오로지 이야기적인 세계. 나는 그런 세계를 무척이나 동경하는 사람이다. 그 세계가 가진 미덕은 현실을 반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기분에 젖을 수 있다는 사실에 있는데, 나는 그 점이 무척이나 좋다.
여기서 어긋나는 이야기와 인연들 혹은 우연들이 그 곳에서는 당연하게 성립될 수 있다. 여기서는 불가능한 행복들이 거기서는 완벽해질 수 있다. 아. 갑자기 슬퍼져 온다. 그토록 행복한 세상이 여기서는 실현될 수 없다니. 아니, 더 깊이 말해서 그런 세상이 전혀 실현될 수 없다는 전적인 믿음이 내 안에 뿌리내려 있다니. 일종의 회의감이다. 그리고 비애이고 처연함이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과연 미래를 살아갈 수 있을까. 시간은 앞으로 흐르는데 자꾸 나는 뒷걸음질 치고 있는 기분이다. 도태와는 또 다른 어조의 소외.
2011년 11월 15일 화요일
그 동안 잊고 있었는데 가족들과 불화를 겪은 그 날 이후부터 사실상 나는 어느 정도의 경제적 독립을 했나 보다. 물론 자의가 아니었기에 독립이라는 단어에 어폐가 있긴 하지만.
방금 전 뜬금없이 엄마가 물었다. 9,10월 두 달치 핸드폰 요금은 어떻게 했냐고. 난 당연히 대답했다. 내지 않았으니 미납된 상태가 아니겠냐고. 그런데도 핸드폰 사용이 가능하냐고 엄마는 물었고, 나는 이런 질문이 안겨주는 식상함에 기분이 상해 말을 막 해 버렸다. 그런데 그러고 나니 속이 더 상한다.
안그래도 오늘 아침에 핸드폰 고지서를 받아 든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었다. 두 달치 핸드폰 요금이 자그만치 12만원. 하나의 문장만이 머리를 때리고 지나갔다. '감당할 길이 없다.'
더욱 더 슬픈 것은 지금 신문요금도 두 달치, 아니 이젠 석 달치나 밀렸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오만원이다.
결국 합을 하면 자그만치 17만원을 나는 당장 만들어야하는 셈이 된다. 그냥 앞 길이 막막해졌다.
비탄이 쏟아진다.
방금 전 뜬금없이 엄마가 물었다. 9,10월 두 달치 핸드폰 요금은 어떻게 했냐고. 난 당연히 대답했다. 내지 않았으니 미납된 상태가 아니겠냐고. 그런데도 핸드폰 사용이 가능하냐고 엄마는 물었고, 나는 이런 질문이 안겨주는 식상함에 기분이 상해 말을 막 해 버렸다. 그런데 그러고 나니 속이 더 상한다.
안그래도 오늘 아침에 핸드폰 고지서를 받아 든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었다. 두 달치 핸드폰 요금이 자그만치 12만원. 하나의 문장만이 머리를 때리고 지나갔다. '감당할 길이 없다.'
더욱 더 슬픈 것은 지금 신문요금도 두 달치, 아니 이젠 석 달치나 밀렸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오만원이다.
결국 합을 하면 자그만치 17만원을 나는 당장 만들어야하는 셈이 된다. 그냥 앞 길이 막막해졌다.
비탄이 쏟아진다.
2011년 11월 13일 일요일
요즘만큼 살아있다는 기분을 투철하게 느낀 적이 없었다. 정신적 식량을 마구 마구 씹어 먹고 있다. 먹는 족족 모든 걸 소화하고 있진 않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다. 오늘은 지가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를 봤다. 영화를 보면서 어제 정성일 선생님의 말씀을 듣길 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본다'는 것의 의미, 그 동안 지각하지 못했던 나의 눈과 뇌에 그려지는 스크린의 상관관계. 영화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지만 가장 쉽게 간과되는 것들, 그 모든 것들이 베르토프의 영화 속에서 환생하고 있었다. 참으로 의미있는 일이다. 이 시대에 베르토프의 영화를, 정성일 선생님의 말씀을, 영화의 본질이 지닌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참 많다.
오늘, 하나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참 많다.
오늘, 하나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2011년 8월 20일 토요일
아직도 창 밖에선 매미가 울고 있다. 나는 벌써 팔이 긴 티셔츠를 입었는데 말이다. 어제는 일부러 모기향을 켜지 않고 잤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에 모기가 내 피를 빨아 먹는다 한들 아프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어쩌면 연민에).
멀리서 들려오던 매미 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오면 섬뜩한 기분이 든다. 혹시 나도 모르게 구멍난 방충망 사이로 들어왔을까봐. 방금 전에도 그런 공포에 사로잡혀 베란다로 조심스럽게 갔었지만 방충망은 이상무. 매미는 콘크리트 벽에 붙어 울고 있었다. 뭔가 서글퍼졌다. 쫓아내지도 못하고 있는데 우는 소리가 너무 선명해서 자꾸 내 근방에 있는건 아닌가 주위를 살핀다.
길었던 방학이 이제 거의 일주일하고 절반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목표로 했던 영어 공부에는 다소 소홀했지만 하고 싶었던 일들 중 하나를 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든다. 안그랬으면 정말 아무 것도 안하고 방학을 날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부턴 하고 싶은 일에만 매달릴 수 없는 현실에 도피하지 말아야 한다. 응시해야 한다. 이제부터 어떻게 지낼지가 더욱 중요한 지금 이 시점.
사실 난 내가 현실주의자가 되어가는 것 같아 두려운 기분이 든다. 현실주의자가 되더라도 현실순응자는 되지 말아야지. 적당히 세속적인 사람은 될지언정 현실 불가능한 이상적인 미래를 꿈꿔야지. 현실 불가능하기에 아름다운 미래를 이룩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멀리서 들려오던 매미 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오면 섬뜩한 기분이 든다. 혹시 나도 모르게 구멍난 방충망 사이로 들어왔을까봐. 방금 전에도 그런 공포에 사로잡혀 베란다로 조심스럽게 갔었지만 방충망은 이상무. 매미는 콘크리트 벽에 붙어 울고 있었다. 뭔가 서글퍼졌다. 쫓아내지도 못하고 있는데 우는 소리가 너무 선명해서 자꾸 내 근방에 있는건 아닌가 주위를 살핀다.
길었던 방학이 이제 거의 일주일하고 절반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목표로 했던 영어 공부에는 다소 소홀했지만 하고 싶었던 일들 중 하나를 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든다. 안그랬으면 정말 아무 것도 안하고 방학을 날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부턴 하고 싶은 일에만 매달릴 수 없는 현실에 도피하지 말아야 한다. 응시해야 한다. 이제부터 어떻게 지낼지가 더욱 중요한 지금 이 시점.
사실 난 내가 현실주의자가 되어가는 것 같아 두려운 기분이 든다. 현실주의자가 되더라도 현실순응자는 되지 말아야지. 적당히 세속적인 사람은 될지언정 현실 불가능한 이상적인 미래를 꿈꿔야지. 현실 불가능하기에 아름다운 미래를 이룩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2011년 8월 10일 수요일
가족들이 나를 걱정해주는 것은 매우 애정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이 어떤 의도를 숨기고서 등을 떠미는 걱정일 때는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나에게는 현실감을 체감하는 온도가 남들보다 조금 낮다. 가족들은 그런 나를 번번히 걱정한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부모님의 든든한 울타리 아래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른 나이에 (잠깐) 사회 생활을 했었던 오빠가 사회의 잔혹함에 너무 빨리 적응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며, 어쩌면 가족들이 보는 나는 아직도 고3 수능을 마치고 어떤 대학에 갈지를 몰라 방황했었던 청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그런건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어쨋든 가족들의 눈에 비치는 나는 매우 비현실적이고 세상으로부터 소심한 반항을 하는 아이이다.
나를 오해하는 가족들에게 해명을 하고 싶긴 하지만 그들의 말을 극구 부인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아무리 나와 의견이 다른 말일지만 그들의 말 어느 구석에 묻어 있는 나에 대한 애정을 나는 거부할 자신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것들을 가끔 그들과의 대화에서 듣곤 하는데 그 수확 또한 나름 쏠쏠하다. 하지만 그들이 보는 내가 아직도 유약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나를 조금 슬프게 한다.
고3 수능을 치고서 어떤 대학에 갈지를 몰라 고민했었던 열아홉살의 내가 생각난다. 그 때 나는 대학교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소위 이유없이 속 편한 부류들 중 하나였었다. 내가 속이 편한 대신 엄마와 오빠가 전전긍긍이었지만 말이다. 오빠는 나보다도 열성적으로 재수학원을 뛰어다니며 내가 갈 수 있는 대학 상담을 자처하였고 나는 그저 오빠가 따다주는 열매를 먹기에 바빴다. (물론 그 시절 오빠의 종종걸음에 비하면 나는 천하태평이었지만) 오빠의 열성 덕분이었는지 나는 성적보다 좋은 대학의 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학교를 그만두기를 택했었다. 아무런 쾌감도, 열정도 없는 학교에 발 디디고 있을 자신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 시절에 나는 늦은 사춘기를 겪으며 일찍이 자아 정체성을 확립시켜주지 못한 학교의 제도와 부모님들 탓을 많이 했었다. 물론 당시 나는 나의 불평이 타당한 것이라 믿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 때의 불평은 내가 따 먹었었던 열매들이 내 손으로 직접 얻은 수확물이 아니었기에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애정을 들여 키우지 않은 나무의 열매를 따먹는 행위의 무의미를 나는 자각하진 못했지만 느끼고는 있었던 것이다. 몇 년이 지난 지금, 만약 내가 다시 가족들이 따다 주는 열매를 그대로 받아 먹는다면 나는 스무살에 그랬던 것처럼 나에게서 패배감을 느끼곤 지레 물러서고 말 것 이다. 내가 내 스스로 나무를 길러 열매를 수확해 먹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매일 매일 차곡 차곡. 내 안의 나무를 길러야겠다.
나에게는 현실감을 체감하는 온도가 남들보다 조금 낮다. 가족들은 그런 나를 번번히 걱정한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부모님의 든든한 울타리 아래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른 나이에 (잠깐) 사회 생활을 했었던 오빠가 사회의 잔혹함에 너무 빨리 적응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며, 어쩌면 가족들이 보는 나는 아직도 고3 수능을 마치고 어떤 대학에 갈지를 몰라 방황했었던 청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그런건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어쨋든 가족들의 눈에 비치는 나는 매우 비현실적이고 세상으로부터 소심한 반항을 하는 아이이다.
나를 오해하는 가족들에게 해명을 하고 싶긴 하지만 그들의 말을 극구 부인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아무리 나와 의견이 다른 말일지만 그들의 말 어느 구석에 묻어 있는 나에 대한 애정을 나는 거부할 자신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것들을 가끔 그들과의 대화에서 듣곤 하는데 그 수확 또한 나름 쏠쏠하다. 하지만 그들이 보는 내가 아직도 유약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나를 조금 슬프게 한다.
고3 수능을 치고서 어떤 대학에 갈지를 몰라 고민했었던 열아홉살의 내가 생각난다. 그 때 나는 대학교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소위 이유없이 속 편한 부류들 중 하나였었다. 내가 속이 편한 대신 엄마와 오빠가 전전긍긍이었지만 말이다. 오빠는 나보다도 열성적으로 재수학원을 뛰어다니며 내가 갈 수 있는 대학 상담을 자처하였고 나는 그저 오빠가 따다주는 열매를 먹기에 바빴다. (물론 그 시절 오빠의 종종걸음에 비하면 나는 천하태평이었지만) 오빠의 열성 덕분이었는지 나는 성적보다 좋은 대학의 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학교를 그만두기를 택했었다. 아무런 쾌감도, 열정도 없는 학교에 발 디디고 있을 자신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 시절에 나는 늦은 사춘기를 겪으며 일찍이 자아 정체성을 확립시켜주지 못한 학교의 제도와 부모님들 탓을 많이 했었다. 물론 당시 나는 나의 불평이 타당한 것이라 믿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 때의 불평은 내가 따 먹었었던 열매들이 내 손으로 직접 얻은 수확물이 아니었기에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애정을 들여 키우지 않은 나무의 열매를 따먹는 행위의 무의미를 나는 자각하진 못했지만 느끼고는 있었던 것이다. 몇 년이 지난 지금, 만약 내가 다시 가족들이 따다 주는 열매를 그대로 받아 먹는다면 나는 스무살에 그랬던 것처럼 나에게서 패배감을 느끼곤 지레 물러서고 말 것 이다. 내가 내 스스로 나무를 길러 열매를 수확해 먹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매일 매일 차곡 차곡. 내 안의 나무를 길러야겠다.
2011년 8월 5일 금요일
이번주 주말도 곧장 지나가 버릴 것 같고. 그렇게 생각하니 결국 이번 방학도 한 것 없이 훌쩍 지나가버린 것 같다는 허무감이 감돈다. 하하. 그래도 올해 처음 계획했었던 일 하나는 잘 성사된 것 같아 뿌듯하다. (물론 그게 다시 나의 발목을 잡고 있지만. 겸허히 받아들여야하는 시간이자 서툰 나를 다듬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다음주면 이제 2학기 시간표를 짜야될 것 같다. 이번 학기는 특히나 설레인다. 나도 이제 복수전공을 듣는단 말이지. 버거웠던 영어 전공이 줄어서 좋긴 하다. 근데 생각보다 쉽진 않을 것 같다. 잘 해내야지.
또, 다음주엔 부산 국제 어린이 영화제가 열린다. 호기심에 홈페이지를 살폈는데 아이들이 만든 단편 영화도 상영한다는 소식에 신기하면서도 궁금했다. 아이들의 눈으로 만든 영화는 어떨런지. 궁금하다. 왠지 무질서, 무규칙 안에서 볼 수 있는 특유의 창의성을 볼 수 있을 것 같군. (이번 어린이 영화제에는 내가 좋아하는 '여행자'도 상영한다지. 그걸 다시 영화관에서 볼 수 있다니. 감동이야 흑흑)
다다음주는 집 도배를 새로하기로 했다. 옅은 연두색을 생각하고서 인테리어 집에 갔었는데 그닥 끌리는 벽지가 없었다. 결국 그 자리에서 충동 선택한 연노란색 벽지가... 기대된다. 두근두근. 방이 어떻게 바뀔지. 그 방에 앉아 있는 나는 어떤 기분을 느낄지. 생각보다 벽지의 색감이 사람의 기분을 크게 좌우하는 것 같다. 걱정 반, 기대 반.
그리고 다다음주에는 수강신청이 있지. 폭발적인 클릭질을 선보여야 할 것 같군. 매번 굳은 결의를 다지지만, 난 언제나 그랬듯 수강신청 패배자일뿐. 허허.
그리고 다다다음주에는 서울에 다녀올 것 같다. 으허허. 이번 달에는 뭔가 꽉 차있구나.
다음주면 이제 2학기 시간표를 짜야될 것 같다. 이번 학기는 특히나 설레인다. 나도 이제 복수전공을 듣는단 말이지. 버거웠던 영어 전공이 줄어서 좋긴 하다. 근데 생각보다 쉽진 않을 것 같다. 잘 해내야지.
또, 다음주엔 부산 국제 어린이 영화제가 열린다. 호기심에 홈페이지를 살폈는데 아이들이 만든 단편 영화도 상영한다는 소식에 신기하면서도 궁금했다. 아이들의 눈으로 만든 영화는 어떨런지. 궁금하다. 왠지 무질서, 무규칙 안에서 볼 수 있는 특유의 창의성을 볼 수 있을 것 같군. (이번 어린이 영화제에는 내가 좋아하는 '여행자'도 상영한다지. 그걸 다시 영화관에서 볼 수 있다니. 감동이야 흑흑)
다다음주는 집 도배를 새로하기로 했다. 옅은 연두색을 생각하고서 인테리어 집에 갔었는데 그닥 끌리는 벽지가 없었다. 결국 그 자리에서 충동 선택한 연노란색 벽지가... 기대된다. 두근두근. 방이 어떻게 바뀔지. 그 방에 앉아 있는 나는 어떤 기분을 느낄지. 생각보다 벽지의 색감이 사람의 기분을 크게 좌우하는 것 같다. 걱정 반, 기대 반.
그리고 다다음주에는 수강신청이 있지. 폭발적인 클릭질을 선보여야 할 것 같군. 매번 굳은 결의를 다지지만, 난 언제나 그랬듯 수강신청 패배자일뿐. 허허.
그리고 다다다음주에는 서울에 다녀올 것 같다. 으허허. 이번 달에는 뭔가 꽉 차있구나.
2011년 8월 2일 화요일
마룬 5의 Happy Christmas (War is over)
존 레논의 You And Whose Army
김윤아의 검은 강
개인적으로 맑고 청아하면서도 자신만의 굵은 줄기를 가지고 있는 김윤아의 목소리는 좋아하는 편이나 그녀의 노래를 그리 즐겨듣진 않는다. 아니, 즐겨 듣지 못한다고 해야하나? 그녀의 노래 소리를 듣고 있자면 가슴이 침체된다. 심장이 뛰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을 것만 같은 두려움이 든다. (신나는 노래에서도 종종 느껴지곤 하지) 하지만 오늘은 꼭 들어야만 할 것 같았다. 왜냐, 오늘 아침에 영화 '그을린'을 보고 왔으니까. ('그을린 사랑' 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지만 작년 국제 영화제에서 상영했을 당시의 제목은 '그을린'이었다.) 막상 영화를 보고 나오니 '그을린'이란 제목에 더 애정이 간다.
존 레논의 노래는 영화에서 수도 없이 반복됐다. 처음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내가 기억하는 한도 내에서만 한 세번 정도 나왔던 것 같다.
마룬5 의 Happy Christmas는 정말 좋아하는 노래. 한 가지 음악에 꽂히면 수도 없이 반복해 듣는 것을 즐기는 나에게 낯선 음악을 접하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다. 하지만 이 노래의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저 괄호 안의 부제목에 한껏 끌려 있었다. 노래를 만든 사람 그리고 이 노래를 부른 사람 모두 마음씨가 예쁘리라는 혼자만의 상상을 했었다. 물론 가사의 마음 씀씀이도 아름다웠다. 다른 사람을 위해 노래를 불러주는 일이 행복하고 또 아름다운 일이라는 걸 이 노래를 통해 알게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루시드 폴의 '사람이었네'도 참 좋아하는 노래들 중 하나)
오늘 봤던 영화의 리뷰는 이 노래 세곡들로 충분할 것 같다. 단지 그것 뿐이다.
존 레논의 You And Whose Army
김윤아의 검은 강
개인적으로 맑고 청아하면서도 자신만의 굵은 줄기를 가지고 있는 김윤아의 목소리는 좋아하는 편이나 그녀의 노래를 그리 즐겨듣진 않는다. 아니, 즐겨 듣지 못한다고 해야하나? 그녀의 노래 소리를 듣고 있자면 가슴이 침체된다. 심장이 뛰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을 것만 같은 두려움이 든다. (신나는 노래에서도 종종 느껴지곤 하지) 하지만 오늘은 꼭 들어야만 할 것 같았다. 왜냐, 오늘 아침에 영화 '그을린'을 보고 왔으니까. ('그을린 사랑' 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지만 작년 국제 영화제에서 상영했을 당시의 제목은 '그을린'이었다.) 막상 영화를 보고 나오니 '그을린'이란 제목에 더 애정이 간다.
존 레논의 노래는 영화에서 수도 없이 반복됐다. 처음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내가 기억하는 한도 내에서만 한 세번 정도 나왔던 것 같다.
마룬5 의 Happy Christmas는 정말 좋아하는 노래. 한 가지 음악에 꽂히면 수도 없이 반복해 듣는 것을 즐기는 나에게 낯선 음악을 접하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다. 하지만 이 노래의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저 괄호 안의 부제목에 한껏 끌려 있었다. 노래를 만든 사람 그리고 이 노래를 부른 사람 모두 마음씨가 예쁘리라는 혼자만의 상상을 했었다. 물론 가사의 마음 씀씀이도 아름다웠다. 다른 사람을 위해 노래를 불러주는 일이 행복하고 또 아름다운 일이라는 걸 이 노래를 통해 알게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루시드 폴의 '사람이었네'도 참 좋아하는 노래들 중 하나)
오늘 봤던 영화의 리뷰는 이 노래 세곡들로 충분할 것 같다. 단지 그것 뿐이다.
2011년 7월 29일 금요일
아침부터 매미들이 요란하게 울고 있다. 이번 여름은 이른 장마 탓에 매미들이 작년에 비해 조금 늦게 온 것 같다. 진정, 매미 우는 소리는 여름과 잘 어울린다.
이번주부터는 본격 휴가철이라고. 매일 해운대로 쏟아지는 인파들만 보아도 알 것 같다. 같은 땅덩어리인데 한 쪽에서는 물난리, 한 쪽에서는 물놀이라니.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계절도 계절이고, 일상에서 묵은 때를 씻을 수 있는 휴가도 그 나름의 가치가 있고 개인적 삶을 즐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럴 때면 괜히 마음이 안 좋아진다. 매일 쏟아지는 슬픈 뉴스의 사건, 사고들을 보고 나서 저녁을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것도 아이러니하다. 단지 타인의 일이라서 그런건가, 아님 우리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하는 인간이라서 그런건가. 옳고 그르다는 판단이 아닌 뭔가 아이러니한 세상에서 어찌되었건 평온한 삶을 유지하는 우리들이 조금은 신기하다.
이번주부터는 본격 휴가철이라고. 매일 해운대로 쏟아지는 인파들만 보아도 알 것 같다. 같은 땅덩어리인데 한 쪽에서는 물난리, 한 쪽에서는 물놀이라니.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계절도 계절이고, 일상에서 묵은 때를 씻을 수 있는 휴가도 그 나름의 가치가 있고 개인적 삶을 즐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럴 때면 괜히 마음이 안 좋아진다. 매일 쏟아지는 슬픈 뉴스의 사건, 사고들을 보고 나서 저녁을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것도 아이러니하다. 단지 타인의 일이라서 그런건가, 아님 우리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하는 인간이라서 그런건가. 옳고 그르다는 판단이 아닌 뭔가 아이러니한 세상에서 어찌되었건 평온한 삶을 유지하는 우리들이 조금은 신기하다.
2011년 7월 26일 화요일
어제는 무감각한 하루를 보냈었다. 언제나 나의 일상은 보이지 않는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지만 어제는 유독 하강을 하던 하루였다. 주말동안 연신 영화를 돌려보며 글을 쓰느라 소모한 에너지를 보충한다는 명목으로 몇 시간동안 누워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었다. 천장을 계속 보다보니 천장이 눈 앞에 있는 듯 선명해지다가 아득해졌다. 생각보다, 생각만큼 아파트의 천장은 그리 높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언젠가 주문처럼 되뇌이곤 했었던, '곧 천장은 바닥이 된다.' 란 말. 그 말이 왠지 떠올랐었다. 후에, 언젠가 나에게 있어 천장이 바닥이 되는 날이 있을까.
하루를 어물쩡거리며 보내고 나면 문득 사람이 그리워진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어진다. 그 맘때쯤이면 이미 홀로 글을 쓰는 일에는 물려 있다. 아무나, 누군가가 불러주기만 한다면 쪼르르 한 걸음에 달음박질 칠 수도 있을 것만 같다. 그래도 어제는 다행스러운 하루였었다.
오랜만에 밤 카페를 갔었고 오랜만에 해운대 바닷가도 거닐었었다. 여름 밤 해운대를 거닐다보면 이상한 우월감이 생긴다. 특히나 낯선 말투가 들려오면 더욱. 저들은 피서를 즐기기 위해 돈을 들여 오는 해운대를 우리는 모자 하나에 슬리퍼를 끌고서 대충 나와도 되는 동네이니까.
밤 카페. 이십대란 참 이상한 나이이다. 특히나 이젠 어린 이십대가 아닌 우리들의 대화는 조금 어정쩡했고 또 불안감이 넘쳤다. 아이도 어른도 아니며, 학생도 직장인도 아닌, 어떤 과도기에 걸쳐 있는 듯한 느낌. 취업을 준비하는 친구들을 보면 나는 벌써 그네들의 일을 내 일인 것처럼 실감하곤 한다. 이십대에는 모든 것이 빨리간다고 했던 말을 이제서야 실감하곤 한다.
기가 빠져버린 친구와의 대화. 나는 종종 그 친구와 회의적인 말하기를 즐기곤 했었다. 그건 우리 둘의 성격이 생각보다 잘 맞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들은 조심성이 과하게 심각한 성격이었다. 나는 고민이 너무 많아서 탈이었고 친구는 생각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우리들은 용기가 부족했었다. 지난날 다녀왔던 5일간의 여행을 떠올리며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그 때 우린 낯선 곳과 사람들을 향해 연신 경계를 내비쳤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이었는지. 만약 다시 여행을 가게 된다면 어떤 장소도, 어느 누구도 배척하지 않아야겠다는 말을 했었는데 그게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다. 어찌되었건 우리의 대화는 바람 빠진 풍선 같았다.
조조영화를 보고 왔다. 요즘 무심할 정도로 공부엔 신경을 못 쓰고 있다.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일에 대한 욕심이 점점 커지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난 워낙에 허풍스런 욕심이 많은 사람인지라 공부도 제대로 하고 싶은데... 그런데 또 난 워낙에 행동력이 없고 만사 귀찮아 하는 사람이기에 말처럼 그게 쉽진 않다. 허허.
영화를 보면서 확실하게 얻은 명쾌한 한 가지가 있다. 확실히 영화는 내 삶에 활력소가 되어 준다. 특히 잘 만들어진 영화는. 그리고 영화를 고민하는 순간에는 내가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꿈틀거림이 느껴져서 좋다. 지지부진하지만 그래도 걸어가고 있는 것 같다. 그게 내가 내 심장을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인 것 같다.
하루를 어물쩡거리며 보내고 나면 문득 사람이 그리워진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어진다. 그 맘때쯤이면 이미 홀로 글을 쓰는 일에는 물려 있다. 아무나, 누군가가 불러주기만 한다면 쪼르르 한 걸음에 달음박질 칠 수도 있을 것만 같다. 그래도 어제는 다행스러운 하루였었다.
오랜만에 밤 카페를 갔었고 오랜만에 해운대 바닷가도 거닐었었다. 여름 밤 해운대를 거닐다보면 이상한 우월감이 생긴다. 특히나 낯선 말투가 들려오면 더욱. 저들은 피서를 즐기기 위해 돈을 들여 오는 해운대를 우리는 모자 하나에 슬리퍼를 끌고서 대충 나와도 되는 동네이니까.
밤 카페. 이십대란 참 이상한 나이이다. 특히나 이젠 어린 이십대가 아닌 우리들의 대화는 조금 어정쩡했고 또 불안감이 넘쳤다. 아이도 어른도 아니며, 학생도 직장인도 아닌, 어떤 과도기에 걸쳐 있는 듯한 느낌. 취업을 준비하는 친구들을 보면 나는 벌써 그네들의 일을 내 일인 것처럼 실감하곤 한다. 이십대에는 모든 것이 빨리간다고 했던 말을 이제서야 실감하곤 한다.
기가 빠져버린 친구와의 대화. 나는 종종 그 친구와 회의적인 말하기를 즐기곤 했었다. 그건 우리 둘의 성격이 생각보다 잘 맞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들은 조심성이 과하게 심각한 성격이었다. 나는 고민이 너무 많아서 탈이었고 친구는 생각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우리들은 용기가 부족했었다. 지난날 다녀왔던 5일간의 여행을 떠올리며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그 때 우린 낯선 곳과 사람들을 향해 연신 경계를 내비쳤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이었는지. 만약 다시 여행을 가게 된다면 어떤 장소도, 어느 누구도 배척하지 않아야겠다는 말을 했었는데 그게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다. 어찌되었건 우리의 대화는 바람 빠진 풍선 같았다.
조조영화를 보고 왔다. 요즘 무심할 정도로 공부엔 신경을 못 쓰고 있다.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일에 대한 욕심이 점점 커지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난 워낙에 허풍스런 욕심이 많은 사람인지라 공부도 제대로 하고 싶은데... 그런데 또 난 워낙에 행동력이 없고 만사 귀찮아 하는 사람이기에 말처럼 그게 쉽진 않다. 허허.
영화를 보면서 확실하게 얻은 명쾌한 한 가지가 있다. 확실히 영화는 내 삶에 활력소가 되어 준다. 특히 잘 만들어진 영화는. 그리고 영화를 고민하는 순간에는 내가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꿈틀거림이 느껴져서 좋다. 지지부진하지만 그래도 걸어가고 있는 것 같다. 그게 내가 내 심장을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인 것 같다.
2011년 7월 22일 금요일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1년이라는 과거의 시간이 흐른만큼 나는 미래의 1년을 내다본다. 아무렴 그것이 허무한 일인 줄 알면서도 넘어다보게 된다. 아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미래를 넘어보는 것은 그리 허무한 일이 아닐 것이란 생각도 든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고 나는 또 다시 1년을 살아갈 것이다. 그 1년 동안 무엇을 하며 살아갈지는 내 상상력에 뿌리를 내린 꿈의 나무만이 알겠지. 오늘 아주 작고 어린 묘목을 사와야 겠다.
우리집엔 객식구가 6명 있다. 작은 송사리 다섯 마리와 정확한 이름은 알지 못하지만 송사리보다 더 크고 성격도 거친 물고기 한 마리.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었던 어느 날, 그것들은 엄마의 손에 이끌려 혹은 인연에 이끌려 혹은 갈 곳이 없어 얼떨결에 우리집으로 떠밀려 왔기에 나는 그들을 객식구라 부른다. 작고 투명한 원통의 플라스틱 안에 담겨져 물 비린내를 풍기고 있었던 그 아이들은 이내 내 안의 연민을 불러 일으켰고 나는 그것들을 책임지겠노라 크게 선언했었다. 한 마디로 연약한 객식구들의 엄마가 되기로 한 것이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들 중 어느 주인공이 여자를 사랑하는 방식이 그러했듯, 나 또한 그것들을 연민으로 아끼고 사랑하고 싶었다. 손 끝에서 전해지던 그들의 아픔은 내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그것들을 사랑하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감에서 시작되었었다. 그렇게 나는 처음에는 어항에 코를 대기에도 아찔했던 물 비린내에 점점 적응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봄에는 알을 잔뜩 품고서 어항을 돌아다니는 그들을 보고선 뿌듯함을 가지기도 했다. (여의치 않았던 상황에 결국 아기 물고기는 보지 못했지만) 어쩌다보니 객식구가 식구가 되었고 물 비린내를 맡으며 그것들이 물 속을 자유로이 노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멍하게 넋을 놓고서, 마음의 짐들을 놓고서 그것들이 헤엄치는 모습만 봐도 가슴이 절로 시원해진다. 오늘은 오랜만에 물을 갈아주었더니 저들도 기분이 좋은지 힘차게 물을 박차고 다닌다. 식구라니. 식구. 무언가와 함께 산다는 것에, 그리고 누군가가 내 마음 속에 자리를 잡는다는 것에 귀찮음을 느꼈던 나에게(비록 여전히 귀찮음을 느끼지만) 식구라는 단어는 생소하지만 봄의 새순이 돋아나는 느낌에 마음이 온화해진다. 내 마음 속의 식구라니.
무얼하며 살아가나 고민이 든다. 하고 싶은 것들은 많지만 그것들이 과연 돈벌이가 될 수 있을까. 돈을 버는 것은 일을 선택하는 것에 있어서 언제나 차후의 문제이지만 가끔 걱정은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를 놓칠 줄도 알아야함을 나는 아직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익히 들어왔지만 막상 내 앞의, 내 선택이 되었을 때 나는 참 많이 아쉬워하고 또 기뻐할 것 같다. 시간을 조금 앞으로 걸어가는 방법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 것 같다.
1년이라는 과거의 시간이 흐른만큼 나는 미래의 1년을 내다본다. 아무렴 그것이 허무한 일인 줄 알면서도 넘어다보게 된다. 아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미래를 넘어보는 것은 그리 허무한 일이 아닐 것이란 생각도 든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고 나는 또 다시 1년을 살아갈 것이다. 그 1년 동안 무엇을 하며 살아갈지는 내 상상력에 뿌리를 내린 꿈의 나무만이 알겠지. 오늘 아주 작고 어린 묘목을 사와야 겠다.
우리집엔 객식구가 6명 있다. 작은 송사리 다섯 마리와 정확한 이름은 알지 못하지만 송사리보다 더 크고 성격도 거친 물고기 한 마리.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었던 어느 날, 그것들은 엄마의 손에 이끌려 혹은 인연에 이끌려 혹은 갈 곳이 없어 얼떨결에 우리집으로 떠밀려 왔기에 나는 그들을 객식구라 부른다. 작고 투명한 원통의 플라스틱 안에 담겨져 물 비린내를 풍기고 있었던 그 아이들은 이내 내 안의 연민을 불러 일으켰고 나는 그것들을 책임지겠노라 크게 선언했었다. 한 마디로 연약한 객식구들의 엄마가 되기로 한 것이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들 중 어느 주인공이 여자를 사랑하는 방식이 그러했듯, 나 또한 그것들을 연민으로 아끼고 사랑하고 싶었다. 손 끝에서 전해지던 그들의 아픔은 내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그것들을 사랑하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감에서 시작되었었다. 그렇게 나는 처음에는 어항에 코를 대기에도 아찔했던 물 비린내에 점점 적응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봄에는 알을 잔뜩 품고서 어항을 돌아다니는 그들을 보고선 뿌듯함을 가지기도 했다. (여의치 않았던 상황에 결국 아기 물고기는 보지 못했지만) 어쩌다보니 객식구가 식구가 되었고 물 비린내를 맡으며 그것들이 물 속을 자유로이 노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멍하게 넋을 놓고서, 마음의 짐들을 놓고서 그것들이 헤엄치는 모습만 봐도 가슴이 절로 시원해진다. 오늘은 오랜만에 물을 갈아주었더니 저들도 기분이 좋은지 힘차게 물을 박차고 다닌다. 식구라니. 식구. 무언가와 함께 산다는 것에, 그리고 누군가가 내 마음 속에 자리를 잡는다는 것에 귀찮음을 느꼈던 나에게(비록 여전히 귀찮음을 느끼지만) 식구라는 단어는 생소하지만 봄의 새순이 돋아나는 느낌에 마음이 온화해진다. 내 마음 속의 식구라니.
무얼하며 살아가나 고민이 든다. 하고 싶은 것들은 많지만 그것들이 과연 돈벌이가 될 수 있을까. 돈을 버는 것은 일을 선택하는 것에 있어서 언제나 차후의 문제이지만 가끔 걱정은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를 놓칠 줄도 알아야함을 나는 아직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익히 들어왔지만 막상 내 앞의, 내 선택이 되었을 때 나는 참 많이 아쉬워하고 또 기뻐할 것 같다. 시간을 조금 앞으로 걸어가는 방법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 것 같다.
2011년 7월 20일 수요일
오랜만 블로그
벌써 여름이 찾아왔다. 부산의 여름은 무더위와 습기의 습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음.. 요즘 나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곤 진부한 일상들 뿐이다. 일상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 활달한 일상도 아닌지라 가끔 지레 힘이 빠진다. 마음에 숨어 있는 에너지 보충제를 먹으며 근근히 버티고 있다. 어제 오랜만에 학교에 가서 복수 전공 신청을 하고 왔다. 영문학과 국문학의 조화라니. 결국 난 문학으로 대학 생활을 끝을 볼 것 같다. 아무렴. 지긋하게 책 읽는 연습을 하고 있다. 덕분에 거의 한달여 가까이 흐른 방학동안 벌써 몇 권의 책을 읽었다.
그러나 요즘은 마음이 조금씩 불안해져 오고 있다. 학교를 띄엄 띄엄 다니는 탓에 나는 아직 3학년이지만, 이제 졸업반이 된 친구들의 취업소식과 진로에 대한 소식들이 종종 들려온다. 그들을 보니 내 안에 뭔가 대단한 것이 완성되어 있어야 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한다. 왜 더 열심히 살지 못했을까 후회가 되기도 하고. 하지만 후회는 과거의 일일 뿐, 앞을 걸어가기 위해선 현재만 봐야한다는 일념하에 흔들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불안이 쉽게 걷히진 않는다.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한 것 같다. 가장 불안할 때, 안개가 가장 깊숙이 나를 침투했을 때,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모호한 상태가 되었을 때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이 나올 수도 있다 하였던 교수님의 말씀을 믿어야지.
오늘 하루도 힘!
음.. 요즘 나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곤 진부한 일상들 뿐이다. 일상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 활달한 일상도 아닌지라 가끔 지레 힘이 빠진다. 마음에 숨어 있는 에너지 보충제를 먹으며 근근히 버티고 있다. 어제 오랜만에 학교에 가서 복수 전공 신청을 하고 왔다. 영문학과 국문학의 조화라니. 결국 난 문학으로 대학 생활을 끝을 볼 것 같다. 아무렴. 지긋하게 책 읽는 연습을 하고 있다. 덕분에 거의 한달여 가까이 흐른 방학동안 벌써 몇 권의 책을 읽었다.
그러나 요즘은 마음이 조금씩 불안해져 오고 있다. 학교를 띄엄 띄엄 다니는 탓에 나는 아직 3학년이지만, 이제 졸업반이 된 친구들의 취업소식과 진로에 대한 소식들이 종종 들려온다. 그들을 보니 내 안에 뭔가 대단한 것이 완성되어 있어야 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한다. 왜 더 열심히 살지 못했을까 후회가 되기도 하고. 하지만 후회는 과거의 일일 뿐, 앞을 걸어가기 위해선 현재만 봐야한다는 일념하에 흔들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불안이 쉽게 걷히진 않는다.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한 것 같다. 가장 불안할 때, 안개가 가장 깊숙이 나를 침투했을 때,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모호한 상태가 되었을 때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이 나올 수도 있다 하였던 교수님의 말씀을 믿어야지.
오늘 하루도 힘!
2011년 4월 15일 금요일
2011년 4월 12일 화요일
아.. 지겹고 힘들었던 이번 학기 중간고사가 거의 끝나간다. 이제 시험 두개만 남았는데, 하나는 이번주 목요일이고 하나는 4월 말에 있으니.. 마음이 무척 편하다. 시험 끝나면 하려고 적어둔 목록이 되게 길었었는데 막상 시험 끝나니 시큰둥해진다. 그래도! 하나씩 잘 해내야지. 그냥 저냥 시간만 보내기엔 너무 아까우니까. 5월에 학교 축제 있는 기간동안 짧게 여행이나 다녀오고 싶은데 마뜩히 가고 싶은 곳이 없다. 제주도 올레길도 걷고 한라산도 올라볼까 싶기도 하고, 동남아 여행을 가고 싶기도 한데 혼자가는 거라 조금 두렵기도 하다. 인도도 가고 싶고 말레이시아도 가고 싶고 마닐라도 가고 싶고 (마닐라는 이름이 참 예쁘다. 마카오도.) 상하이도 가고 싶은데.. 목요일에 서점가서 여행책자들 좀 훑어봐야겠다. 아.. 새롭다! 뭐든 시작해야지
2011년 4월 5일 화요일
어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의식이 강하거나, 강해지고 싶은 사람인 것 같다는. 내 선에서는 그 말이 긍정적인데 타인들이 그런 나를 봤을 때는 과하게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 시험 기간이 다시 다가왔다. 도서관에 가기 전에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오랜만에 나의 흔적을. 부산국제연극제 표를 예매했다. 처음이다. 연극제는. 얼른 5월이 왔으면 좋겠다. 봄인데도 불구하고 차가운 칼바람때문에 일전에 마련해두었던 봄 자켓도 아직 못 입고 있다. 포장도 벗지 못한 상태로 옷거리에 덩그러니 걸려있는 그 옷을 볼 때마다 내 마음이 다 아프다 흑흑. 그런 의미로 얼른 5월이 와야한다!! 이번 학기에는 꽤나 엄살이 많아졌다. 저번 학기보다 어려운 것도 없는데 혼자 힘들다, 힘들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쉬어야지, 요러면서 자꾸 설렁 설렁 넘어가려고 한다. 그러면 안되는데. 이번 학기에는 해야할 것들이 많다. 차곡 차곡 해야지. 힘내자규- (망할 블로그. 엔터키가 안먹힌네.. 요즘 지메일이고 블로그고 왜 이렇게 말을 안들어!! 지메일은 사용하다가 불쑥 불쑥 인터넷창 사라지는게 부지기수ㅠ 그래도 내가 참는다 흑흑)
2011년 3월 27일 일요일
2011년 3월 22일 화요일
그대 내부를 보라. 자신을 알고, 자신에게 몰두하라. 다른 곳에서 소비하는 그대의 정신과 의지를 자신에게 되돌려라. 그대는 자신을 흘려 보내고 흩어 보낸다. 그대를 집중시키고 자신에게서 버티어라. 사람들은 그대를 배반하고, 그대를 낭비하며, 그대를 그대로부터 훔쳐간다. 그대는 모르는가. 만물이 자신의 눈을 내면에 집중시켜 자신을 바라보기 위하여 그들의 눈을 그 자체의 관찰을 향해 열고 있음을. 그대에게는 안팎이 언제나 비어 있다. 그러나 비어 있는 공간이 좁으면 그만큼 비어 있음도 적다. 신은 말한다. '인간이여, 너를 제외한 모든 것은 먼저 자신을 연구한다. 그리고 자신의 필요에 따라 자신의 일과 욕망에 한계를 정한다. 그대는 우주를 포섭하고 있으나, 그대만큼 공허하고 빈곤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p.77 몽테뉴의 숲에서 거닐다
몽테뉴가 추구하는 고독의 내면은 니체의 고독과 아주 닮아 있다. 아마도 그건 니체가 몽테뉴를 스승으로 존경했던 이유이자 사실 그 자체를 보여주는게 아닐까. '달아나라, 달아나라, 너의 숲으로' 우리들이 고독이라는 처절한 감정과 같은 마음 속의 숲으로 달아나는 일이 힘든 까닭을 니체는 이렇게 설명하였었다. '너'라는 말은 '나'라는 말보다 훨씬 오래 되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나'라는 존재에서보다 '너'라는 존재에게 달려가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귀착하는 것을 편안하게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대해 각기 다른 입장을 보일 수도 있으나 적어도 나에게는 유효하다. 언젠가 나는 나의 존재를 찾기 위해 타인에게 나 자신을 구걸했던 적이 있었다. 그 때의 감정이 아닌 이렇게 글로 적으니 비참하게 느껴지는 기분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 때의 나에게 그것은 비참함이 아닌 절박함이었다. 더 자세히 이야기 하자면 타인에게서 나의 존재를 찾는 상황 자체에 대한 절박함보다는 상대에게 아무리 매달려 보아도 나의 존재를 찾을 수 없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섞인 절박함이었다. 아마도 연민이 필요했던 시점이었던 것 같다. 또한 혼자의 시간에 대한 겸허함이 필요한 시간이기도 했다. 지금, 내가 감히 그 시간들을 잘 지나왔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는 나를 직시하고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가끔 그 침묵이 진짜의 침묵으로 변질되는 것을 분간하지 못해 답답한 적도 여러번이지만..) 나에게 또 다른 침묵을 선사해 주었던 그의 말과 행동처럼 나 또한 번잡한 도시의 시끄러운 거리에서 달아나 겸허하고도 고요한 숲 속의 나무 아래에서 침묵을 사랑하겠노라고 다짐하고 있다.
-p.77 몽테뉴의 숲에서 거닐다
몽테뉴가 추구하는 고독의 내면은 니체의 고독과 아주 닮아 있다. 아마도 그건 니체가 몽테뉴를 스승으로 존경했던 이유이자 사실 그 자체를 보여주는게 아닐까. '달아나라, 달아나라, 너의 숲으로' 우리들이 고독이라는 처절한 감정과 같은 마음 속의 숲으로 달아나는 일이 힘든 까닭을 니체는 이렇게 설명하였었다. '너'라는 말은 '나'라는 말보다 훨씬 오래 되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나'라는 존재에서보다 '너'라는 존재에게 달려가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귀착하는 것을 편안하게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대해 각기 다른 입장을 보일 수도 있으나 적어도 나에게는 유효하다. 언젠가 나는 나의 존재를 찾기 위해 타인에게 나 자신을 구걸했던 적이 있었다. 그 때의 감정이 아닌 이렇게 글로 적으니 비참하게 느껴지는 기분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 때의 나에게 그것은 비참함이 아닌 절박함이었다. 더 자세히 이야기 하자면 타인에게서 나의 존재를 찾는 상황 자체에 대한 절박함보다는 상대에게 아무리 매달려 보아도 나의 존재를 찾을 수 없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섞인 절박함이었다. 아마도 연민이 필요했던 시점이었던 것 같다. 또한 혼자의 시간에 대한 겸허함이 필요한 시간이기도 했다. 지금, 내가 감히 그 시간들을 잘 지나왔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는 나를 직시하고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가끔 그 침묵이 진짜의 침묵으로 변질되는 것을 분간하지 못해 답답한 적도 여러번이지만..) 나에게 또 다른 침묵을 선사해 주었던 그의 말과 행동처럼 나 또한 번잡한 도시의 시끄러운 거리에서 달아나 겸허하고도 고요한 숲 속의 나무 아래에서 침묵을 사랑하겠노라고 다짐하고 있다.
2011년 3월 7일 월요일
오랜만에 정상적인 하루로 돌아왔다. 저번주는 일주일 내도록 밥만 먹고서 일만 했으며, 학교 가는 날에는 정신 없이 갔다 교수님 얼굴만 확인하고서 정신 없이 집으로 와, 다시 일만 했었다.
1.
우리 학과는 특성상 전과생과 타과생들이 조금 많은 편이다. 그리고 기본 정원도 많은 편. 덕분에 누가 전과생인지, 누가 타과생인지 얼굴로는 분간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처음 전과를 했을 때 좋은 점들이 많았었는데, 오늘 처음으로 그런 우리 과의 특색 아닌 특색에 실망을 느꼈었다. 모두가 친하게 지내지만 어쩐지 조금씩은 동 떨어져 있는 분위기다. 같은 수업을 들으며 조금씩 가까워진 사람들과 인사도 하고 친밀하게 대화도 하지만, 서로에게 아주 다가가지 않으려는 선이 분명하게 존재한다. 물론 나 또한 홀로 캠퍼스를 거닐며 내 일정대로 움직이는 걸 더 선호하지만, 막상 타인이 나에게 행하는 철저한 선 긋기를 느끼고 나니 기분이 이상하게 묘해진다. 나도 그렇게 그들을 대해왔기에 그들이 나에게 그런 반응을 보여도 아무렇지 않을거라 생각했던 나의 판단은 무척이지 어리석었음을 적나라하게 말한다.
마음이 외면당한 기분이다. 같이 마주 보고 있으면서도 등을 돌리고 있는 상대에겐 어떤 말을 건네야할까.
2.
생각보다 24시간은 그리 길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고 1분이 그리 짧은 것도 아니다. 시간은 정말 이상하다.
생각이 줄어버린 건지, 아님 무의식적적으로 글을 쓰는 시간을 아깝다고 여겨왔던 건지, 요즘은 글 쓰는 일이 줄어버렸다. 문득, 학교에서 들었던 생각. 그래서 오늘은 어떤 말이든, 어떤 일상이든 글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3.
요즘, 해야할 일들이 생겨서 그런지 하루가 절로 짧아졌다. 정확한 목표와 계획을 세우고자 어제는 계획표와 목표계획서도 작성하였다. 정말로 올해는 흐트러짐 없는 한 해를 보내야지. 하고 싶은 것들은 무조건 다 하는 한 해를 보내야지. 언제나 우리들의 삶에서 후회를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되도록이면 후회를 줄이도록 노력해야지. 가장 나 다운 사람이 되어 살아가야지.
4.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다가 '언제나 혼자 영화를 보고 혼자 그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건 종종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라는 단 한 줄을 보자마자 나는 제목도 보지 않고서 그 책을 빌려왔다. 강의실에 도착해서 보니 그건 정성일 영화 감독 겸 영화 평론가님의 책이었고 영광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첫 영화인 카페 느와르에 심심치 않게 등장했었던, 파란 하늘의 붉은 풍선은 나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무척이나.
5.
깊게 파고드는 근성을 길러야겠다.
1.
우리 학과는 특성상 전과생과 타과생들이 조금 많은 편이다. 그리고 기본 정원도 많은 편. 덕분에 누가 전과생인지, 누가 타과생인지 얼굴로는 분간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처음 전과를 했을 때 좋은 점들이 많았었는데, 오늘 처음으로 그런 우리 과의 특색 아닌 특색에 실망을 느꼈었다. 모두가 친하게 지내지만 어쩐지 조금씩은 동 떨어져 있는 분위기다. 같은 수업을 들으며 조금씩 가까워진 사람들과 인사도 하고 친밀하게 대화도 하지만, 서로에게 아주 다가가지 않으려는 선이 분명하게 존재한다. 물론 나 또한 홀로 캠퍼스를 거닐며 내 일정대로 움직이는 걸 더 선호하지만, 막상 타인이 나에게 행하는 철저한 선 긋기를 느끼고 나니 기분이 이상하게 묘해진다. 나도 그렇게 그들을 대해왔기에 그들이 나에게 그런 반응을 보여도 아무렇지 않을거라 생각했던 나의 판단은 무척이지 어리석었음을 적나라하게 말한다.
마음이 외면당한 기분이다. 같이 마주 보고 있으면서도 등을 돌리고 있는 상대에겐 어떤 말을 건네야할까.
2.
생각보다 24시간은 그리 길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고 1분이 그리 짧은 것도 아니다. 시간은 정말 이상하다.
생각이 줄어버린 건지, 아님 무의식적적으로 글을 쓰는 시간을 아깝다고 여겨왔던 건지, 요즘은 글 쓰는 일이 줄어버렸다. 문득, 학교에서 들었던 생각. 그래서 오늘은 어떤 말이든, 어떤 일상이든 글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3.
요즘, 해야할 일들이 생겨서 그런지 하루가 절로 짧아졌다. 정확한 목표와 계획을 세우고자 어제는 계획표와 목표계획서도 작성하였다. 정말로 올해는 흐트러짐 없는 한 해를 보내야지. 하고 싶은 것들은 무조건 다 하는 한 해를 보내야지. 언제나 우리들의 삶에서 후회를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되도록이면 후회를 줄이도록 노력해야지. 가장 나 다운 사람이 되어 살아가야지.
4.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다가 '언제나 혼자 영화를 보고 혼자 그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건 종종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라는 단 한 줄을 보자마자 나는 제목도 보지 않고서 그 책을 빌려왔다. 강의실에 도착해서 보니 그건 정성일 영화 감독 겸 영화 평론가님의 책이었고 영광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첫 영화인 카페 느와르에 심심치 않게 등장했었던, 파란 하늘의 붉은 풍선은 나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무척이나.
5.
깊게 파고드는 근성을 길러야겠다.
2011년 3월 6일 일요일
경쟁에 대한 의미를 재고해본다면 경기장은 더욱 넓어질 것이다.
'나는 가수다'라는 TV 프로그램이 오늘 처음 방영되었다. 우리나라의 자타공인 최고의 가수 7명이 나와 노래로써 최후의 일인자를 가리는, 일종의 서바이벌 형식의 프로그램이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오래 전부터 (나의 기억에는 박진영이 자신의 제자를 찾기 위한 공개 오디션이 첫 서바이벌 프로그램이었다) 서바이벌 프로그램들이 있었지만, 근래에 새로운 형식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포맷이 외국에서 수입되어 국내에서도 큰 유행을 하였었다. 가장 흥한 예로는 수퍼스타 K인데, 이는 벌써 시즌 3까지 준비하고 있을 정도이다. 예전보다 더욱 과감하고 솔직하고 냉철해졌으며 기승전결의 단계 중에서도 '전'의 단계 분위기를 상승시킴으로써 많은 인기를 모으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은 아마추어들이 아닌 내로라 하는 프로 가수들이 그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7명의 무대는 하나같이 말을 잃게 할 정도로 감동적이었으며 압도적이었다. 누가 누구보다 더 잘한다, 라는 단편적인 말로 누군가를 무대에서 떨어뜨릴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무대였었다. 하지만 그런 우열을 가리기 곤란한 상황에서도 이 프로그램의 취지가 '경쟁' 이기 때문에 1등과 7등은 나누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점수를 매긴 평가단은 나이와 성별이 다양한 일반인들이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대중의 마음을 가장 잘 휘어잡는, 흔드는 사람이 승자가 된다는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그들에게 등수를 부여하는 것은 아주 단편적인 판단이면서도, 시대의 풍조를 과하게 따라가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였다. 최고의 가수들의 서바이벌이기에 일반 서바이벌 프로와는 달리 시청자들이 얻을 수 있는 것들이 풍부해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라는 명칭을
'나는 가수다'라는 TV 프로그램이 오늘 처음 방영되었다. 우리나라의 자타공인 최고의 가수 7명이 나와 노래로써 최후의 일인자를 가리는, 일종의 서바이벌 형식의 프로그램이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오래 전부터 (나의 기억에는 박진영이 자신의 제자를 찾기 위한 공개 오디션이 첫 서바이벌 프로그램이었다) 서바이벌 프로그램들이 있었지만, 근래에 새로운 형식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포맷이 외국에서 수입되어 국내에서도 큰 유행을 하였었다. 가장 흥한 예로는 수퍼스타 K인데, 이는 벌써 시즌 3까지 준비하고 있을 정도이다. 예전보다 더욱 과감하고 솔직하고 냉철해졌으며 기승전결의 단계 중에서도 '전'의 단계 분위기를 상승시킴으로써 많은 인기를 모으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은 아마추어들이 아닌 내로라 하는 프로 가수들이 그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7명의 무대는 하나같이 말을 잃게 할 정도로 감동적이었으며 압도적이었다. 누가 누구보다 더 잘한다, 라는 단편적인 말로 누군가를 무대에서 떨어뜨릴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무대였었다. 하지만 그런 우열을 가리기 곤란한 상황에서도 이 프로그램의 취지가 '경쟁' 이기 때문에 1등과 7등은 나누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점수를 매긴 평가단은 나이와 성별이 다양한 일반인들이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대중의 마음을 가장 잘 휘어잡는, 흔드는 사람이 승자가 된다는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그들에게 등수를 부여하는 것은 아주 단편적인 판단이면서도, 시대의 풍조를 과하게 따라가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였다. 최고의 가수들의 서바이벌이기에 일반 서바이벌 프로와는 달리 시청자들이 얻을 수 있는 것들이 풍부해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라는 명칭을
2011년 3월 2일 수요일
1.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서, 심지어 한 입 가득 깨물어 행복하게 먹어놓고는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지는 순간이 있다. 변덕스러운 입맛이라기보다는 심리적인 변화의 요인일 가능성이 무척이나 큰데, 지금이 딱 그러하다. 친구가 작업하고 있던 파일들이 모조리 날아가버려서 더 이상의 복구가 불가능하다는 소식, 스트레스 가득한 친구의 목소리를 듣고 나니 입맛이 뚝 떨어져 버렸다. 그것만이면 다행이지, 닫아 놓은 방문 사이로 들리는 엄마의 통화 목소리도 심상치가 않아, 괜히 더 울쩍해진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 기분. 검은 스트레스의 그림자가 다가오기 일보 직전의 컴컴한 새벽에 나가 떨어진 기분이다. 허허.
2.
위로의 음악이 필요하다. 예전에는 검색해보고 찾아 들었지만 요즘은 아무 블로그나 들어가서 흘러나오는 (블로그 주인이 심사 숙고하여 골랐거나, 주인장의 기분에 적절한) 배경음악을 그저 듣고 있다. 생각보다 좋은 음악들을(귓 가에서 증발해버린다는 표현이 아주 적절한, 우연스러운 음악들) 자주 만나게 되는 것 같다.
3.
오늘 첫 수업이었던, 영문학 시간에 문득 느낀 건데.. 나는,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시 되묻거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상대방의 표정과 몸짓에서 쾌락을 느끼는 것 같다. 형편 없는 나의 언변을 차치하고서, 나와 상대방이 마주 앉아 교감을 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해할 수 없는 어수선한 공기가 우리의 관계를 꽉 메울때, 그 때의 그 공기가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서, 심지어 한 입 가득 깨물어 행복하게 먹어놓고는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지는 순간이 있다. 변덕스러운 입맛이라기보다는 심리적인 변화의 요인일 가능성이 무척이나 큰데, 지금이 딱 그러하다. 친구가 작업하고 있던 파일들이 모조리 날아가버려서 더 이상의 복구가 불가능하다는 소식, 스트레스 가득한 친구의 목소리를 듣고 나니 입맛이 뚝 떨어져 버렸다. 그것만이면 다행이지, 닫아 놓은 방문 사이로 들리는 엄마의 통화 목소리도 심상치가 않아, 괜히 더 울쩍해진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 기분. 검은 스트레스의 그림자가 다가오기 일보 직전의 컴컴한 새벽에 나가 떨어진 기분이다. 허허.
2.
위로의 음악이 필요하다. 예전에는 검색해보고 찾아 들었지만 요즘은 아무 블로그나 들어가서 흘러나오는 (블로그 주인이 심사 숙고하여 골랐거나, 주인장의 기분에 적절한) 배경음악을 그저 듣고 있다. 생각보다 좋은 음악들을(귓 가에서 증발해버린다는 표현이 아주 적절한, 우연스러운 음악들) 자주 만나게 되는 것 같다.
3.
오늘 첫 수업이었던, 영문학 시간에 문득 느낀 건데.. 나는,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시 되묻거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상대방의 표정과 몸짓에서 쾌락을 느끼는 것 같다. 형편 없는 나의 언변을 차치하고서, 나와 상대방이 마주 앉아 교감을 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해할 수 없는 어수선한 공기가 우리의 관계를 꽉 메울때, 그 때의 그 공기가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번역 작업을 하고 있다. 원래는 친구가 받은 일이었는데 방대한 분량에 힘이 들었는지 내 몫을 조금 나눠주었다. 모든 일이 다 그렇듯, 처음에는 새롭고 신기하고 신선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흥미와 열기가 사라져 버리고 나면 설레던 경험은 짐이 되어버린다. 이 일 역시. 어제는 어제라서 조금 쉴 수 있었지만, 시간이 deadline인 수요일 아침으로 가까워져 갈수록 초조함이 더해만 간다. 심지어 한편으론 멍해지기까지 한다. 정신줄 놓으면 안되는데..
무튼 틀린 해석이 있을까 걱정이다. 시간이 너무 촉박했던지라 모호하게 남겨 둔 표현들이 꽤 되는데 자꾸 마음에 걸린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런 표현들에 대한 고민을 할 겨를도 없이 내용 수정하기에만 올인해야 한다. 오로지 수정만 한다 하더라도 시간이 부족할 것 같다. ㅠㅠㅠ
남은 시간을 잘 활용해야겠다.
그나저나 내일 개강인데 오전에는 수업에 없다는 사실이, 참 다행이다.
얼른 다 하고서 자야지.
무튼 틀린 해석이 있을까 걱정이다. 시간이 너무 촉박했던지라 모호하게 남겨 둔 표현들이 꽤 되는데 자꾸 마음에 걸린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런 표현들에 대한 고민을 할 겨를도 없이 내용 수정하기에만 올인해야 한다. 오로지 수정만 한다 하더라도 시간이 부족할 것 같다. ㅠㅠㅠ
남은 시간을 잘 활용해야겠다.
그나저나 내일 개강인데 오전에는 수업에 없다는 사실이, 참 다행이다.
얼른 다 하고서 자야지.
2011년 2월 28일 월요일
블랙 스완을 보고 왔다. 거두절미하고 이 영화 너무 재밌다. 너무 재미있어서 러닝 100분이라는 긴 시간이 한 순간의 연기처럼 사라진 기분이다. 시간을 잡아먹도록 흥미진진한 영화 너무 오랜만인거 같다. (요즘 본 영화들 대부분이 재미는 있었지만 시간을 장악할 정도로 흥미진진하진 않았었다)
한 사람의 몸 속에서 벌어지는 the white 와 the black 의 대결구도. 일반적으로 우리들의 입을 통해 오르락 내리락 하는 선과 악의 이분법에서 벗어났다는 점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옳다, 그르다 라고 판단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해지는 그녀의 무대 위, 그녀만의 꿈과 고통. 꿈과 고통을 넘나들며 고통에 젖어 있는 자신을 보며 흘렸던 눈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간절했던, 황홀한 관객들의 박수 갈채 앞에서 그제서야 그녀는 자신의 무대에 만족해한다.
한 사람의 몸 속에서 벌어지는 the white 와 the black 의 대결구도. 일반적으로 우리들의 입을 통해 오르락 내리락 하는 선과 악의 이분법에서 벗어났다는 점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옳다, 그르다 라고 판단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해지는 그녀의 무대 위, 그녀만의 꿈과 고통. 꿈과 고통을 넘나들며 고통에 젖어 있는 자신을 보며 흘렸던 눈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간절했던, 황홀한 관객들의 박수 갈채 앞에서 그제서야 그녀는 자신의 무대에 만족해한다.
2011년 2월 20일 일요일
블로그의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다. 이 블로그만 들어오면 잘나가던 인터넷도 먹통이 되는지라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었지만 썩 나쁘진 않은 것 같다. 그저께는 친구의 졸업식, 어제는 두번째 텝스시험, 오늘은 내일 놀러갈 것들을 정리하고 준비한다고 정신이 조금 없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스키장에 놀러가는데 어떤 재미난 일들이 일어날지 설레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걱정도 된다. 다치지 말고 돌아와야 할텐데.
디지털카메라를 새로 샀다. 몇 년을, 몇 달을 벼루고 벼뤄서 결국 하나 사버렸다. 엄마의 힘을 조금 빌렸지만 나의 소유라고 명명해놓고서 기계를 산 것은 전자사전 이후로 처음인거 같다. (핸드폰도 있지만 핸드폰은 소유라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기에 너무 소소한 필수품이 되어버린듯..) 필름 카메라만 전문으로 사용하기에 나의 능력이 아직 벅차다는 생각이 들어 마련한 것인 만큼 많이 찍고 열심히 공부해야겠다.
요즘 질투가 꽤 많아졌다. 마음의 거울에 비친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나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타인들을 바라본다. 타인들의 멋지고 예쁘고 아름다운 모습들에 비해 나는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수정이 필요하거나 부족한 부분들을 지긋이 들여다보면 화가 나기도 하고 샘이 나기도 한다. 하지만 꽤나 좋은 질투라고 생각한다.
한 때는 일상의 속속들이 사건들을 기록해야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어쩐일인지 특별한 사건이 나를 가로질러가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왜일까. 그래서 블로그의 글도 뜸했던 건가. 글로 담아낼 수 없는 수만가지의 생각들과 감정들과 사건들을 글로써 나열하는 것에 대한 새로운 권태가 생긴 것 같다.
새로워지고 싶다.
디지털카메라를 새로 샀다. 몇 년을, 몇 달을 벼루고 벼뤄서 결국 하나 사버렸다. 엄마의 힘을 조금 빌렸지만 나의 소유라고 명명해놓고서 기계를 산 것은 전자사전 이후로 처음인거 같다. (핸드폰도 있지만 핸드폰은 소유라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기에 너무 소소한 필수품이 되어버린듯..) 필름 카메라만 전문으로 사용하기에 나의 능력이 아직 벅차다는 생각이 들어 마련한 것인 만큼 많이 찍고 열심히 공부해야겠다.
요즘 질투가 꽤 많아졌다. 마음의 거울에 비친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나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타인들을 바라본다. 타인들의 멋지고 예쁘고 아름다운 모습들에 비해 나는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수정이 필요하거나 부족한 부분들을 지긋이 들여다보면 화가 나기도 하고 샘이 나기도 한다. 하지만 꽤나 좋은 질투라고 생각한다.
한 때는 일상의 속속들이 사건들을 기록해야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어쩐일인지 특별한 사건이 나를 가로질러가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왜일까. 그래서 블로그의 글도 뜸했던 건가. 글로 담아낼 수 없는 수만가지의 생각들과 감정들과 사건들을 글로써 나열하는 것에 대한 새로운 권태가 생긴 것 같다.
새로워지고 싶다.
2011년 2월 11일 금요일
남는 밥 좀 주오.
노동법률과 규제가 있지만 그것들이 소용 없어 지는 곳이 바로 영화판이라 하셨다. 작가 뿐만 아니라 스탭들에게도 영화를 찍는 시간은 가혹하다. 스탭 막내의 임금은 50여만원 정도, 24시간 풀 가동되는 노동에 비해 턱 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그것도 운이 좋은 경우다. 받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니까. 요즘 워낙 영화판에 돈이 메마르다보니 만드는 사람도, 찍는 사람도, 쓰는 사람도 힘이 빠지긴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 바닥에서도 남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을 만큼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 부익부 빈익빈, 자본의 탐욕, 불합리한 합리화는 고결한 예술 앞에서도 죽는 법이 없으니까. 영화를 수단으로 많은 돈을 벌고자 했던 자들은 온갖 핑계거리로 없는 돈마저 쓸어가고, 그 때문에 어제 밥을 굶었던 누군가는 내일마저도 굶게 된다.
누군가는 최고은 작가의 죽음을 직업적 희생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자신이 선택한 삶인데 나보고 어쩌라고, 원래 배고픈 직업인 줄 알고 선택한거 아니야?, 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니까 상관 없어.
인간 사회에서는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와 대우가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사회에 그런 고귀한 것들이 존재하고 있는가? 언젠가 추적 60분의 삼성 반도체 노동자들의 암투병에 관한 실정을 본 적이 있다. 삼성은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인 기업이고 현대는 자본주의 사회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 투자로 큰 이윤을 남기는 것은 회사를 유지하기 위한 타당한 목적의 근거가 된다. 일단, 우선의 이익창출을 위해 공장을 돌린다. 설사 공정 과정에서 공장 노동자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물질이 검출되어도 상관없다. 돌리고 본다. 공장이 멈추는 것은 곧 자신들의 성장과 시장의 멈춤과 같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하여 돌린다. 3교대, 6~8시간을 훌쩍 넘긴 노동시간에도 아랑곳 않고서 돌린다. 자신들은 그들에게 연장 근무의 월급을 주기 때문에 당연한 행위라 생각한다. 건강검진 결과에 납중독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장 설비를 재정비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꽃다운 나이에 암으로 죽은 노동자들의 죽음 앞에서도 사람의 죽음보다는 회사로 날아 올 치명타를 두려워한다. (자신들의 행실이 그릇된다는 사실은 아는 모양)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아무리 기계가 공장을 장악했다 할지라도 아직까지는 사람 없이 모든 생산이 완벽하게 이루어 지지 못한다. 공장은 사람을 위한 물건을 만들어내기 위해 땀과 노동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노동자들)의 공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곳에 진정한 사람의 가치와 의미가 존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아마도 삼성이 노동자들에게 최소한의 인간적인 도리만이라도 해줬다면 이런 방송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노동자들이 원하는 것은 위로금을 가장한 억만금의 입막음용 돈이 아닌 인간적인 최소한의 대우였다. 아무리 고용주와 고용된 자의 관계가 돈으로 빚어진다 할지라도, 그 속에 최소한의 인간적 대우만 있었더라도 이 사건은 지금과 달리 다소 누그러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인간이 사는 사회에서 인간 타령을 하는 것이 조금은 한심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날이 가면 갈수록 인간의 존재와 가치는 몰락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시기 인간을 운운하는 것은 신파적인 것이 아닌 필연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꼭대기 층에 편하게 앉아 돈만 만지는 사람들조차도 돈 속에 잠식되어 자신이 사람인지 돈인지, 자신이 정녕 무엇인지 잊고 살아가는 것 같다.
최고은작가의 가난했던 죽음과 삼성 반도체 노동자들의 죽음은 결코 숭고하지 못하다. 그들의 죽음은 퇴폐되어가고 있는 현실의 아픈 증상이며 미래에 일어날 소리 없는 분란의 조짐이다. 사회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보고 있는 나의 시선이 나 자신조차도 편치 않다. 하지만 이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거나, 그들의 죽음이 그들의 개인적인 삶이나 운명이기에 당연하다 여기거나, 늘상 일어나고 있는 직업적 현상의 한 부분이라 생각하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아마도 이런 시각들은 후에 지금 내가 느끼는 부정한 사회의 모습보다 더 비참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여기서 얼마나 더 더럽혀져야 양반다리로 꼭대기에 앉아 내려다보기에만 익숙한 자들이 자신의 돈방석을 위해 압사되었던 인간적 고통들을 알 수 있을까. 모든 사람들이 다 죽고서 돈 더미에 묻힌채 자신 혼자 남았을 때, 그제서야 최소한의 인간적 의미를 배려하지 못한 자신을 후회하려나.
우리는 우리가 인간임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한다.
노동법률과 규제가 있지만 그것들이 소용 없어 지는 곳이 바로 영화판이라 하셨다. 작가 뿐만 아니라 스탭들에게도 영화를 찍는 시간은 가혹하다. 스탭 막내의 임금은 50여만원 정도, 24시간 풀 가동되는 노동에 비해 턱 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그것도 운이 좋은 경우다. 받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니까. 요즘 워낙 영화판에 돈이 메마르다보니 만드는 사람도, 찍는 사람도, 쓰는 사람도 힘이 빠지긴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 바닥에서도 남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을 만큼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 부익부 빈익빈, 자본의 탐욕, 불합리한 합리화는 고결한 예술 앞에서도 죽는 법이 없으니까. 영화를 수단으로 많은 돈을 벌고자 했던 자들은 온갖 핑계거리로 없는 돈마저 쓸어가고, 그 때문에 어제 밥을 굶었던 누군가는 내일마저도 굶게 된다.
누군가는 최고은 작가의 죽음을 직업적 희생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자신이 선택한 삶인데 나보고 어쩌라고, 원래 배고픈 직업인 줄 알고 선택한거 아니야?, 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니까 상관 없어.
인간 사회에서는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와 대우가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사회에 그런 고귀한 것들이 존재하고 있는가? 언젠가 추적 60분의 삼성 반도체 노동자들의 암투병에 관한 실정을 본 적이 있다. 삼성은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인 기업이고 현대는 자본주의 사회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 투자로 큰 이윤을 남기는 것은 회사를 유지하기 위한 타당한 목적의 근거가 된다. 일단, 우선의 이익창출을 위해 공장을 돌린다. 설사 공정 과정에서 공장 노동자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물질이 검출되어도 상관없다. 돌리고 본다. 공장이 멈추는 것은 곧 자신들의 성장과 시장의 멈춤과 같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하여 돌린다. 3교대, 6~8시간을 훌쩍 넘긴 노동시간에도 아랑곳 않고서 돌린다. 자신들은 그들에게 연장 근무의 월급을 주기 때문에 당연한 행위라 생각한다. 건강검진 결과에 납중독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장 설비를 재정비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꽃다운 나이에 암으로 죽은 노동자들의 죽음 앞에서도 사람의 죽음보다는 회사로 날아 올 치명타를 두려워한다. (자신들의 행실이 그릇된다는 사실은 아는 모양)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아무리 기계가 공장을 장악했다 할지라도 아직까지는 사람 없이 모든 생산이 완벽하게 이루어 지지 못한다. 공장은 사람을 위한 물건을 만들어내기 위해 땀과 노동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노동자들)의 공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곳에 진정한 사람의 가치와 의미가 존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아마도 삼성이 노동자들에게 최소한의 인간적인 도리만이라도 해줬다면 이런 방송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노동자들이 원하는 것은 위로금을 가장한 억만금의 입막음용 돈이 아닌 인간적인 최소한의 대우였다. 아무리 고용주와 고용된 자의 관계가 돈으로 빚어진다 할지라도, 그 속에 최소한의 인간적 대우만 있었더라도 이 사건은 지금과 달리 다소 누그러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인간이 사는 사회에서 인간 타령을 하는 것이 조금은 한심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날이 가면 갈수록 인간의 존재와 가치는 몰락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시기 인간을 운운하는 것은 신파적인 것이 아닌 필연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꼭대기 층에 편하게 앉아 돈만 만지는 사람들조차도 돈 속에 잠식되어 자신이 사람인지 돈인지, 자신이 정녕 무엇인지 잊고 살아가는 것 같다.
최고은작가의 가난했던 죽음과 삼성 반도체 노동자들의 죽음은 결코 숭고하지 못하다. 그들의 죽음은 퇴폐되어가고 있는 현실의 아픈 증상이며 미래에 일어날 소리 없는 분란의 조짐이다. 사회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보고 있는 나의 시선이 나 자신조차도 편치 않다. 하지만 이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거나, 그들의 죽음이 그들의 개인적인 삶이나 운명이기에 당연하다 여기거나, 늘상 일어나고 있는 직업적 현상의 한 부분이라 생각하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아마도 이런 시각들은 후에 지금 내가 느끼는 부정한 사회의 모습보다 더 비참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여기서 얼마나 더 더럽혀져야 양반다리로 꼭대기에 앉아 내려다보기에만 익숙한 자들이 자신의 돈방석을 위해 압사되었던 인간적 고통들을 알 수 있을까. 모든 사람들이 다 죽고서 돈 더미에 묻힌채 자신 혼자 남았을 때, 그제서야 최소한의 인간적 의미를 배려하지 못한 자신을 후회하려나.
우리는 우리가 인간임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한다.
2011년 2월 6일 일요일
생각해보니 스트레스가 마구 마구 쌓여있는 듯 하다. 눈이 자주 침침해진다. 읽다 지친 책들과 단 한글자도 끄적이지 못한 노트가 연민스럽게 흩어져 있다. 기분이 꽤나 울적하다.
새로운 2월.
희망
에 대한
새로운 노래를 읊조릴 시간
모든 것들이 잘 지나가기를
내가 그 모든 것들의 징검다리를 무사히 건너기를
앞만 보고 달려간다는 무서운 말은 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다시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데 많은 시간을 쏟고 싶지도 않다. 사실 그래서 어떻게 해야할지 아직 잘 모르겠다. 일단 걸어가긴 하는데 차마 발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풀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발걸음은 아직 굳게 얼어 있다. 얼음이 녹기 위해서는 따뜻한 온기가 필요하건만 그 온도를 도대체 어디서 찾아야 할지 잘 모르겠다. 한 마디로 현재 나는 일시 정지의 상태. 더욱 힘차게 자가 발전기를 돌려야 겠다.
동네에 새 볼링장이 생겼다. 어제 운동을 마치고 나오던 길에 친구의 연락을 받고서 가서 실컷 치다가 새벽 열두시가 넘긴 것을 확인하곤 헐래벌떡 집으로 뛰어왔었는데, 그 덕분에 온 몸이 찌뿌둥하다.
몇일 전에 동계 아시안 게임을 시청하다가 갑자기 울컥 했었다. 분명 우리나라 선수는 신나게 1등으로 달리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어이없게 기분이 울렁거렸다. 저 한 경기에 출전하기 위해서 선수들은 몇 년 씩을 자신을 혹사시키고, 한번의 성취감을 위해 숱한 슬럼프와 온 몸의 고통을 견뎌내는구나, 장담할 수 없는 승산을 위해 자신의 젊음을 바치고, 때로는 실패로 절망 속에 자신을 내던지는건가, 그 삶은 너무 무모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들이 뒤죽박죽 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나의 삶을 연민하고 있었다. 울컥, 울컥. 가혹하지만 멋진 그들의 젊음 앞에서 나의 젊음은 너무 보잘 것 없었고, 나의 몸뚱어리는 언제나 작디 작은 나의 골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두통이 넘실거렸다.
가치에 관한 혼란에 빠졌을 그 때, 누군가가 나에게 해줬던 조언을 잊지 못한다. 나는 그 말에 아직도 나를 의지하고 있으며 동정받기를 원하는 동시에 증오한다. 세상의 모든 것들에게는 가치가 있으며 의미있다는 그 말. 그건 일종의 물과도 같은 말이었다. 인간이 지구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당연하게 존재했었던 그것. 그 존재와 가치와 의미. 물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이면서도 가장 만연한 요소이다. 고로 그것은 굉장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면서, 없을 수도 있는 존재이다. 너무 당연하게 존재하니까. 나의 존재의 가치 또한 그것과 다름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단순히 '평범하다' 라는 개성의 만연화와는 다른, 가슴 속으로 형용할 수록 더욱 비참해지는 그런 것.
나는 그래서 더 많은 것을 갈구한다. 하지만 그것들이 전부 나의 손아귀로 들어오지 않는다는 절망스러운 사실을 알고 있다. 언제나 나의 삶의 일부는 미완성으로 끝난다는, 그 허무한 그늘 아래에서 내가 찾을 것은 행복보다는 절망이고 충만함보다는 결핍이다. 어쩌겠나. 그게 나인걸. 여전히 믿고 있다. 행복과 절망의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그것들은 분명 극과 극의 장소에 존재하고 있지만 그 원천은 동일하며 그 곳에서 풍기는 에너지는 언제나 화사롭다는 것을.
진짜 2011년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2월.
희망
에 대한
새로운 노래를 읊조릴 시간
모든 것들이 잘 지나가기를
내가 그 모든 것들의 징검다리를 무사히 건너기를
앞만 보고 달려간다는 무서운 말은 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다시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데 많은 시간을 쏟고 싶지도 않다. 사실 그래서 어떻게 해야할지 아직 잘 모르겠다. 일단 걸어가긴 하는데 차마 발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풀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발걸음은 아직 굳게 얼어 있다. 얼음이 녹기 위해서는 따뜻한 온기가 필요하건만 그 온도를 도대체 어디서 찾아야 할지 잘 모르겠다. 한 마디로 현재 나는 일시 정지의 상태. 더욱 힘차게 자가 발전기를 돌려야 겠다.
동네에 새 볼링장이 생겼다. 어제 운동을 마치고 나오던 길에 친구의 연락을 받고서 가서 실컷 치다가 새벽 열두시가 넘긴 것을 확인하곤 헐래벌떡 집으로 뛰어왔었는데, 그 덕분에 온 몸이 찌뿌둥하다.
몇일 전에 동계 아시안 게임을 시청하다가 갑자기 울컥 했었다. 분명 우리나라 선수는 신나게 1등으로 달리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어이없게 기분이 울렁거렸다. 저 한 경기에 출전하기 위해서 선수들은 몇 년 씩을 자신을 혹사시키고, 한번의 성취감을 위해 숱한 슬럼프와 온 몸의 고통을 견뎌내는구나, 장담할 수 없는 승산을 위해 자신의 젊음을 바치고, 때로는 실패로 절망 속에 자신을 내던지는건가, 그 삶은 너무 무모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들이 뒤죽박죽 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나의 삶을 연민하고 있었다. 울컥, 울컥. 가혹하지만 멋진 그들의 젊음 앞에서 나의 젊음은 너무 보잘 것 없었고, 나의 몸뚱어리는 언제나 작디 작은 나의 골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두통이 넘실거렸다.
가치에 관한 혼란에 빠졌을 그 때, 누군가가 나에게 해줬던 조언을 잊지 못한다. 나는 그 말에 아직도 나를 의지하고 있으며 동정받기를 원하는 동시에 증오한다. 세상의 모든 것들에게는 가치가 있으며 의미있다는 그 말. 그건 일종의 물과도 같은 말이었다. 인간이 지구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당연하게 존재했었던 그것. 그 존재와 가치와 의미. 물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이면서도 가장 만연한 요소이다. 고로 그것은 굉장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면서, 없을 수도 있는 존재이다. 너무 당연하게 존재하니까. 나의 존재의 가치 또한 그것과 다름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단순히 '평범하다' 라는 개성의 만연화와는 다른, 가슴 속으로 형용할 수록 더욱 비참해지는 그런 것.
나는 그래서 더 많은 것을 갈구한다. 하지만 그것들이 전부 나의 손아귀로 들어오지 않는다는 절망스러운 사실을 알고 있다. 언제나 나의 삶의 일부는 미완성으로 끝난다는, 그 허무한 그늘 아래에서 내가 찾을 것은 행복보다는 절망이고 충만함보다는 결핍이다. 어쩌겠나. 그게 나인걸. 여전히 믿고 있다. 행복과 절망의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그것들은 분명 극과 극의 장소에 존재하고 있지만 그 원천은 동일하며 그 곳에서 풍기는 에너지는 언제나 화사롭다는 것을.
진짜 2011년이 시작되었다.
p.150 안나 카레니나 1
나도 마치 스위스의 산줄기에 걸려 있는 것과 같은 그 하늘빛의 안개를 기억하고 있고 또 알고 있어요. 그 안개는 바로 유년 시절이 끝나가는 그 행복한 시기에 온갖 것을 가리우고 있죠. 그러나 그 거대하고 즐거운 세계에서 나오면 앞길은 차츰 차츰 좁아져요. 겉으론 밝고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외길로 들어가는 것이 즐겁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한...... 우리는 누구나 다 이런 길을 지나오게 마련이죠.
p.109 인간 혐오자
(알세스트) 솔직하고 진실하다는 장점 때문에 저는 다른 사람을 감언이설로 절대 속이지 못하지요. 자신의 속내를 숨길 줄 모르는 사람은 궁정에서 버틸만한 여지가 거의 없어요.
..
하지만 그런 특권을 잃는 동시에 아주 어리석은 바보노릇을 하는 서글픔을 겪지 않아도 되지요. 쓰레기와 다름없는 사람들을 상대할 필요가 없고 그 어떤 나리들의 시를 찬양할 필요가 없고 그 어떤 귀부인을 칭찬하지 않아도 되고 우스꽝스러운 후작들의 재치를 들어 줄 필요도 없으니까요.
p.145
(필랭트) 난 자네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해. 세상의 모든 일이 결탁과 이해관계에 얽혀 있으니까. 하지만 계략이 통하는 사회가 오늘만의 현실은 아니야. 이제는 사람들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해. 사람들이 공정하지 않다고 그들의 사회를 떠나는 이유가 성립이 될까? 인간들에게 여러가지 결점이 있기에 우리가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것 아니겠나.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의 가장 큰 미덕이거든. 만약 모든 사람이 성실하고 솔직하고 정의롭고 고분고분하다면 대부분의 미덕은 소용이 없어. 왜냐하면 미덕이란 우리가 정당한 가운데서 타인의 불의를 담담하게 견뎌낼 때 발휘되거든.
p.108 사회에 관한 새로운 의견
한 아이가 자기 주변의 물건이나 사람에 관해 충분하고 공정한 설명을 들을 때, 그리고 그가 올바로 생각하도록 배울 때, 그 아이는 거짓에서 보편적인 진리를 깨닫도록 배울 수 있다. 비록 문자나 숫자를 전혀 모르더라도 그 아이는, 믿음을 강요당해 왔고 가장 잘못된 학습 방식 때문에 생각하는 능력이 혼란에 빠지거나 파괴된 아이들보다 교육을 잘 받아들일 것이다.
p.33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인간 본성이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본성을 구상하기 위한 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구상하는 무엇이며 또한 인간 스스로가 원하는 무엇일 뿐입니다.
p.38
(불안과 자기기만)
우리는 일종의 자기기만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이 불안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지를 못하는 겁니다.
나도 마치 스위스의 산줄기에 걸려 있는 것과 같은 그 하늘빛의 안개를 기억하고 있고 또 알고 있어요. 그 안개는 바로 유년 시절이 끝나가는 그 행복한 시기에 온갖 것을 가리우고 있죠. 그러나 그 거대하고 즐거운 세계에서 나오면 앞길은 차츰 차츰 좁아져요. 겉으론 밝고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외길로 들어가는 것이 즐겁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한...... 우리는 누구나 다 이런 길을 지나오게 마련이죠.
p.109 인간 혐오자
(알세스트) 솔직하고 진실하다는 장점 때문에 저는 다른 사람을 감언이설로 절대 속이지 못하지요. 자신의 속내를 숨길 줄 모르는 사람은 궁정에서 버틸만한 여지가 거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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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특권을 잃는 동시에 아주 어리석은 바보노릇을 하는 서글픔을 겪지 않아도 되지요. 쓰레기와 다름없는 사람들을 상대할 필요가 없고 그 어떤 나리들의 시를 찬양할 필요가 없고 그 어떤 귀부인을 칭찬하지 않아도 되고 우스꽝스러운 후작들의 재치를 들어 줄 필요도 없으니까요.
p.145
(필랭트) 난 자네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해. 세상의 모든 일이 결탁과 이해관계에 얽혀 있으니까. 하지만 계략이 통하는 사회가 오늘만의 현실은 아니야. 이제는 사람들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해. 사람들이 공정하지 않다고 그들의 사회를 떠나는 이유가 성립이 될까? 인간들에게 여러가지 결점이 있기에 우리가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것 아니겠나.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의 가장 큰 미덕이거든. 만약 모든 사람이 성실하고 솔직하고 정의롭고 고분고분하다면 대부분의 미덕은 소용이 없어. 왜냐하면 미덕이란 우리가 정당한 가운데서 타인의 불의를 담담하게 견뎌낼 때 발휘되거든.
p.108 사회에 관한 새로운 의견
한 아이가 자기 주변의 물건이나 사람에 관해 충분하고 공정한 설명을 들을 때, 그리고 그가 올바로 생각하도록 배울 때, 그 아이는 거짓에서 보편적인 진리를 깨닫도록 배울 수 있다. 비록 문자나 숫자를 전혀 모르더라도 그 아이는, 믿음을 강요당해 왔고 가장 잘못된 학습 방식 때문에 생각하는 능력이 혼란에 빠지거나 파괴된 아이들보다 교육을 잘 받아들일 것이다.
p.33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인간 본성이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본성을 구상하기 위한 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구상하는 무엇이며 또한 인간 스스로가 원하는 무엇일 뿐입니다.
p.38
(불안과 자기기만)
우리는 일종의 자기기만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이 불안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지를 못하는 겁니다.
2011년 1월 31일 월요일
나는 조금 멍청했다. 수강신청을 2주 앞둔 지금에서야 복수전공 공지를 발견한 나... 복수전공 하고싶다고 작년 2학기 시작되자부터 외쳐댔었는데 결국 하지 못했다. 모르고 못했으면 원망이라도 덜한데, 알고서 그것도 매일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갔으면서도, 미처 확인하지 못해서 생길 불찰이라 화는 나는데 어찌할 방도가 없다. ㅠㅠ
아침 목욕을 다녀왔다. 설날 이틀 전이라서 그런지 월요일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복작복작했었다. 대충 예상은 했었지만 막상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있는 걸 보니 심기가 불편해졌다. 탕만 대충 몇번 들낙거리고, 어젯밤에 바른 바디로션 때문인지 밀어도 밀어도 미끈거리기만하고 나오지 않는 때에 신경질이 나 그냥 나와버렸다. 그래도 뜨거운 공기에 땀이 빠져서 그런지 찬바람에 온 몸이 시원해져서 좋았다. 점심먹고서 나른해지는 걸 보니 그래도 목욕했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친구들끼리 책 읽는 모임(아직 이름이 없는 상태)을 마련했다. 주최자는 내가 아니지만, 친구들과 함께 모여 책을 이야기하고 자신들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을 걸 생각하니 뿌듯하다. 몇 십년 전만해도 친구들과 세상과 책을 이야기하는 것이 그리 특별한 풍경이 아니었는데 우리들에게는 책 한권을 읽는 것조차도 모임을 마련해 숙제처럼 (일종의 의무로써) 그것을 행해야한다는게 안타깝다. 섭섭한 일인 것 같다.
그래서 이번주에 읽을 책은 요즘 화제가 되고 있다는 (친구에게 들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현재 절반을 조금 넘겨서 읽고 있는데, 내 호기심에 한껏 불을 지폈던 일상 속의 도덕적 딜레마들이 이 책을 빌미로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다. 하하하. 재밌긴한데 조금 어려워서 지루한 면도 있고 머리를 아프게 하는 구석은 굉장히 많다. 한 챕터 읽고 생각하고, 쉬고, 졸고 를 몇 번 더 반복해야 다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어제는 천국의 나날들 이라는 영화를 봤다. 이 영화를 알게 된건, 친구와 함께 들렀던 헌 책방의 DVD코너에서 였다. DVD 코너는 꼭 살 목적으로 가지 않아도, 그저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는 곳인데, 그 날도 늘과 같이 영화 제목을 구경하고, 내가 봤던 것들과 보지 않았던 것, 보고 싶었던 것 등등을 유심하게 살펴보고 있었다. 천국의 나날들은 제목만으로 나를 사로잡았던 영화였는데, 비싼 가격에 결국 사지 못하고 나왔었다. 그런데 어제 영화 보면서 후회했었다. 사올껄!!
어떤 관계 속에서 나를 얼마만큼 보여줘야하는지, 얼마만큼 양보와 타협과 이해를 해줘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이해는 끝도 없이 해주는게 좋다고 생각은 하지만, 정말 끝도 없이 해주다 보면 결국 끝에 내가 그를 이해한다는 마음은 진솔하지 못한, 관계의 의무에서 비롯되는 껍데기식의 이해가 될꺼같아서 두렵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게 되는 일인데, 어떻게 한도 끝도 없는 이해가 가능할 수 있을까.
항상 관계 속에서 나는 언제나 받아주는 입장인 것 같다. 하지만 그건 내가 나 자신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나와 관계하는 모든 사람들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사람은 항상 자신이 남들로부터 받은 것에서보다 남들에게 준 것에 대한 기억이 더 강하고, 거기서 강렬한 마음을 얻기 때문에 그것이 나 자신에 대한 오해인지 내 안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의 오해인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너무 말이 없어서, 이런 갈등이 비롯되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아침 목욕을 다녀왔다. 설날 이틀 전이라서 그런지 월요일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복작복작했었다. 대충 예상은 했었지만 막상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있는 걸 보니 심기가 불편해졌다. 탕만 대충 몇번 들낙거리고, 어젯밤에 바른 바디로션 때문인지 밀어도 밀어도 미끈거리기만하고 나오지 않는 때에 신경질이 나 그냥 나와버렸다. 그래도 뜨거운 공기에 땀이 빠져서 그런지 찬바람에 온 몸이 시원해져서 좋았다. 점심먹고서 나른해지는 걸 보니 그래도 목욕했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친구들끼리 책 읽는 모임(아직 이름이 없는 상태)을 마련했다. 주최자는 내가 아니지만, 친구들과 함께 모여 책을 이야기하고 자신들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을 걸 생각하니 뿌듯하다. 몇 십년 전만해도 친구들과 세상과 책을 이야기하는 것이 그리 특별한 풍경이 아니었는데 우리들에게는 책 한권을 읽는 것조차도 모임을 마련해 숙제처럼 (일종의 의무로써) 그것을 행해야한다는게 안타깝다. 섭섭한 일인 것 같다.
그래서 이번주에 읽을 책은 요즘 화제가 되고 있다는 (친구에게 들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현재 절반을 조금 넘겨서 읽고 있는데, 내 호기심에 한껏 불을 지폈던 일상 속의 도덕적 딜레마들이 이 책을 빌미로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다. 하하하. 재밌긴한데 조금 어려워서 지루한 면도 있고 머리를 아프게 하는 구석은 굉장히 많다. 한 챕터 읽고 생각하고, 쉬고, 졸고 를 몇 번 더 반복해야 다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어제는 천국의 나날들 이라는 영화를 봤다. 이 영화를 알게 된건, 친구와 함께 들렀던 헌 책방의 DVD코너에서 였다. DVD 코너는 꼭 살 목적으로 가지 않아도, 그저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는 곳인데, 그 날도 늘과 같이 영화 제목을 구경하고, 내가 봤던 것들과 보지 않았던 것, 보고 싶었던 것 등등을 유심하게 살펴보고 있었다. 천국의 나날들은 제목만으로 나를 사로잡았던 영화였는데, 비싼 가격에 결국 사지 못하고 나왔었다. 그런데 어제 영화 보면서 후회했었다. 사올껄!!
어떤 관계 속에서 나를 얼마만큼 보여줘야하는지, 얼마만큼 양보와 타협과 이해를 해줘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이해는 끝도 없이 해주는게 좋다고 생각은 하지만, 정말 끝도 없이 해주다 보면 결국 끝에 내가 그를 이해한다는 마음은 진솔하지 못한, 관계의 의무에서 비롯되는 껍데기식의 이해가 될꺼같아서 두렵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게 되는 일인데, 어떻게 한도 끝도 없는 이해가 가능할 수 있을까.
항상 관계 속에서 나는 언제나 받아주는 입장인 것 같다. 하지만 그건 내가 나 자신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나와 관계하는 모든 사람들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사람은 항상 자신이 남들로부터 받은 것에서보다 남들에게 준 것에 대한 기억이 더 강하고, 거기서 강렬한 마음을 얻기 때문에 그것이 나 자신에 대한 오해인지 내 안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의 오해인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너무 말이 없어서, 이런 갈등이 비롯되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2011년 1월 26일 수요일
몰리에르의 희곡 '인간 혐오자'에 등장하는 주인공이자 자신의 아집에 갇혀 살아가는 알세스트. 그는 자신이 속해 있는 궁정, 사교계층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마음 속에 숨어있는 진실을 숨기고 타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위선적으로 말하고 속물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불순하다 여기며 진실의 숭고함을 끈임없이 주장한다. 그는 그런 자신의 태도를 당연하게 여기며, 세태와는 달리 진실이라는 세상의 근본적 고결함을 순고하게 지키기 위해 사회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한다. 사회와 사람들의 무리 속에 섞일 수 없었던 그의 올곧은 고결함을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필랭트는 너무 꼿꼿한 그의 태도를 나무라며 누그러뜨릴 것을 권유하지만 그는 그런 그의 조언조차도 위선이라 여기며 쓴소리를 멈추지 않는다. (심지어 사랑하는 여자에게까지, 사랑이라는 매혹적인 감정의 소용돌이에 홀려있는 와중에도 그는 진실의 이성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무수히 노력한다. 결국 그녀가 그에게서 손을 놓아버리지만.) 숨김없이 말하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며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그렇게 해야한다고 말하는 그의 주장에는 틀림없는 진실이 담겨있지만, 친밀한 관계 속에서조차 한치의 타협도 받아들이지 않는 그의 태도는 인색하기 짝이 없다. 분명, 그에게나 우리들에게 진실이 중요하고 또 고귀한 존재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인간 혐오자' 속의 인간 혐오자인 알세스트처럼 무조건 드러내는 것만이 진실로 다가가기 위한 방법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숨기는 것이 진실이 되기도 한다. 숨겨야만 해결이 보이고 모두에게 행복을 주는, 옳은 길이 되기도 한다.
진실이 드러나는 것과 진실을 숨기는 은밀한 통로.
근래에 상류계층에 환멸을 느끼고 인간으로써의 진정한 삶을 찾아 떠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주로 접하다보니 그들의 위선적인 삶과 진실에 대한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인간 혐오자'를 보다보면 그들의 위선과 진실이 충돌하는 선이 아주 극명하게 드러난다. 강직하고 언제나 올곧은 알세스트의 사랑을 받기 때문에 조금은 의아한, 스무살의 나이에 이혼을 하고 모든 남자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또 그것을 잘못된 일이라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여자. 그녀와 알세스트를 흠모하는 또 다른 여자의 대화를 보면, 그들은 다른 곳에서 들은 서로에 대한 헌담을 폭로하며 지금까지 자신들을 포장해주었던 극 속에서의 아름다운 수식어들을 더럽힌다. 하나는 아름답고 친절하며 모든 남자들에게 사랑을 받는 어여쁜 여자였고, 다른 하나는 아름답지도 않고 여성적인 매력은 없지만 여자 알세스트라고 불리어도 어색함이 없는, 보통의 여자들의 매력과는 사뭇 다른 독특한 매력을 가진 여자였다. 하지만 위선으로 포장된 그 둘의 껍데기는 그들이 없는 자리에서 주변 사람들이 꼬집은 헌담, 그러니까 어찌보면 사람들이 직접 말해 주지 않았던, 그들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면서 위선이 가진 양면을 적나라게 보여준다. 포장된 것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거슬리지 않지만, 잘 포장된 포장지가 어쩌다가 벗겨지게 되는 순간은 진실이 제 몸을 고스란히 드러냈을 때보다 더 격한 반응을 몰고 온다. 인간적인 환멸과 혐오는 그 속에서 배로 증폭된다. 그 전제에는 진실을 숨기는, 평온한 상태에는 한계가 분명히 존재하며 인간들이란게 원래 위선이 어정쩡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우스꽝스러운 자태를 더 즐겨하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모든 혐오는 알세스트가 느꼈던 것처럼 진실과 거짓에 있는 것이 아닌 인간의 악한 본성 그 자체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악한 본성만을 보고서 탈사회를 감행한 알세스트는 너무나 고결해 우둔했다고 볼 수 있다. 선한 본성을 치료삼아 인간에게 조금이라도 연민을 가질 수 있었다면 그는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이진 못하더라도 바라보면서 살 수 있었을텐데. 그래서 타협은 위험하면서도 중요한 선택인 것 같다.
무튼 무척이나 재밌다. 이 희곡. 어설프게 웃기도 하면서 단숨이 읽어버렸다. 읽는 내내 주인공들의 옷차림이나 생김새가 상상되어서 더 재밌었다. 아.. 이 말이 제일 멋지고 숨가쁜거 같다. '재밌다' 라는 말.
진실이 드러나는 것과 진실을 숨기는 은밀한 통로.
근래에 상류계층에 환멸을 느끼고 인간으로써의 진정한 삶을 찾아 떠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주로 접하다보니 그들의 위선적인 삶과 진실에 대한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인간 혐오자'를 보다보면 그들의 위선과 진실이 충돌하는 선이 아주 극명하게 드러난다. 강직하고 언제나 올곧은 알세스트의 사랑을 받기 때문에 조금은 의아한, 스무살의 나이에 이혼을 하고 모든 남자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또 그것을 잘못된 일이라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여자. 그녀와 알세스트를 흠모하는 또 다른 여자의 대화를 보면, 그들은 다른 곳에서 들은 서로에 대한 헌담을 폭로하며 지금까지 자신들을 포장해주었던 극 속에서의 아름다운 수식어들을 더럽힌다. 하나는 아름답고 친절하며 모든 남자들에게 사랑을 받는 어여쁜 여자였고, 다른 하나는 아름답지도 않고 여성적인 매력은 없지만 여자 알세스트라고 불리어도 어색함이 없는, 보통의 여자들의 매력과는 사뭇 다른 독특한 매력을 가진 여자였다. 하지만 위선으로 포장된 그 둘의 껍데기는 그들이 없는 자리에서 주변 사람들이 꼬집은 헌담, 그러니까 어찌보면 사람들이 직접 말해 주지 않았던, 그들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면서 위선이 가진 양면을 적나라게 보여준다. 포장된 것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거슬리지 않지만, 잘 포장된 포장지가 어쩌다가 벗겨지게 되는 순간은 진실이 제 몸을 고스란히 드러냈을 때보다 더 격한 반응을 몰고 온다. 인간적인 환멸과 혐오는 그 속에서 배로 증폭된다. 그 전제에는 진실을 숨기는, 평온한 상태에는 한계가 분명히 존재하며 인간들이란게 원래 위선이 어정쩡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우스꽝스러운 자태를 더 즐겨하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모든 혐오는 알세스트가 느꼈던 것처럼 진실과 거짓에 있는 것이 아닌 인간의 악한 본성 그 자체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악한 본성만을 보고서 탈사회를 감행한 알세스트는 너무나 고결해 우둔했다고 볼 수 있다. 선한 본성을 치료삼아 인간에게 조금이라도 연민을 가질 수 있었다면 그는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이진 못하더라도 바라보면서 살 수 있었을텐데. 그래서 타협은 위험하면서도 중요한 선택인 것 같다.
무튼 무척이나 재밌다. 이 희곡. 어설프게 웃기도 하면서 단숨이 읽어버렸다. 읽는 내내 주인공들의 옷차림이나 생김새가 상상되어서 더 재밌었다. 아.. 이 말이 제일 멋지고 숨가쁜거 같다. '재밌다' 라는 말.
2011년 1월 25일 화요일
매주 일요일 오전에서 오후로 넘어가기 전 즈음 방영되는 영화 프로그램에서 우연치않게 '아이엠러브' 라는 이탈리아 영화 예고편을 보았었다. 작년인가 제작년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이었다는데(아마도 작년?) 너무 궁금해서 오늘 보러 갔었다. 개인적으로 조조영화를 좋아하는데 이 영화 벌써 조조시간대 잘려먹혔다. 하루에 단 3번 상영, 오후에 하나, 저녁부터 밤까지 두개. 불과 5일 전에 개봉한 영화 시간대를 벌써 잘라먹다니. 아직 지방의 예술영화 환경은 너무나 열악하다. 그나마 여긴 센텀 롯데시네마에서 만든 아트관이라도 있어서 망정이지 안그랬으면 개봉과 동시에 예술 영화를 본다는 거 꿈도 꿀 수 없다. 인터넷 개봉 날짜는 떠 있는데, 서울에서는 상영하는 곳도 많은데, 정작 나는 볼 수 없을 때 얼마나 짜증나는지 모른다! 특수 영화관(시네마테크, 국도예술관)에서 특 별 상 영 을 해주거나 그 곳에 DVD가 입수 되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자칭 영화 도시라고 말하는 부산이 이 정도인데 다른 지방은 아주 그럴 기회 조차 없는거 아닌가 걱정이 된다. 많은, 모든 사람들은 다양한 문화를 즐길 권리가 있는데 그럴만한 기본 요건이 충족되지 못하고 있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무튼, 잡소리 다 넣어두고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기본 정보가 있는 상태에서 갔기에 꽤나 흥미롭게 봤다. 보는 중간에 실잠같은 졸음이 잠깐 들었던 것 빼면.(근데 생각해보면 웃긴게 엠마와 안토니오가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는 장면, 한마디로 야한 장면에서 난 졸았다ㅋㅋ 사실 그 장면을 보면서 그 동안 영화들이 섹스장면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생각했었다. 아마도 그것들은 진심의 사랑을 보여주기보다는 기존의 것들보다 더 야하게 찍을 것을 목적으로 삼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어이없게도 울뻔했다. 너무 너무 너무 울컥하는 그 감동이 단숨에 몰려왔기 때문에.
'아이엠러브'를 소개하는 리포터는 이 영화이 채털리부인의 연인을 닮아있다고 했다. 주인공 엠마는 러시아 출신이지만 이탈리아로 시집을 와 이탈리아 사람처럼 지낸다. 건실하게 아이들 셋을 길렀고 이탈리아의 대단한 가문의 며느리로써 자신의 몫을 다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삶에 지쳐가게 되고 그 즈음 아들, 에도의 친구이자 요리사인 안토니오를 만나게 된다. 처음 그를 주방에서 만났을 때, 그는 우연스럽게도 러시아 음식을 만들고 있었고 엠마는 거기서 자신이 그리워했던 고향의 향수를 만나게 된다. 다음 날 안토니오의 식당을 찾아가고 거기서 안토니오가 만들어 준 새우요리를 먹으며 안토니오에게서 사랑을 느끼게 된다. (이 장면 정말 일품이다. 붉은 새우의 몸과 붉은 그녀의 입술 그리고 그 장면 안에서 묘하게 푸르스름하던 그녀의 눈동자. 접시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면서부터 가게 안의 소음들은 사라지고 오로지 상기된 그녀와 접시만 살아난다. 처음으로 그녀는 이 영화에서 행복한, 물론 비명은 지르지 않는다, 표정을 짓게 되며 그 표정은 마치 지상에서 잠깐 숨을 멎었던 물고기가 물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생기있고 유연하게 미끄러지는, 그 때 그 움직임과 닮았다.) 그러고나서 몇 달이 흐른 뒤, 그녀는 자신의 딸이 동성애자라는 사실과 그런 딸에게 현재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며, 딸이 쓴 쪽지를 통해 그 사람을 향한 딸의 진실된 사랑을 보게 된다. 그리고 엠마는 산로메로 떠난다. 그 곳에서 그녀는 안토니오와 재회하게 되고, 산 속 깊숙이 숨어있는 그의 농장에서 사랑을 시작하게 된다. 온갖 자연이 뿜어대는 소리와 아무 것도 숨기지 않는, 있는 그대로인 자연 안에서 어떤 현실의 무게나 그 동안 그녀를 짓눌러왔던 형식, 격식 따위 던져버리고 엠마는 사랑을 하고 그 속에서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삶의 기쁨을 느끼게 된다.(그들의 사랑의 배경이 되는 자연의 모습과 그 속에서 관계를 맺는 그들의 모습은 다분히 원초적이다. 하지만 이 영화 속에서 그녀의 사랑은 원초적인 사랑이라는 본래의 뉘앙스보다는 한단계 상승되어 있다. 원초적이기는 하지만 감히 원초적이라 말할 수 없는, 어쩌면 엠마의 껍데기에서만 맴돌던 사랑을 탈피했기 때문에 더 성숙하고 인간 근본적일 수 밖에 없는, 그런 사랑.)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안토니오가 우하 스프를 만들어 엠마의 가족 식탁에 올리게 되면서 균열의 조짐을 엿보인다. 우하 스프는 엠마와 아들인 에도의 둘 사이를 애정어리게 이어주던 매개체였다. 다른 가족들은 그 스프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우하 스프는 단순한 스프가 아닌 이탈리아 한 가운데에서 외롭게 자신의 존재를 외치던, 러시아인인 엠마의 향수이며 본질이다. 그 영화 속에서, 그러니까 그 집안에서 우하 스프를 만든다는 것은 엠마의 본질과 영혼과 통한다는 뜻이며. 더불어 안토니오가 엠마에게 바치고 싶었던 사랑인 셈이다. 그것을 눈치챈 아들 에도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사고로 죽게 된다. (돌에 머리를 부딪친 아들의 사고 장면과 병원에서 그의 죽음을 고하는 의사 그리고 가족들의 슬픔을 담는 카메라는 너무 담담하게 절제되어 있다.) 아들이 죽은 사고에 연루된 엠마는 그 죄책감을 떨쳐내지 못한다. (나는 이 장면에서 엠마가 그로 인한 죄책감에 다시는 안토니오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자신이 사랑했던 아들이 자신의 사랑 때문에 죽게되었으며, 자신과 안토니오 사이의 비밀은 아들의 죽음이라는 상처가 되어버렸으니 영원히 그녀의 영혼은 복구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아들의 장례가 치뤄지고 죄책감에 그녀는 남편에게 자신은 안토니오를 사랑한다고 고하게 되고 급히 짐을 싸서 집을 뛰쳐나온다. (그녀가 안토니오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고하는 순간 지금까지 그녀가 쥐고 있었던 남편에 대한 사랑은 뿌리 뽑히게 된다. 그는 매몰차게 그녀에게 말했기 때문이다, 너의 존재는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었다고. 한 마디로 그녀의 가정 속에서 그녀는 엄마이자 아내라는 역할극에 불과했다는 뜻.) 그녀는 짐을 싸고서 아주 편한, 지금까지 볼 수 없을 정도로 평온한 복장을 하고서 등장한다. (이 장면에서 웃은 사람들 꽤 많다. 내 생각에는 그 복장이어야만 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지금까지 보여줬던 상류층의 우아함을 단숨에 벗어버린 터라 누군가에게는 당혹스러우면서도 우스꽝스러웠을 것 같다.) 떠나는 문 앞에서 그녀의 눈은 딸을 향하고 딸은 그런 엄마를 향해 미소 짓는다. 그리고 딸의 애인(여자친구)이 그런 둘 사이의 교감을 눈치채고서 떨리는 눈동자로 딸의 이름을 부르게 되고 집안의 분위기는 술렁인다, 그리고 돌아보면 엠마가 떠난 문은 휑하게 흔들리고 있다.
영화는 이렇게 끝이 난다. 함께 봤던 누군가의 입을 빌리자면 이게 끝이야? 할때 정말이지 끝이 난다. 엠마와 안토니오로 추정되는 두 남녀가 누더기 차림으로 엉켜있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결국 엠마는 안토니오에게 다시 돌아간다. 자신의 아들의 죽음의 상처를 건너 안토니오라는 사랑을 향해 다리를 건넌 셈이 되는데, 왜 하필이면 엠마는 그에게로 돌아가나, 고민이 들었다. 물론 영화 속에서 그녀가 그런 선택을 하는 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왜 굳이 감독은 그런 방향으로 의도한 걸까. 아마도 그건 엠마가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가정 속에서 다시 죽은 듯 살아가기에 너무나 강렬하고 아름다운 생명의 기쁨을 맛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누구도 뿌리칠 수 없는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찬, 생명력이 무르익어있는 순간을 맛보았기에 다시 고통을 느낄 여유가 없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그녀에게 안토니오는 일종의 탈출구였을 것이다. 해방과 생명을 위한 탈출구가 아닌 죽음을 위한 탈출구, 자신의 아들을 죽게 만든 안토니오와 자신과의 관계 속에 자신을 가두어 놓고 벌을 받기 위해 안토니오와의 사랑을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엠마는 톨스토이의 안나카레니나 속의 안나와도 닮은 구석이 꽤나 많은 여자이다. 안나는 이성으로 짝지어진 자신의 결혼 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자신의 남편와 아이를 모두 버리고서 열정적인 사랑을 찾아간다. 안나의 결말은 엠마의 행복한 마지막과 아주 다르지만, 사랑을 선택하게 된 배경과 사랑 앞에서 느낀 두 사람의 기쁨, 환희, 행복함의 감정은 아주 닮아 있다.
아마 이 영화를 본다면 결코 스토리 속에서 불륜이나 신파같은 어리석은 말들을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다 보여주고 설명해주는 것 같은데도 장면들은 비밀스럽고 절제되어 있다. 사랑을 설명하지 않지만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일정한 순서와 스토리들을 밟아감에도 불구하고 신선함을 느낄 수 있다. 적절하게 숨길 때와 적절하게 드러낼 때를 알기 때문이다. 스토리를 위한 영화가 아닌 영화를 위한, 영화적으로 잘 만들어진 영화같다. 무엇보다도 설명하려 들지 않고 화면 구성과 소리를 통해서만 분위기를 보여주려고 한 노력이 멋지다. 내 안에 새로운 영화가 될 듯.
무튼, 잡소리 다 넣어두고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기본 정보가 있는 상태에서 갔기에 꽤나 흥미롭게 봤다. 보는 중간에 실잠같은 졸음이 잠깐 들었던 것 빼면.(근데 생각해보면 웃긴게 엠마와 안토니오가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는 장면, 한마디로 야한 장면에서 난 졸았다ㅋㅋ 사실 그 장면을 보면서 그 동안 영화들이 섹스장면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생각했었다. 아마도 그것들은 진심의 사랑을 보여주기보다는 기존의 것들보다 더 야하게 찍을 것을 목적으로 삼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어이없게도 울뻔했다. 너무 너무 너무 울컥하는 그 감동이 단숨에 몰려왔기 때문에.
'아이엠러브'를 소개하는 리포터는 이 영화이 채털리부인의 연인을 닮아있다고 했다. 주인공 엠마는 러시아 출신이지만 이탈리아로 시집을 와 이탈리아 사람처럼 지낸다. 건실하게 아이들 셋을 길렀고 이탈리아의 대단한 가문의 며느리로써 자신의 몫을 다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삶에 지쳐가게 되고 그 즈음 아들, 에도의 친구이자 요리사인 안토니오를 만나게 된다. 처음 그를 주방에서 만났을 때, 그는 우연스럽게도 러시아 음식을 만들고 있었고 엠마는 거기서 자신이 그리워했던 고향의 향수를 만나게 된다. 다음 날 안토니오의 식당을 찾아가고 거기서 안토니오가 만들어 준 새우요리를 먹으며 안토니오에게서 사랑을 느끼게 된다. (이 장면 정말 일품이다. 붉은 새우의 몸과 붉은 그녀의 입술 그리고 그 장면 안에서 묘하게 푸르스름하던 그녀의 눈동자. 접시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면서부터 가게 안의 소음들은 사라지고 오로지 상기된 그녀와 접시만 살아난다. 처음으로 그녀는 이 영화에서 행복한, 물론 비명은 지르지 않는다, 표정을 짓게 되며 그 표정은 마치 지상에서 잠깐 숨을 멎었던 물고기가 물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생기있고 유연하게 미끄러지는, 그 때 그 움직임과 닮았다.) 그러고나서 몇 달이 흐른 뒤, 그녀는 자신의 딸이 동성애자라는 사실과 그런 딸에게 현재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며, 딸이 쓴 쪽지를 통해 그 사람을 향한 딸의 진실된 사랑을 보게 된다. 그리고 엠마는 산로메로 떠난다. 그 곳에서 그녀는 안토니오와 재회하게 되고, 산 속 깊숙이 숨어있는 그의 농장에서 사랑을 시작하게 된다. 온갖 자연이 뿜어대는 소리와 아무 것도 숨기지 않는, 있는 그대로인 자연 안에서 어떤 현실의 무게나 그 동안 그녀를 짓눌러왔던 형식, 격식 따위 던져버리고 엠마는 사랑을 하고 그 속에서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삶의 기쁨을 느끼게 된다.(그들의 사랑의 배경이 되는 자연의 모습과 그 속에서 관계를 맺는 그들의 모습은 다분히 원초적이다. 하지만 이 영화 속에서 그녀의 사랑은 원초적인 사랑이라는 본래의 뉘앙스보다는 한단계 상승되어 있다. 원초적이기는 하지만 감히 원초적이라 말할 수 없는, 어쩌면 엠마의 껍데기에서만 맴돌던 사랑을 탈피했기 때문에 더 성숙하고 인간 근본적일 수 밖에 없는, 그런 사랑.)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안토니오가 우하 스프를 만들어 엠마의 가족 식탁에 올리게 되면서 균열의 조짐을 엿보인다. 우하 스프는 엠마와 아들인 에도의 둘 사이를 애정어리게 이어주던 매개체였다. 다른 가족들은 그 스프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우하 스프는 단순한 스프가 아닌 이탈리아 한 가운데에서 외롭게 자신의 존재를 외치던, 러시아인인 엠마의 향수이며 본질이다. 그 영화 속에서, 그러니까 그 집안에서 우하 스프를 만든다는 것은 엠마의 본질과 영혼과 통한다는 뜻이며. 더불어 안토니오가 엠마에게 바치고 싶었던 사랑인 셈이다. 그것을 눈치챈 아들 에도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사고로 죽게 된다. (돌에 머리를 부딪친 아들의 사고 장면과 병원에서 그의 죽음을 고하는 의사 그리고 가족들의 슬픔을 담는 카메라는 너무 담담하게 절제되어 있다.) 아들이 죽은 사고에 연루된 엠마는 그 죄책감을 떨쳐내지 못한다. (나는 이 장면에서 엠마가 그로 인한 죄책감에 다시는 안토니오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자신이 사랑했던 아들이 자신의 사랑 때문에 죽게되었으며, 자신과 안토니오 사이의 비밀은 아들의 죽음이라는 상처가 되어버렸으니 영원히 그녀의 영혼은 복구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아들의 장례가 치뤄지고 죄책감에 그녀는 남편에게 자신은 안토니오를 사랑한다고 고하게 되고 급히 짐을 싸서 집을 뛰쳐나온다. (그녀가 안토니오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고하는 순간 지금까지 그녀가 쥐고 있었던 남편에 대한 사랑은 뿌리 뽑히게 된다. 그는 매몰차게 그녀에게 말했기 때문이다, 너의 존재는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었다고. 한 마디로 그녀의 가정 속에서 그녀는 엄마이자 아내라는 역할극에 불과했다는 뜻.) 그녀는 짐을 싸고서 아주 편한, 지금까지 볼 수 없을 정도로 평온한 복장을 하고서 등장한다. (이 장면에서 웃은 사람들 꽤 많다. 내 생각에는 그 복장이어야만 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지금까지 보여줬던 상류층의 우아함을 단숨에 벗어버린 터라 누군가에게는 당혹스러우면서도 우스꽝스러웠을 것 같다.) 떠나는 문 앞에서 그녀의 눈은 딸을 향하고 딸은 그런 엄마를 향해 미소 짓는다. 그리고 딸의 애인(여자친구)이 그런 둘 사이의 교감을 눈치채고서 떨리는 눈동자로 딸의 이름을 부르게 되고 집안의 분위기는 술렁인다, 그리고 돌아보면 엠마가 떠난 문은 휑하게 흔들리고 있다.
영화는 이렇게 끝이 난다. 함께 봤던 누군가의 입을 빌리자면 이게 끝이야? 할때 정말이지 끝이 난다. 엠마와 안토니오로 추정되는 두 남녀가 누더기 차림으로 엉켜있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결국 엠마는 안토니오에게 다시 돌아간다. 자신의 아들의 죽음의 상처를 건너 안토니오라는 사랑을 향해 다리를 건넌 셈이 되는데, 왜 하필이면 엠마는 그에게로 돌아가나, 고민이 들었다. 물론 영화 속에서 그녀가 그런 선택을 하는 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왜 굳이 감독은 그런 방향으로 의도한 걸까. 아마도 그건 엠마가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가정 속에서 다시 죽은 듯 살아가기에 너무나 강렬하고 아름다운 생명의 기쁨을 맛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누구도 뿌리칠 수 없는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찬, 생명력이 무르익어있는 순간을 맛보았기에 다시 고통을 느낄 여유가 없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그녀에게 안토니오는 일종의 탈출구였을 것이다. 해방과 생명을 위한 탈출구가 아닌 죽음을 위한 탈출구, 자신의 아들을 죽게 만든 안토니오와 자신과의 관계 속에 자신을 가두어 놓고 벌을 받기 위해 안토니오와의 사랑을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엠마는 톨스토이의 안나카레니나 속의 안나와도 닮은 구석이 꽤나 많은 여자이다. 안나는 이성으로 짝지어진 자신의 결혼 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자신의 남편와 아이를 모두 버리고서 열정적인 사랑을 찾아간다. 안나의 결말은 엠마의 행복한 마지막과 아주 다르지만, 사랑을 선택하게 된 배경과 사랑 앞에서 느낀 두 사람의 기쁨, 환희, 행복함의 감정은 아주 닮아 있다.
아마 이 영화를 본다면 결코 스토리 속에서 불륜이나 신파같은 어리석은 말들을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다 보여주고 설명해주는 것 같은데도 장면들은 비밀스럽고 절제되어 있다. 사랑을 설명하지 않지만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일정한 순서와 스토리들을 밟아감에도 불구하고 신선함을 느낄 수 있다. 적절하게 숨길 때와 적절하게 드러낼 때를 알기 때문이다. 스토리를 위한 영화가 아닌 영화를 위한, 영화적으로 잘 만들어진 영화같다. 무엇보다도 설명하려 들지 않고 화면 구성과 소리를 통해서만 분위기를 보여주려고 한 노력이 멋지다. 내 안에 새로운 영화가 될 듯.
2011년 1월 23일 일요일
어제 오후 3시에 텝스시험 치러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중학교에 갔었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아니지만 동네에서 십분거리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학교가 우리 동네에 있는지도 몰랐던 곳에 가서 시험을 쳤었다. 아.. 학교 콘크리트 벽 너무 춥다. 단순히 춥다가 아니라 이건 마치 불어오는 바람만 막아줄 뿐 냉랭한 공기는 밖이나 안이나 다름이 없더라. 히터 돌아가는 소리가 나긴 나는데 이거 뭐 밖인지 안인지도 모를 정도로 추위에 떨면서 시험을 쳤으니 결과는 말 다한 셈인거같군. 텝스 처음 쳐봤는데 나름 스트레스받으면서 재밌게 쳤던 것 같다. 하하. 이 시험을 치기 위해 공부를 했던 것도 아니고, 그냥 내 스스로의 진단 평가를 위해 순수한 의도로 쳤던 시험인지라 처음 텝스 시험지 받고서 헉 했었다. 문제는 왜 그렇게 많은지, 시간은 왜 그렇게 짧은지, 영어를 위한 테스트가 아니라 영어 기술 평가 테스트네 싶은 생각이 머릿 속에서 종횡무진. 하지만 영어실력을 쌓고 또 테스트를 하기 위해선 현재 시행되고 있는 국가 인정 시험 중에선 텝스가 제일로 나은 듯.(물론 이 판단의 기준은 나에게 있음) 올해 하반기쯤엔 토플로 갈아타야지. 이힛. 영어공부 요고요고, 잊고 있었던 나의 오기에 불을 질러주는군.
2011년 1월 21일 금요일
어제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 연극을 보았다. 알렉산더 젤딘이라는 외국 연출가의 작품이었는데.. 현대적으로 잘 각색된 무대나 의상 디자인은 무척이나 돋보였고 전통극임에도 불구하고 그 세련됨을 잃지 않고 있었다. 덕분에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도 이 시대의 극으로 새롭게, 아주 훌륭히 재탄생시킨듯.
요즘 영상을 가미한 연극들이 종종 보인다. (내가 봤던 현대의 연극에선 대부분 그런 듯) 하지만 지금까지 봤던 연극들 중에서 어제 맥베스가 그 둘의 결합을 가장 효과적으로 잘 사용한 듯. 맥베스의 내면 심리 분위기를 묘사하기 위해 박제 부엉이의 눈을 클로즈업하고 피부색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적외선카메라(심지어 어둠 속에서 적외선 카메라로 본 사람의 얼굴은 창백하면서도 무언가 적나라하고 인간답지 않아 보이는 기묘한 느낌을 준다)로 맥베스의 정면, 측면 등의 얼굴을 불안정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아마 그 영상이 없었더라면 어제의 연극은 이도 저도 아닌 단순히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올리기 위한 목적에 불과한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상 속에 맥베스의 내면이 있었기에 관객들은 그의 심리에 정확하게 초점을 맞출 수 있었고(설령 그 영상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 흐름을 따라 극을 잘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영상과 연극의 궁합이 잘 맞는 연극을 볼 수 있었던 건 정말이지 큰 기쁨이다)
가장 최고의 장면을 꼽으라면 던컨왕의 아들과 맥더프의 무리들이 군사들을 이끌고 온갖 야망과 죄책감에 타락한 맥베스를 처치하러 온 장면인데, 맥베스는 어지러워진 무대의 한 가운데에 앉아 촛불을 들고서 인생이란 걸어다니는 그림자라 말하며 자신의 삶에 대한 회한과 후회, 그리고 이젠 정말 끝에 서 있는, 그 이후엔 아무것도 없는 자신의 삶과 허물어진 야망의 껍데기를 은근히 드러낸다. 그리고 던컨 왕의 아들과 맥더프의 무리들은 무대의 한 가운데에 허무하게 앉아 있는 맥베스의 주위를 원을 그리면서 계속 걸어다닌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 그들이 서로를 마주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 그들로부터 포위를 당하면서 고립된 맥베스의 비극과 최후를 비유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매우 인상적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들과 분위기를 저렇게 눈에 보이게, 그것도 아주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는 구나 라는 감탄이 들 정도로.. 무튼, 어제의 연극에서나 희곡에서나 맥베스의 마지막 그 대사는 정말로 멋지다. 인생이란 걸어다니는 그림자에 불과하다라니... 멋지다.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그 무대가 갖고 있던 현대적 의미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같이 보러 간 친구는 무대가 너무 산만하다고 했지만. 독특하게도 조명이 비추는 곳만을 무대라 설정하고 극을 진행한듯. 그러니까 보통 지금까지 우리들이 보아왔던 연극들에서는 관객들의 눈 앞에 보이는 무대의 전반이 극을 진행하는 무대였고 그 무대 위에서 배우가 연기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 무대의 뒷켠을 만들어 무대 위에서의 자신의 임무가 끝난 배우들은 다음 장면을 준비하기 위해 퇴장을 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내가 배웠던 연극이론에선 그것이 연극의 기본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 연극에서는 그 틀이 무너져 있었다. 조명이 드러나지 않은 암흑의 무대 위에서 배우들은 옷을 갈아입기도 하고(관객들의 입장에서는 다음 장면을 준비하는 그 움직임이 어색했지만 극 중에선 충분히 그 곳을 제 3의 연극 장소로 설정한 듯 했다) 다른 사람들의 연극을 보면서 서 있기도 했다.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기존의 무대가 가진 무대와 무대 밖의 세계에 존재하는 엄격한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의도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중반부에 쌩뚱맞게도 관객들에게 대화를 걸었던 배우의 연기 또한. 무대와 객석의 세계를 흩뜨리면서 관객들에게 혼란을 맛보여주기 위해 의도한 설정인 듯. 물론 그 대화의 상대로 지목된 사람이 함께 갔던 친구라 당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흥미로웠지만 말이다. 배우로 무대에 등장한 사람이 배우가 아닌 것처럼 (마치 진행되고 있는 쇼 중간에 쉬는 시간에 흐름을 끊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미리 준비한 바람잡이 역할처럼) 관객에게 대화를 걸었지만, 정작 관객들은 그 대화에 쉽게 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서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만드는 건 무대를 향한 관객의 딱딱하고도 오만한 시선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오만에는 절대 악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객석에 앉아 배우들의 연기를 어떤 잔치의 쇼를 보기 위한, 연극 속의 관객의 입장으로서 자신들을 연극에 참여하는 사람들 중 하나라고 여기기 보다는 배우들의 모습들을 단순히 보기 위한, 어찌보면 순수한 방관적 목도일 수도, 어찌보면 배우들의 연기를 팔짱끼고 바라보기에만 그치는 수동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오만이다. (물론 이 오만이라는 단어는 연극 자체에서 무대가 갖는 오만일 확률이 크다, 내 생각에는) 그렇지만 그 오만이 부정적이든 단순한 단어이든 간에 어느 누구도 객석의 오만을 탓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건 연극이 발생된 이후로 근래까지 있어왔던 연극이라는 한 장르의 한계의 일부이기에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단순히 경계가 있음과 흐트러짐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수동적인 관객들은 우스꽝스럽게 놀라면서도 신선함을 느낄 수 있으니, 그 시도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보러가면 종종 느끼는 것인데 그의 작품에는 적어도 3시간의 러닝타임이 필요한 것 같다. 어제 맥베스는 1시간 40분 짜리였는데, 짧은 시간 안에 모든 내용을 다 담은지라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보지 못하고 간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많이 버거웠을 것 같다. 배우들과 극이 흘러가는 전개의 속도가 너무 빠르고 허겁지겁이라 여운을 남길 수 있는 지점과 갈등의 중심점이 흐트러지면서 모호해진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던 것 같다.
요즘 영상을 가미한 연극들이 종종 보인다. (내가 봤던 현대의 연극에선 대부분 그런 듯) 하지만 지금까지 봤던 연극들 중에서 어제 맥베스가 그 둘의 결합을 가장 효과적으로 잘 사용한 듯. 맥베스의 내면 심리 분위기를 묘사하기 위해 박제 부엉이의 눈을 클로즈업하고 피부색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적외선카메라(심지어 어둠 속에서 적외선 카메라로 본 사람의 얼굴은 창백하면서도 무언가 적나라하고 인간답지 않아 보이는 기묘한 느낌을 준다)로 맥베스의 정면, 측면 등의 얼굴을 불안정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아마 그 영상이 없었더라면 어제의 연극은 이도 저도 아닌 단순히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올리기 위한 목적에 불과한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상 속에 맥베스의 내면이 있었기에 관객들은 그의 심리에 정확하게 초점을 맞출 수 있었고(설령 그 영상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 흐름을 따라 극을 잘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영상과 연극의 궁합이 잘 맞는 연극을 볼 수 있었던 건 정말이지 큰 기쁨이다)
가장 최고의 장면을 꼽으라면 던컨왕의 아들과 맥더프의 무리들이 군사들을 이끌고 온갖 야망과 죄책감에 타락한 맥베스를 처치하러 온 장면인데, 맥베스는 어지러워진 무대의 한 가운데에 앉아 촛불을 들고서 인생이란 걸어다니는 그림자라 말하며 자신의 삶에 대한 회한과 후회, 그리고 이젠 정말 끝에 서 있는, 그 이후엔 아무것도 없는 자신의 삶과 허물어진 야망의 껍데기를 은근히 드러낸다. 그리고 던컨 왕의 아들과 맥더프의 무리들은 무대의 한 가운데에 허무하게 앉아 있는 맥베스의 주위를 원을 그리면서 계속 걸어다닌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 그들이 서로를 마주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 그들로부터 포위를 당하면서 고립된 맥베스의 비극과 최후를 비유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매우 인상적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들과 분위기를 저렇게 눈에 보이게, 그것도 아주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는 구나 라는 감탄이 들 정도로.. 무튼, 어제의 연극에서나 희곡에서나 맥베스의 마지막 그 대사는 정말로 멋지다. 인생이란 걸어다니는 그림자에 불과하다라니... 멋지다.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그 무대가 갖고 있던 현대적 의미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같이 보러 간 친구는 무대가 너무 산만하다고 했지만. 독특하게도 조명이 비추는 곳만을 무대라 설정하고 극을 진행한듯. 그러니까 보통 지금까지 우리들이 보아왔던 연극들에서는 관객들의 눈 앞에 보이는 무대의 전반이 극을 진행하는 무대였고 그 무대 위에서 배우가 연기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 무대의 뒷켠을 만들어 무대 위에서의 자신의 임무가 끝난 배우들은 다음 장면을 준비하기 위해 퇴장을 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내가 배웠던 연극이론에선 그것이 연극의 기본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 연극에서는 그 틀이 무너져 있었다. 조명이 드러나지 않은 암흑의 무대 위에서 배우들은 옷을 갈아입기도 하고(관객들의 입장에서는 다음 장면을 준비하는 그 움직임이 어색했지만 극 중에선 충분히 그 곳을 제 3의 연극 장소로 설정한 듯 했다) 다른 사람들의 연극을 보면서 서 있기도 했다.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기존의 무대가 가진 무대와 무대 밖의 세계에 존재하는 엄격한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의도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중반부에 쌩뚱맞게도 관객들에게 대화를 걸었던 배우의 연기 또한. 무대와 객석의 세계를 흩뜨리면서 관객들에게 혼란을 맛보여주기 위해 의도한 설정인 듯. 물론 그 대화의 상대로 지목된 사람이 함께 갔던 친구라 당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흥미로웠지만 말이다. 배우로 무대에 등장한 사람이 배우가 아닌 것처럼 (마치 진행되고 있는 쇼 중간에 쉬는 시간에 흐름을 끊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미리 준비한 바람잡이 역할처럼) 관객에게 대화를 걸었지만, 정작 관객들은 그 대화에 쉽게 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서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만드는 건 무대를 향한 관객의 딱딱하고도 오만한 시선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오만에는 절대 악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객석에 앉아 배우들의 연기를 어떤 잔치의 쇼를 보기 위한, 연극 속의 관객의 입장으로서 자신들을 연극에 참여하는 사람들 중 하나라고 여기기 보다는 배우들의 모습들을 단순히 보기 위한, 어찌보면 순수한 방관적 목도일 수도, 어찌보면 배우들의 연기를 팔짱끼고 바라보기에만 그치는 수동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오만이다. (물론 이 오만이라는 단어는 연극 자체에서 무대가 갖는 오만일 확률이 크다, 내 생각에는) 그렇지만 그 오만이 부정적이든 단순한 단어이든 간에 어느 누구도 객석의 오만을 탓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건 연극이 발생된 이후로 근래까지 있어왔던 연극이라는 한 장르의 한계의 일부이기에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단순히 경계가 있음과 흐트러짐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수동적인 관객들은 우스꽝스럽게 놀라면서도 신선함을 느낄 수 있으니, 그 시도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보러가면 종종 느끼는 것인데 그의 작품에는 적어도 3시간의 러닝타임이 필요한 것 같다. 어제 맥베스는 1시간 40분 짜리였는데, 짧은 시간 안에 모든 내용을 다 담은지라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보지 못하고 간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많이 버거웠을 것 같다. 배우들과 극이 흘러가는 전개의 속도가 너무 빠르고 허겁지겁이라 여운을 남길 수 있는 지점과 갈등의 중심점이 흐트러지면서 모호해진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던 것 같다.
2011년 1월 20일 목요일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살아가는 곳이라는 말을 납득하기까지 힘이 들었다. 저 말은 세상에 대한 이치와 도덕성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저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곧, 나는 비도덕적이며 불순한 인간임을 증명하는 듯 했기 때문이다. 사실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가슴이나 경험 혹은 무의식적인 마음으로 기억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자주 방문을 닫고 지내고 그렇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게도 생각이나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가족들은 나를 잘 알고 있다. 내가 그들의 귀에 부질없는 말을 잘 내뱉곤 한다는 사실을. 사실 나는 조금 억울하다. 내가 하는 모든 말들은 내가 옳고 당연하다고 생각한 지점에서 태어난 것인데 말이다. 그들의 머릿 속에 들어간 나의 말은 언제나 하나의 생각으로 받아들여지기 보다는, 어떤 시험의 답을 매기는 것처럼 정답이냐 아니냐에 무게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말은 그들에게 언제나 오답이다.
조금 답답한게 무엇이냐면. 나에게 오답이란 다수의 사람들이 행복하고 즐겁더라도 소수의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고통스러워하는 순간, 발생되는 어떤 불순한 원리이다. 그리고 그런 원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세상과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이런 세상의 오답을 너무 정확하게 찝어내기 때문에 나의 말들은 오답이라 생각하고 무조건적으로 반박한다. 한편으로 그들의 의도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아직 사회에 나가지 않은, 적어도 사회생활을 몇 년에서 몇 십년까지 해 온 그들보다 사회와 사회의 때를 잘 모르는 애송이이기 때문에 세상의 그릇됨을 더 적나라하게 발설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은 나를 위해 일찌감치 나의 의식을 고쳐주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도 사회에서 나이가 들고 머리가 더 무거워지면 변할까. 오답을 오답이라 말하지 않고서, 알면서도 그 사실을 숨기고 그저 나 혼자만 잘 살면 된다는 착각을 하게 될까. 변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지만, 오답을 오답이라 말하지 않는 건 정말 나쁜 짓인데 말이다. 이 세상은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라는 말을 믿기 어려웠던 배경에는, 누군가가 나를 걱정해주지 않아도 혹은 내가 누군가를 염려하지 않아도 나는 나 혼자 잘 살고 있다는 착각이 깃들여 있었다. 물론 생각은 그렇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 어느 누구도 혼자 방문을 닫고서 빛도 없고 창문도 없고 누군가와 소통할 구석도 없는 그런 골방에서 오래토록 지낼 수는 없다. 또한 처음보는 사람의 사고나 고통의 현장을 아무렇지 않은 듯 콧노래를 부르며 지나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와 연관되어 있지 않더라도 나는 누군가의 상황 감정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고 그 사람을 연민하기도 한다. 그것이 나와 모든 사람들 사이에 연결된 아주 가느다란 고리이다. 그 고리의 감정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다시는 누군가를 그냥 지나치거나 누군가를 가혹하게 만드는 세상의 오답을 무시하지 못할 것 같다. 시간이 흐르고 내가 나이가 먹어 지금의 우리 엄마 아빠의 나이가 되면 나는 변할지 모른다. 지금보다 욕을 잘하는 사람이 되어 있을 수도 있고, 괴팍한 성미를 이기지 못하고 매일같이 신경질을 부릴지도 모른다. 그렇더 하더라도 세상을 그늘을 돌아보고 오답을 오답이라고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입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한 끗만 잘 못 태어났어도 나는 지금 현재 있는 이 곳이 아닌 세상의 그늘진 지옥에서 누군가를 대신해 살아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세상사니까.
나는 자주 방문을 닫고 지내고 그렇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게도 생각이나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가족들은 나를 잘 알고 있다. 내가 그들의 귀에 부질없는 말을 잘 내뱉곤 한다는 사실을. 사실 나는 조금 억울하다. 내가 하는 모든 말들은 내가 옳고 당연하다고 생각한 지점에서 태어난 것인데 말이다. 그들의 머릿 속에 들어간 나의 말은 언제나 하나의 생각으로 받아들여지기 보다는, 어떤 시험의 답을 매기는 것처럼 정답이냐 아니냐에 무게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말은 그들에게 언제나 오답이다.
조금 답답한게 무엇이냐면. 나에게 오답이란 다수의 사람들이 행복하고 즐겁더라도 소수의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고통스러워하는 순간, 발생되는 어떤 불순한 원리이다. 그리고 그런 원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세상과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이런 세상의 오답을 너무 정확하게 찝어내기 때문에 나의 말들은 오답이라 생각하고 무조건적으로 반박한다. 한편으로 그들의 의도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아직 사회에 나가지 않은, 적어도 사회생활을 몇 년에서 몇 십년까지 해 온 그들보다 사회와 사회의 때를 잘 모르는 애송이이기 때문에 세상의 그릇됨을 더 적나라하게 발설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은 나를 위해 일찌감치 나의 의식을 고쳐주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도 사회에서 나이가 들고 머리가 더 무거워지면 변할까. 오답을 오답이라 말하지 않고서, 알면서도 그 사실을 숨기고 그저 나 혼자만 잘 살면 된다는 착각을 하게 될까. 변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지만, 오답을 오답이라 말하지 않는 건 정말 나쁜 짓인데 말이다. 이 세상은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라는 말을 믿기 어려웠던 배경에는, 누군가가 나를 걱정해주지 않아도 혹은 내가 누군가를 염려하지 않아도 나는 나 혼자 잘 살고 있다는 착각이 깃들여 있었다. 물론 생각은 그렇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 어느 누구도 혼자 방문을 닫고서 빛도 없고 창문도 없고 누군가와 소통할 구석도 없는 그런 골방에서 오래토록 지낼 수는 없다. 또한 처음보는 사람의 사고나 고통의 현장을 아무렇지 않은 듯 콧노래를 부르며 지나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와 연관되어 있지 않더라도 나는 누군가의 상황 감정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고 그 사람을 연민하기도 한다. 그것이 나와 모든 사람들 사이에 연결된 아주 가느다란 고리이다. 그 고리의 감정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다시는 누군가를 그냥 지나치거나 누군가를 가혹하게 만드는 세상의 오답을 무시하지 못할 것 같다. 시간이 흐르고 내가 나이가 먹어 지금의 우리 엄마 아빠의 나이가 되면 나는 변할지 모른다. 지금보다 욕을 잘하는 사람이 되어 있을 수도 있고, 괴팍한 성미를 이기지 못하고 매일같이 신경질을 부릴지도 모른다. 그렇더 하더라도 세상을 그늘을 돌아보고 오답을 오답이라고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입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한 끗만 잘 못 태어났어도 나는 지금 현재 있는 이 곳이 아닌 세상의 그늘진 지옥에서 누군가를 대신해 살아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세상사니까.
2011년 1월 14일 금요일
친구들은 연락이 뜸해진 나에게 자주 물어온다. 요즘 뭐하고 살아. 그냥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대답하면서도 머쓱해진다. 아, 나 너무 잉여스럽게 살아가는건가 싶은 생각에. 여유로운 생활을 지향했던 때가 있었는데, 요즘은 그 여유가 조금 부끄럽게 느껴진다. 반드시 이뤄야하는 임무가 생겨서 그런가?
미국의 소설가 겸 극작가인 베티 스미스가 지은 '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 이란 책을 읽으며 희망의 근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했었다. 일전의 나는 희망의 근원은 미래에 있기 때문에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희망은 사치이며 허세에 불과하다고 여겼었다. 희망을 가지라는 말은 나에게 도리어 삶의 뒷편으로 한 걸음 퇴보하라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책 속의 주인공 프랜시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희망이란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타고나는 인간 내재적인 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였다. 마치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에게 신이 붙여주는 일종의 부적같은. 차가운 바닷가에 널려있는 미끈하고도 딱딱한 자갈의 표면같은 껍질 속에 갇혀 있는 희망. 마음 속 아주 깊은 곳에서 죽은 듯 잠자고 있는 희망을 흔들어 깨운 자들은 희망의 행복 안에서 즐겁게 살아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은 아주 아주 슬프게 살아갈 것이다. 그런 생각까지 하고 나니, 어쩔 수 없이 살아가기는 하지만 절망과 외로움 속에서 아주 아주 슬프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인생의 목표 하나가 더 생겨버렸다. 헌신이라기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선 상에서 아주 사소한 일일지라도 그들을 위하고 함께 할 수 있도록, 언제나 그들을 향한 나의 이런 마음을 잊지 않고서 살아가고 싶다.
영화를 보고 책을 읽은 것 외에도, 자기 소개서와 학업 계획서를 쓰고 있었다. 나를 뒤돌아보고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최선의 선택과 어떤 목표를 향해 달렸던 것 같은데 다시 돌아보니 그 시간들을 어쩜 그렇게도 허무하고 초라하게 보낸건지, 한편으로 많은 후회를 했다. 나를 위하고, 나에게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결정했던 선택들이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도피와 어렸던 마음이 뒤섞여 혼란 아닌 혼란 속에서 앞, 뒤 없이 충동적으로 결정했던 선택들도 있었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하지만 그 덕분에 지금의 나는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하는 것인지에 대한 시작점이 명확해졌다. 이제 다시는 나를 위한 모든 선택들과 임무들 앞에서 피하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라는 말을 다시는 잊지 말아야지. 지금 이 시간과 선택들도 몇 년이 지나 다시 돌아본다면, 많이 미숙하고 어리석었던 결정이었다고 나의 부족함을 탓하고 후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언제나 선택은 어렵고 신중했다는 점을 귀하게 여긴다면 그 후회 또한 나의 인생 중의 하나였다고 너그러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지치고 자괴감이 넘치는 글을 쓰고 있노라면 나 또한 힘이 쭉 빠진다. 하지만 어쩌겠나, 그런 과정이 있어야 발전도 있는 법이니. 2011년의 시작은 생각보다 꽤나 무겁다. 진솔한 사람이 되어야지.
미국의 소설가 겸 극작가인 베티 스미스가 지은 '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 이란 책을 읽으며 희망의 근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했었다. 일전의 나는 희망의 근원은 미래에 있기 때문에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희망은 사치이며 허세에 불과하다고 여겼었다. 희망을 가지라는 말은 나에게 도리어 삶의 뒷편으로 한 걸음 퇴보하라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책 속의 주인공 프랜시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희망이란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타고나는 인간 내재적인 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였다. 마치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에게 신이 붙여주는 일종의 부적같은. 차가운 바닷가에 널려있는 미끈하고도 딱딱한 자갈의 표면같은 껍질 속에 갇혀 있는 희망. 마음 속 아주 깊은 곳에서 죽은 듯 잠자고 있는 희망을 흔들어 깨운 자들은 희망의 행복 안에서 즐겁게 살아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은 아주 아주 슬프게 살아갈 것이다. 그런 생각까지 하고 나니, 어쩔 수 없이 살아가기는 하지만 절망과 외로움 속에서 아주 아주 슬프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인생의 목표 하나가 더 생겨버렸다. 헌신이라기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선 상에서 아주 사소한 일일지라도 그들을 위하고 함께 할 수 있도록, 언제나 그들을 향한 나의 이런 마음을 잊지 않고서 살아가고 싶다.
영화를 보고 책을 읽은 것 외에도, 자기 소개서와 학업 계획서를 쓰고 있었다. 나를 뒤돌아보고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최선의 선택과 어떤 목표를 향해 달렸던 것 같은데 다시 돌아보니 그 시간들을 어쩜 그렇게도 허무하고 초라하게 보낸건지, 한편으로 많은 후회를 했다. 나를 위하고, 나에게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결정했던 선택들이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도피와 어렸던 마음이 뒤섞여 혼란 아닌 혼란 속에서 앞, 뒤 없이 충동적으로 결정했던 선택들도 있었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하지만 그 덕분에 지금의 나는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하는 것인지에 대한 시작점이 명확해졌다. 이제 다시는 나를 위한 모든 선택들과 임무들 앞에서 피하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라는 말을 다시는 잊지 말아야지. 지금 이 시간과 선택들도 몇 년이 지나 다시 돌아본다면, 많이 미숙하고 어리석었던 결정이었다고 나의 부족함을 탓하고 후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언제나 선택은 어렵고 신중했다는 점을 귀하게 여긴다면 그 후회 또한 나의 인생 중의 하나였다고 너그러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지치고 자괴감이 넘치는 글을 쓰고 있노라면 나 또한 힘이 쭉 빠진다. 하지만 어쩌겠나, 그런 과정이 있어야 발전도 있는 법이니. 2011년의 시작은 생각보다 꽤나 무겁다. 진솔한 사람이 되어야지.
2011년 1월 5일 수요일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으면서 마음에 드는 구절들을 표시해 두었었다. 노트에 손으로 직접 적으려다가 방대한 양에 할 수 없이 오늘 아침에 워드로 옮겼다. 작년에 그의 또 다른 책인 농담을 읽으면서 흥미로웠지만 얼마 읽지 못하고 도서관에 반납한 기억이 난다. 일단 읽기가 무척이나 어려웠었다. 휴식을 취하고 싶어 들었던 책에서 도리어 정신적 피로를 느꼈으니 말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으면서도 나는 틈틈히 쉬어야 했고, 도저히 두뇌회전이 이루어 지지 않는 날에는 덮을 수 밖에 없었다. 그의 문체나 책의 특성이라기보다는 그의 문장을 그가 말하고자 하는 인상으로 해독하여 읽고자 했던 나의 욕구이자 욕심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말하면 과장이겠지만, 그의 문장 속에서 나는 수면 아래로 숨어 있는 나를 바라볼 수 있었다. 나를 표출하기보다는 나의 내밀성을 타인들이 눈치채지 않도록 지켜야한다는 강박 속에서 어느 하나도 유연하게 움직일 수 없었던 나의 속 알맹이를 그가 발라주었다고 해도 그건 과언이 아니다.
이분법을 이렇게나 멋지게 흐트러 놓을 수 있는 건가 싶었다.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잡을 수 없는 인생의 시계를 가벼움이라 칭하고, 또 그것을 무거움이라 말할 수 있는 그의 언변과 걷잡을 수 없이 넓어 고독이 절로 흘러나오는 그의 사상에 부러움을 느꼈다. 인생과 사랑과 역사. 모두가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한 번의 선택만이 존중받을 수 있는, 가벼운 것들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가볍기 때문에 지나가고 나면 언제나 무거움이 남는다. (책을 읽은지가 몇 일이나 지나서, 책의 완전한 내용이나 그가 말하고자 했던 말들이 완벽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단지 그 속에서 그와 내가 교감했던 인상정도만이 남아있을 뿐.)
사실 이분법이 나에게 가져다 준 강박은 실로 대단했다. 검은 것은 두렵고, 무섭고, 추악한 것이며 흰 것은 아름답고, 순결하고, 순수하다. 거짓말은 언제나 누군가를 아프게 하고, 불신적이며, 비도덕적이다 하지만 진실은 흰색이 보여주는 상징만큼이나 고결하고, 숭고하며 거짓말이 만들어내는 세상의 위배들을 청결하게 해 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당연하게 자리잡은 편견같은 이분법을 나는 증오했었다. 거짓말이 추악하다는 사람들의 말에 거짓말은 진실보다 아름답다는 말을 하고 싶었고, 검은 것은 악마이며 흰 것을 천사라고 말하는 자들의 입에 그들의 눈에 비친 검은색의 추악함보다 더 검고 끈적한 액체를 뿌려주고 싶었다. 나의 귀에 들린 그들의 입에는 그들만의 이분법이 우월적인 편견으로 내려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꼭 그래야만 한다는, 그들의 고집을 기어이 엎고 싶었지만, 나에게는 그만한 요량이 없었다. 아니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그들의 비위를 마춰주기 위해 그렇다고 대답을 해 왔던 내 안의 나를 밀란 쿤데라의 유연성을 통해 끄집어 낼 수 있었다.
정신적인 자유 속에서 미끄러지듯 유연하게 헤엄치고 있는 그의 움직임이 부럽다.
이분법을 이렇게나 멋지게 흐트러 놓을 수 있는 건가 싶었다.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잡을 수 없는 인생의 시계를 가벼움이라 칭하고, 또 그것을 무거움이라 말할 수 있는 그의 언변과 걷잡을 수 없이 넓어 고독이 절로 흘러나오는 그의 사상에 부러움을 느꼈다. 인생과 사랑과 역사. 모두가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한 번의 선택만이 존중받을 수 있는, 가벼운 것들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가볍기 때문에 지나가고 나면 언제나 무거움이 남는다. (책을 읽은지가 몇 일이나 지나서, 책의 완전한 내용이나 그가 말하고자 했던 말들이 완벽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단지 그 속에서 그와 내가 교감했던 인상정도만이 남아있을 뿐.)
사실 이분법이 나에게 가져다 준 강박은 실로 대단했다. 검은 것은 두렵고, 무섭고, 추악한 것이며 흰 것은 아름답고, 순결하고, 순수하다. 거짓말은 언제나 누군가를 아프게 하고, 불신적이며, 비도덕적이다 하지만 진실은 흰색이 보여주는 상징만큼이나 고결하고, 숭고하며 거짓말이 만들어내는 세상의 위배들을 청결하게 해 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당연하게 자리잡은 편견같은 이분법을 나는 증오했었다. 거짓말이 추악하다는 사람들의 말에 거짓말은 진실보다 아름답다는 말을 하고 싶었고, 검은 것은 악마이며 흰 것을 천사라고 말하는 자들의 입에 그들의 눈에 비친 검은색의 추악함보다 더 검고 끈적한 액체를 뿌려주고 싶었다. 나의 귀에 들린 그들의 입에는 그들만의 이분법이 우월적인 편견으로 내려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꼭 그래야만 한다는, 그들의 고집을 기어이 엎고 싶었지만, 나에게는 그만한 요량이 없었다. 아니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그들의 비위를 마춰주기 위해 그렇다고 대답을 해 왔던 내 안의 나를 밀란 쿤데라의 유연성을 통해 끄집어 낼 수 있었다.
정신적인 자유 속에서 미끄러지듯 유연하게 헤엄치고 있는 그의 움직임이 부럽다.
2011년 1월 1일 토요일
새로운 시간의 장막이 오른다. 어제 밤에 엄마와 단촐하게 (과일 음료와 다름 없는, 아직 어린 맛의) 와인을 마시면서 텔레비전으로 제야의 종소리를 듣고 있었다. 우리는 굉장히 시니컬하게 내일은 똑같은 내일이고 오늘은 똑같은 오늘인데 뭘 저렇게 다들 호들갑인가, 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근데 막상 오늘이 다가오고, 핸드폰의 날짜가 2011년 1월 1일을 가르키고, 아침 알람 또한 2011년 1월 1일 이라 정확하게 말을 하며 나를 깨우니, 이거 뭔가 기분이 심상치 않다. 어제와 같은 어제는 지나갔지만, 오늘은 정녕 어제와 같은 오늘이 아닌 것만 같은 기분이다. 새해만 되면 늘 그렇듯 무엇이든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는 궁색한 다짐은 하지 않으려 했건만, 도저히 그러지 않고서는 오늘이 지나가지 않을 것만 같다. 그래서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시간들과 다짐으로 다음 무대를 준비하려 한다. 새로운 시간의 장막이 오른다. 설레이기보다는 떨리고, 불확실과 불안정한 마음에 온통 적적함이 가득하지만, 열심히 잘 해내보고 싶다. 모두들 화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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