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30일 목요일

복효근 시인의 '목련꽃 브라자' 라는 시를 읽으며, 나는 벌거벗은 샐리 만의 사진을 떠올렸다. 그녀의 사진이 벌거벗었다고 표현한 까닭에는 그녀가 그녀 사진의 피사체로 벗거벗은 자신의 아이들의 몸을 삼았다는 점에도 의미가 있지만, 그보다 더 큰 바탕에는 그녀의 사진이 보기에 불편함을 느낄 정도로 벌거벗은 사실과 진실을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사진이 그녀의 시각을 빌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철저히 자신의 주관적 시각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 같다. (적어도 그녀가 자신의 사진에 표현한 의미들을 보면) 아이들의 삶과 성장과정은 우리가 여겼던 것 만큼 평화롭지 않다고 그녀는 말한다. 때론 찬바람이, 때론 폭풍우가 몰아쳐 갈등과 화해와 부끄러움 등 나열할 수도 없을만큼의 감정들이 드러난, 있는 그대로의 아이들의 성장을 표현한 그녀의 사진들. 나는 그녀의 사진 속의 날 것의 느낌을 복효근의 시 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복효근의 시는 샐리만의 사진과는 달리 여자라는 존재를 수치스럽게 하는 무엇이 있다. 그의 시에는 객관성이 상실되어 있기 때문이다. 남자의 시각에서 여성을 바라보는 것과 여성의 아름다움을 (자신의 딸의 사춘기를) 목련꽃으로 비유했다는 점, 그리고 여성의 속옷을 훔쳐보며 여성의 아름다움을 드러냈다는 그 불순해 보이는 과정이 나에게는 퍽이나 불쾌하게 다가왔다. 어쩌면 그 모든 불쾌함의 근원은 훔쳐보았다는 시각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여성의 사춘기를 진실로 표현하기 보다는 남성의 시각에 비친, 어느 정도의 환상성을 가미한 주관적인 시각에서 말을 했다는 점 또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처음에는 샐리만의 사진과 복효근 시인의 시가 은밀한 것을 드러내기에 일맥상통한 작품들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을 하면 할 수록, 그 둘은 확연히 다른 작품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둘은 시각적 본질이 다르다. 샐리 만은 자신만의 시각에서 벗어나 아이들의 삶을 진실 그대로 바라보려고 했지만, 복효근 시인은 아버지의 입장에서 (그리고 남자의 입장에서) 부끄러운 여성의 사춘기를 아름답게 드러내고 미화한다. 복효근의 시가 여성의 사춘기를 미화하고 싶지 않은 나에게는 불순하게 다가오지만, 감히 그의 시가 공공연한 불순함을 담고 있다고 말하진 않겠다. 모든 것이 시각의 본질에서 비롯되는 차이이고 감상이니까. 나는 개인적으로 아름답게 바라보기보다는 드러내려하는 샐리 만의 사진들이 더 마음에 든다.

2010년 12월 24일 금요일

그들이 사는 세상

전전긍긍한 끝에 모두 볼 수 있었다. 매일 한 두편씩 꼬박 꼬박, 하루의 일기를 쓰듯이, 하루를 시작하듯이 일주일동안 꾸준히 봤었다. 노희경의 드라마는 언제나 어렵다. 하지만 이 어렵다는 말은 결코 해석의 문제가 아닌 심리적인 문제에서 비롯된다. 그녀의 드라마를 꼼짝않고 보기에 마음이 너무 불편해져 제대로 볼 수가 없다. 깊은 눈으로 바라보면 가슴이 아프고, 얕은 눈으로 바라보면 그녀가 만들어 놓은 호흡을 그대로 흡입하기가 힘든 까닭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이 사는 세상은 어른들이 하기 힘든 고백들의 나열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다. 드라마 속의 누군가는 드러내기 힘들었던 가족의 상처를 까발려야 했으며, 누군가는 자존심때문에 자신의 말을 지키지 못하는 겁쟁이가 되었으며,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일평생을 기다렸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서로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선 포기해야할 줄도 알아야함을 알게 되었다. 드라마처럼 살아라, 라고 말을 하지만, 정작 이 드라마는 너무 아프다. 그 아픔이 현실과 직결된 아픔이기에 추스르는 것도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드라마는 말한다. 쉽게 상처받은만큼 쉽게 일어서라고. 어쩌면 드라마처럼 산다는 건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의 인생이 드라마이고, 드라마가 곧 우리의 인생이라는 말, 그건 빛이 나고 화려한 삶이기에 드라마로 태어날 수 있다는 말이 아닌 깨어지고 아프고 슬픈 일들이 있다하더라도 그 속에 숨어있는 희망과 삶의 연장이 가장 아름답고 멋지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드라마처럼 살 수 있다는 말이 아닐까. 아픔을 고백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드라마에서 내 인생이 가질 수 없는 대단한 무언가를 대리만족하고자 하는 시청자들의 입맛에서는 특히나 쉽지 않다. 정말 우리에게 인생이 뭘까, 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나는 그저 행복하고 즐겁게만 살고 싶었다. 그래서 아직 한번도 진심으로 말한 적이 없는 나의 상처들과 아픔들을 마음 속 저 먼 곳에 숨겨두고는, 그 동안의 나는 무책임하게 많이도 떠돌아 다녔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그러지 말아야겠다. 나의 인생에게 진실로 물어보아야겠다. 정말 너에게 아픈 것은 무엇이냐고. 또 행복은 무엇이냐고. 어두컴컴한 지하실에 꽁꽁 숨겨 놓아, 있는 줄도 몰랐던 상처들과 기억들이 너의 행복의 실체냐고.

2010년 12월 22일 수요일

문득 이 말을 해야겠다 싶은 기분에 (어쩌면 홧김에) 엄마에게 담아두고 있었던 모든 말들을 쏟아부었다. 중학생 때, 형편에도 맞지 않는 플룻을 전공하고 싶다며 엄마에게 득달같이 달려들며 싸운 이후로 처음이었다. 엄마가 하고 있는 말의 옆구리들을 마구 잘라가며 순화하지 않고서 했던 나의 말이 엄마에게 그리 큰 상처가 되리라는 생각을 그 땐 미처 하지 못했었다.

아직 잘 모르겠다. 말을 숨겨야 할 때와 애써 말을 끄집어 내야 할 때를. 나는 지금껏 너무나도 많은 말들과 감정들을 숨겨왔고, 그랬기 때문에 의도치 않게 많은 인연들과 끝을 맺어야만 했고, 자존심에 말하지 못했지만 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던 인연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자학으로 변질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었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꼭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부분이었는데, 결국 그 끝이 변질되기는 다를 것이 없어졌다. 아니, 엄마의 상처까지 들쑤셔가며 장난질을 한 셈이 되어버렸기에 어쩌면 혼자 참고 넘기는 것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알게 된 점은, 뭔가에 홀린 듯 득달같이 말을 쏟아내고 돌아보니 내가 화를 낼 이유가 아주 불충분했으며, 아마 이 말을 하지 않고 엄마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나는 평생 이 싸움의 원인이 엄마라고 단정했을 것이다. 나는 나에게만 서운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억울했다. 오늘, 하필이면 오늘 엄마에게 말을 해야만 했던 이유는 어쩌면 나 혼자 억울하기 싫어서 였을지도 모른다. 혼자 속상하기 싫어서 엄마를 끌어당긴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보면 나는 무진장 이기적인 아이였다.

둘 이상의 관계에서 가장 힘든 것이 화해라고 생각했다. 화해가 이루어지기 직전의 사건이 싸움이니까. 누군가와 싸운다는 것이 무섭고 두려웠다. 상대를 이해하지 못한 나의 무능과 관계의 진정성을 의심해보는 일이기도 하기에.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고 숱한 관계를 해야만 하는 입장에 처해지고, 그렇게 점점 관계를 또렷이 바라볼 수록 대화와 싸움보다 더 무서운 것은 단절이고 무관심이라는 걸 절실하게 느껴간다.

2010년 12월 20일 월요일

어젯밤 김기덕 감독의 소식을 들었다. 시험기간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기 위해 시간을 뚫고 갔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그 영화 이후로 그의 영화를 볼 수 없었다. 제자들의 영화를 후원하고 독려해주느라 자신의 영화를 조금 늦추는가보다 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는데, 그가 그런 일을 겪어 영화일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는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시네마테크에서 하는 시나리오 수업을 들었을 때, 현직 작가 선생님이 오셔서 영화판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해주셨는데 영화판은 사람의 정과 인맥에 따라 많은 것들이 좌지우지된다했던 그 말이 유독 어젯밤에 쟁쟁하게 들렸다. 돈도 되지 않고(모든 스탭들에게) 일은 매일 밤잠을 설쳐가며 해야하고 하나의 뜻을 위해 처절할 정도로 개인들의 시간과 육체가 희생되어야 하는 일이기에 사람의 정 없이는 그 힘든 노동을 견딜 수 없다는게 그의 말이었다.

그렇기에 김기덕 감독이 잃은 것은 단순히 믿었던 제자와 PD뿐만이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의 영화를 좋아했던 한 사람으로써 그가 지금의 이 시간들을 잘 견뎌주어, 다시 그의 영화를 볼 수 있었으면 한다.

2010년 12월 17일 금요일

사진을 찍는 일은 평생 하고 싶다. 늙어 백발의 노인이 되서라도 사진기를 가지고 다니고 싶다. 한가지 더 꿈을 품는다면 필름 사진기를 그 순간까지도 사용하고 싶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모두가 편리함을 쫓아간다 하더라도 나는 필름 사진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조금 성숙해지고서는 영화나 드라마를 찍고 싶다. 드라마 장르의 영화도 좋다. 하지만 영화관이 아닌 모두가 자신의 안식처에서 안정된 마음으로 볼 수 있는 텔레비전이 그 통로가 되어주면 더 좋을 것 같다. 어릴 적, 나의 유일한 말동무였고 나의 기억 전반을 차지한다해도 과언이 아닌 텔레비전의 긍정적인 의미와 가치를 나의 언어로 만인에게 보여주고 싶다.



또한 글을 쓰고 싶다. 하지만 전업 글쟁이가 되라한다면, 나는 조금 자신이 없어진다. 아직 나에게는 많은 글을 다양하게 쓸만큼의 재량이 없다는 것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글을 읽고 쓰는 일에 내 하루 전부를 쏟아부음에 행복함을 느낄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래서 이번 방학동안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 이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글을 잘 쓰고 싶고, 내가 원하는 바를 선예하게 잘 표현하고 싶다. 욕심이 생기고 그것을 연장하고픈 욕구야말로 어떤 일을 함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이 마음이 글쟁이가 되기 위한 중요한 시발점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영상을 만들기 이전에 나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경험이 아닌가 싶다. 요즘 내가 감정불능자라는 생각이 자주 든다. 처음 언뜻 들었던 생각이 고민이 되고 고민이 점차 깊어지게 되면 그게 기정 사실처럼 (이를 테면, 나의 꼬리표처럼) 나를 따라다닐텐데. 내가 나 자신을 감정불능자라고 자주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자체가 조금은 쓸쓸한 일인 것 같다. 그래서 어쩌면 모든 일 앞에서 자신감을 잃어가는 건지도.



무엇보다 성취감을 느끼고 싶다. 그것이 처음부터 내가 예정해둔 나의 목표에 닿아 얻는 감흥이라면 더할 나위도 없이 기쁠 것 같다.

2010년 12월 10일 금요일

세번째 시험을 치고 돌아왔다. 기분은 나름 가뿐하다. 신나는 노래를 찾아 듣고 있다. 그리고 다음주에 있을 영미문화 시험에 대한 생각들도 하고 있다. 지금까지 봤던 영화들의 주인공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인데, 그 주인공을 통해 감독이 전하고자 했던 메세지를 중심으로 쓰면된다. 뭐, 그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두번째 문제인데.. 내가 영화를 만든다면 어떤 캐릭터를 만들 것이며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이냐에 관한 것인데, 너무 많은 생각들이 스쳐가기만 하고 제대로된 틀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머릿 속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이미지 하나가 있다.
늙은 주름이 느슨하게 번져있는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탐욕스러운 빛의 보석반지. 둘 중의 하나는 악다구니를 쓰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었다. 그것이 반지를 끼고 있는 늙은 손인지, 늙은 손에 끼워져 있는 빛나던 보석 반지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둘 중의 하나는 악다구니를 쓰고 있었다. 늙어가는 여자와 추해진다는 진실 앞에서 악다구니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손을 통해서 나의 엄마를 떠올리고 있었다. 엄마를 통해 바라본 세상의, 시야란 그랬던 것이다. 늙어도 여자는 여자여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고, 팔자 편한 여자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 친구들의 모임을 앞두고는 과한 악세사리와 치장으로 자신을 감싸고서야 마음이 편한 표정을 짓고 계셨다. 비단 그건 우리 엄마만의 여자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여자이기에 더 신경 써야하는 것들이 많고, 여자이기에 아름다워야 하며, 아름답게 늙어야 한다는 그 어떤 강박과도 같은 말들 속에서 진짜 여자는 죽어가고 있는 현실이 싫었다. 가장 자신스럽게 멋지게 늙어야지, 허울만 호사스럽게 늙는 것이 과연 인생에 대해 어떤 의미를 담을 수 있을까? 내일은 오늘보다 더 화려한 반지를 끼고 알이 더 굵은 진주목걸이를 하고 다닌다고 해서 그가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2010년 12월 6일 월요일

시험기간이 되면 항상 생각하게 되는, 이 시험이 나에게 주는 가치는 무엇이며 이 시험은 나의 개인적인 시간을 투자할 만큼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 에 대한 고민들은 역시나 이번 시험기간에도 나를 찾아왔다. 이번만큼은 저 물음 앞에 멍청하게 당황스러워하지 않겠다는 심보로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나도 그 답을 찾고 싶었다. 또, 내가 다시 돌아갔던 학교와 내 손으로 직접 (충동적인 성격이 다소 깃들여져 있는) 선택했던 것들에 대한 결과가 나에게 어떤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사실 나는 이번 학기동안 이 고민에 대한 총체적인 답변이나, 혹은 답변이 아니더라도 아직 사라지지 않은 나의 불확실함의 원인을 알고자 일부러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가졌었다.)



하고 싶어서 하고, 하기 싫으니까 안할꺼야, 라고 말하던 적이 엊그제였는데. 나의 앞날엔 분명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들과 하기 싫은데도 해야할 일들이 태반일 것 같아서 문득 겁이 났었다. (선생님도 그러셨었다. 하고 싶은 일 한가지를 하기 위해서는 하기 싫은 일 열가지를 해야한다고) 하기 싫은 일을 할 때에는 하고 싶은 일을 할 때보다 열배의 에너지가 더 소모되고, 그렇기때문에 정작 하고 싶은 일들도 제대로 마무리 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런 일들을 종종 겪을 때마다 얼마나 서러운지 모른다. 여러 과목들이 한데 뒤섞여 있는 시험기간 또한 그런 경우와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그것들은 내가 선택한 것들이고, 이번 학기 동안 내가 걸어왔던 길들을 정리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이 과목들 앞에서 내가 감히 한다, 안한다 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기 싫은 것들은 왜 하기 싫은 것인지, 그럼 거기서 내가 바라는 가치와 방향은 무엇인지, 나는 어떻게 행동을 해야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는 과정과 거기에 대한 적정선을 그을 줄 아는 판단이 필요하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그래야 섣부르게 무언가를 포기하는 오만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마음 속에 키우고 있으며, 또 키우고 싶은 화분들에게 특별히 더 많은 물을 주기로 했다. 그리고 매일 바라보며 건강하게 자라라는 사랑의 눈빛도 다른 것들에게보다 더 진하게 주기로 했다. 내가 이번 학기를 통해 얻은 한가지.

2010년 12월 1일 수요일

이번 중급영작문 기말시험은 30분동안 하나의 paragraph를 완성하는 것이다. 내가 살고 싶은 곳에 대한 글을 연습하기 위해 핀란드에 대한 조사를 하고 있는 중인데, 핀란드의 교육법을 알고 나니 속이 울렁거린다. 지식채널e에서 방영한 핀란드 교육에 관한 내용과 대한민국 초딩이 살아가는 법을 두편 연달아 봤더니 현기증과 함께 울렁거림이 멈추질 않는다. 핀란드의 교육법이 부럽다, 대단하다 라는 생각을 함과 동시에, 아이들을 무참하게 짓밟는 우리나라의 교육법을 보며 왜 이렇게 아파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사람을 죽이고 가르침을 전파하려는게 도대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교육인지, 과연 우리나라의 교육자들은 자각하고나 있을까. 그들이 생각하는 참된 교육은 무엇이며, 어떤 가르침과 경험을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은지 단 1초라도 고민해 보았을까. 불안정한 고용으로 공무원이 최고의 직업이라 여겨지는 요즘, 특히나 매년 치뤄지는 임용고시에 그렇게나 목을 매는 사람들 중 진정으로 교육을 고민하고 꿈꾸는 자가 몇이나 되나 물어보고 싶다. 자신이 진짜 교육자라면 그렇게 쉽게 교육을 말하고, 단순히 돈을 버는 직업이기에 선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숭고해야한다. 왜냐하면 아이들의 두 눈이 향하는 곳이 바로 교실 한 가운데의 그들이고, 그들의 입이고, 그들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잘 가르치는 선생보다 아이들 마음을 잘 헤아릴 줄 아는 선생이 낫고, 모든 아이들에게 보란듯이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아이에게 상으로 사탕을 건내는 선생보다 모두에게 수고했다고 사탕을 건내 줄 줄 아는 선생이 백번 낫다. 선생이, 특히나 초등학교 선생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아이들의 인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기억엔 슬프게도 좋았던 스승이 단 한분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선생의 개인적 기분상태로 인해 이유없이 맞았던 기억,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만 교단 앞으로 불러 칭찬을 해줬던 기억, 저마다의 다른 생각들이 저마다 옳은 것이 아닌 답안지에 나와있는 답만이 옳다며 나에게 핀잔을 줬던 선생의 표정, 뒷돈을 받으며 특정 아이를 예뻐라 했던 선생, 학생들에겐 아주 관심이 없던, 우리들조차 그의 무관심에 익숙했던 교실 만이 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나에게 스승과 관련된 좋은 기억이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나는 내가 받아왔던 대한민국 교육에 많은 증오를 가지고 있고, 사실 미래의 직업을 위해 선생이 되고프다는 대학생들과 임용고시 준비생들을 경멸한다. 선생이 직업이기도 하지만, 선생이 되려는 사람이면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자신들이 가질 직업은 단순한 돈벌이가 아닌 '숭고함' 이란 사실이다.

나는 단 한번도 탈선을 해본 적이 없는 아이이고, 반항도 하지 않았던, 대한민국 어느 교실에서나 가장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아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기억 속의 선생이란게 다 저런 그림이라는 사실이 참으로 슬프지 않나 싶다.

하지만 지식채널 e의 핀란드 교육편과 대한민국 초딩편을 보면서 내 아이를 핀란드에서 교육시키고 싶다는 생각은 눈꼽만큼도 들지 않았다. 단지 대한민국의 교육을 바꾸는데 하루빨리 나의 힘을 동조하고픈 생각 뿐이었다. 대한민국 모든 아이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2010년 11월 25일 목요일

지금은 모든 것이 정지상태이다. 멈춰있다. 왜 이렇게 마음이 열리지 않는 거지? 꽁꽁 닫혀있다. 원인도 없었고 지금의 상태에 대한 정확한 진단도 내릴 수가 없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고, 아무런 글도 적고 싶지 않다.

2010년 11월 19일 금요일

그녀의 말과 그녀의 마음을 인용하여 말한다. 바닷가 근처에서 연을 날리고 있는 아저씨를 보며. 그래도 아저씨는 용기가 꽤 많은 사람이예요, 연을 날리고 있잖아요. 연은 멀리 멀리 솟아, 하늘 저 끝까지 달아나 있었다. 연을 이리 저리 감는 아저씨의 손은 느긋했고, 덩달아 연의 움직임도 느긋하고 느긋했다. 따뜻한 겨울의 바람 한 가운데에 서 있었던 바다. 그리고 아저씨의 연. 그 둘의 조화를 보며 나는 얼마나 뜨겁게 울었었는지 모른다. 오늘 아침 지하철 안에서 비정상적으로 많이, 그리고 심하게 웃고 있는 아이를 보았었다. 사실 아이라고 하기엔 큰 어른이었고 어른이라고 하기엔 그의 행동엔 세상에 때묻지 않은 천부적인 어떤 성질이 있었다. 그래서 난 그 사람의 커다랗고 두꺼운 어깨를 아이의 어깨라 생각하고 있었다. 무튼, 그 사람은 지하철을 처음 타기 시작했을 때부터 내리는 순간까지 웃음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멈출 수 없는 웃음이었던 것 같다. 그를 제외한 지하철 안의 모든 사람들은 웃지 않고 있었다. 사람들의 멈춘 웃음이 모두 그에게서 옮아간 양, 우리는 그가 방방 거리고 지하철 안을 웃으며 돌아다니는 모습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마치 그가 투명인간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고 있었다. 나는 그를 보며 저렇게 미친 듯이 웃다가 언젠간 빵 터져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막연히 하고 있었고, 빵 터질지도 모른다고 떠올렸던 무의식의 생각이 나의 본심이고 현재의 내 모습이라는 예감이 들어 울쩍해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오늘 바다를 보는 일은 간절했고 중요했다. 덕분에 떠난 그 곳에서 노란 유아복을 입고서 소풍을 나온 아이들을 만났고, 하늘을 둥둥 날아다니는 연을 보며 나는 덜 괴로울 수 있었고, 또 까만 파도 소리를 들으며 다시 숨을 쉴 수 있었다. 노곤한 잠이 쏟아진다. 잠과 시간은 함께 온다. 잠은 순수하지만 시간은 불순해 많은 감정들과 생각들을 함께 몰고 온다. 불행하게도 불길하거나 찜찜한 기분 또한 시간과 함께 잠을 찾아 온다. 찜찜한 잠을 청했었던 어제의 밤과 그 언젠가의 밤들이 머릿 속을 둥실 한다. 나는 속이 헛헛해져옴을 느꼈고 또 비어있는 잠 속에서 두꺼운 하루라는 껍질을 헤매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정말 노곤한 잠을 잘 수 있을 것만 같다. 두 손은 차갑지만 속은 따뜻하다.

2010년 11월 14일 일요일

무기여 잘 있거라

헤밍웨이의 원작이자 1930년대에 영화화되어 만들어진 고전영화을 보았다. 물론 학교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전쟁영화는 장르를 불문하고 질색을 하기에 제목만 듣고서도 아주 달갑지 않았었다. 감상문을 써야하는데 이거 이거 집중도 되지 않고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전쟁영화에 대한 나의 편견들만 나열하는 것에는 전쟁 영화가 탄생하게 된 배경들에 관한 많은 가치들이 빠져있고 내가 편협하기만 한 사람같이 느껴진다.

차라리 전쟁과 전쟁에 연루된 모든 사람들을 발가벗기는 영화를 보았으면 나을 법 했다. 잔혹하겠지만 그런 영화가 오히려 더 나의 취향적이라고 할까.

아무리 아름다운 고전이고 그 명성이 뛰어나다 할지라도 나의 입맛에 맞지 않으니 답답한 옷을 입고 눈을 본 듯해, 고전이라 말하는 것들이 모두의 고전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행색은 밝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가 만드는 영화나 음악이나 글들이 부정적이고 어두운 경우들과 늘상 침착하고 과묵한 사람이었는데 그의 작품들은 밝고 유쾌한 아이러니함들을 종종 본다. 그 동안 나는 밝은 겉모습에 비해 어두운 나의 취향이 참으로 이상한 현상이라 생각을 했었는데 저런 단순한 말과 아이러니로 나의 모습을 간결해주니 조금은 안정이 된다. (늘 종잡을 수 없는 나의 들쑥날쑥함이 나는 내심 부담스러웠다) 타블로의 소설집을 읽으면 한 귀퉁이에 타블로의 말이 적혀있다. 어릴 적의 나는 슬픈 것이 아름다운 것인 줄 알았다, 대충 이런 뉘앙스의 말이었는데, 나는 그 말을 보고서 무언가에 꽂힌 듯 수십번은 중얼거렸었다. 그리고 여전히 마음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다. 무섭도록 슬프고 처참하고 잔혹한 인생의 숨겨진 그늘을 드러내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솔직한 행위이고 그렇기 때문에 아름답다 라고.

2010년 11월 13일 토요일

달빛요정 역전만루홈런

오늘 친척 결혼식 때문에 창원까지 달리느라 차 안에서 몇 시간 동안을 잠자코 있었다. 그러고 있으면서 들었던, 처음으로 들은 그의 노래 '도토리'. 몇 일 전 추운 죽음을 맞이 했었던 그는 홍대에서 꽤나 유명했던 1인 인디 밴드로써 활동을 했었다고 한다. 인디 음악을 즐겨 들으면서도 그의 존재를 그가 떠나고 나서야 알게 된 나는 그 노래를 들으며, 그의 사연들이 고이 담긴 그의 가사를 음미하며 작은 죄책감에 휩싸였었다. 집으로 돌아와 과제를 하기 위해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와 88만원 세대에 관한 자료를 조사하던 중, 그(달빛요정 역전만루홈런) 또한 이 시대가 원하는 이 시대의 목소리였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 시대의 20대는 말을 잃었으며 말을 할 줄 모르는, 소비적 감성에만 치중하는 무기력함의 상징이라 생각했었고, 그런 나와 내 친구들의 모습을 스스로 루저라고 말하곤 했었다. 루저, 나는 그 단어를 단순히 나의 무기력함과 소극적인 모습을 방어하기 위한 단어로써 사용하곤 하였었는데 그가 노래하는 노래 속의 루저의식을 만나고 나니 가슴 언저리로 찬 물 한바가지가 쏟아진듯한 싸한 기분이 든다. 나는 이 사회 속의 루저야 라고 말을 하면서도 루저가 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려 했고, 더욱 더 말을 하려 하였으며, 누군가에게로, 모두가 들어주진 않지만 자신과 누군가를 위한 가사를 노래하며 누군가에게 시선을 맞추려 노력하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의 노래에는.

세상과 그 속의 우리들을 위해 시선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그의 정성 뿐만 아니라 자신을 과감히 루저라 말을 하며 낮추는 그 태도 속에 감추어진 그의 고귀함 또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감사하다.


세상을 욕하고 싶어진다. 그가 그를 무능한 루저라 칭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 세상을.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에게 무능한 루저라는 명찰을 만들어 그의 가슴께로 달아 준 세상을 욕하고 싶어진다. 그 뿐만이 아니라, 제대로 된 문화를 하는 사람들 모두를 난처한 궁지로 몰아 넣는 세상이 야속하기만 하다. 나는 정말 제대로 된 문화라면 그 속에 시대의 정신이 들어있고, 세상을 향해 하고 싶은 말을 품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이 접하고 즐겨 듣는 문화들에는 그런 요소들이 부족한거 같다. 그들이 신나하고 즐겨듣고 보는 것들은 잠시의 귀와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한 트렌디적인 것들에 불과할 뿐, 세상을 향한 다부진 말들은 흔적조차 없다. 그것은 소비자들의 선택 문제일 수도 있지만, 나는 소비자들이 문화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기 이전의 시장상태에 대한 질책을 하고 싶다. 시장의 상인들은 여러가지의 문화들 중 돈이 되는 것들만 우선적으로 골라 시장에 내어놓는다. 고로 소비자의 시선을 강렬하게 사로잡을 수 있는 것들은 시장판 위로, 선택을 받지 못한 '무능한 문화'라 지칭되는 것들은 소비자들에게 선보일 기회도 없이 가라앉고 만다. 나는 그 불운한 과정 속에서 타락되어가는 문화의 가치를 다시 일으킬 수 있었으면 좋겠고, 세상이 그 힘을 다시 되찾았으면 좋겠다. (은연 중의 이 말 속에서 나는 다시 세상 속의 제 3자가 되는 듯하다. 내 손으로는 그 힘을 전혀 되찾을 생각을 않고 있는 나는..)

나는 이 사회에서 어떤 사람이었나 다시 자문하게 된다. 사회 속의 나의 가치는 어느 정도였던가. 나는 무엇이었던가.

2010년 11월 12일 금요일

두통이 생겼다. 머리 아픈 고통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이라 여길만큼 나는 두통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처절하게 (두통을 겪고나니 정말 처절하게 고통스럽다는 걸 조금은 알꺼같다 ㅠㅠ) 머리가 아팠던 적이 없기에 정말 다행이다 여기고 있었는데.. 요즘 들어 잠깐 잠깐씩 아프던 머리가 하루 내도록 아프거나 다음날까지도 몽롱하기도 한다. 어제도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다 잠들었었다. 음... 그렇네.. 막상 아프고 보니. 엄마가 두통이 굉장히 심한 편인데, 엄마는 나를 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셨다. 나 머리 아픈거까지 니가 닮아가면 정말 큰 일이라 하시며. 두통때문에 하루 종일 얼굴을 종이가 구겨진 것 처럼 잔뜩 구기고 있는 엄마의 표정이 머릿 속에서 정신 없이 휘감기고 있었다. 온통, 진저리나게. 나는 엄마의 그런 표정이 싫었었다. 엄마는 본인이 그런 표정을 지으셨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시겠지만. 근데 어제 정말 심하게 아파보니 엄마의 그 표정에 연민이 가면서 한편으론 많이 안타까웠다. (엄마의 두통이 운동부족과 고혈압 때문인 것으로 판명나긴 하였지만) 무튼, 나도 두통에서 빨리 헤어나야 할 텐데..

2010년 11월 7일 일요일

너무 신이 난다. 내일 제출해야하는 과제 두개를 끝냈다. 드! 디! 어! 학교 가기 약 9시간 30분을 앞두고서 끝을 냈다. 아니 어쩌면 그 끝은 나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시간의 촉박함이 만들어 준 끝일 지도. 허허. 무튼 끝이 나서 난 너무 좋다. 일단은 고생을 하며 만든 나의 최선의 결과물이기에, 난 그것에 만족하련다. ^^

과제나 레포트 보다는 나는 개인적으로 '숙제'라는 단어가 참 좋다. 수업이 끝날 때마다 알림장을 꺼내던 아이들의 분주했던 손길과 선생님이 불러주던 목록들을 엉성하게 적었던 어릴 적이 떠오른다. 숙제 라는 단어 앞에서 마냥 난 어려지는 것 같다. 알림장에 적혀진 삐뚤 빼뚤한 글자들. 그 땐 어찌나 숙제를 안했던지, 다음날 학교에 도착해서야 알림장을 펼치고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던 것만 같다.

너무 오랜만에 A4 종이를 가득 메운 한글들을 보니 또 신이 난다.

2010년 11월 6일 토요일

요즘 글을 너무 안 썼더니 엉망이 되어버렸다. 사소한 일기일지라도 자주 자주 썼을 때는 글을 쓴다는 그 행위가 손에 익어서 아주 자연스럽게 글에 속력이 붙었었는데 이제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고 손도 굳어버렸다. 글을 쓰면서 내가 가장 답답하고도 두렵게 여기는 것 중의 하나가 손가락을 움직이기 전에 뇌를 먼저 지긋이 누르는 것인데, 지금 내가 그렇다. 글을 쓰는 것이 무서워진 것이다. 직관적으로 쓰기보다는 먼저 생각하고 계산하고서 글을 쓰려니 여간 힘이 들고 답답하다. 내 눈썹 위의 신경성 주름들은 더욱 짙어간다. 어딘가에 집중을 하거나 신경을 쓰면 가장 먼저 눈썹 위의 주름이 대답을 하고 그 다음은 긴장이 풀려 끝을 모르고 튀어나온 입이 시늉을 한다. '나 지금 엄청 신경쓰고 있어' 라고. 글쓰기가 어려워졌다는 사실 하나에 나는 오늘 밤 무척이나 절망을 느낄 것 같다. 답답한 노릇이다. 다시 새로워지고 싶다. 처음부터 시작한다면 좋을텐데. 역시 사람이 한번에 여러가지 일을 한다는 것은 힘들다. 한꺼번에 많은 일을 하다보면 얻는 것이 있는 만큼 버리는 것도 많아지는 법인데, 버리는 것에 나의 의지가 투영되지 않았음은 정말이지 슬픈 일이다. 글 쓰던 습관 하나를 잃고 슬퍼하는 오늘의 나처럼. 에라이 모르겠다. 내 마음대로 무엇이든 잘 되겠지. 다만 나는 매 순간마다 나를 잃지만 않으면 되겠지. 에라이 정말이지 모르겠다. 될대로 되겠지.

2010년 11월 3일 수요일

겨울이 다가오고 또 다시 한 살을 먹을 생각을 하니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고민이 산더미 같았다. 그리고 시험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없이 쏟아지는 숙제들에 초조해지고 또 갑갑해져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책 한권을 제자리에서 뚝딱 읽기가 힘이든다. 그만큼 요즘의 나의 시간들은 한뭉텅이로 있기보다는 조각, 조각 나뉘어져 있다.

몇일 전에 W 마지막회를 보면서 받았던 감동들이 아직 죽지 않고있다, 내 가슴 속에서. 그 때 내가 받았던 그 감동들에 최대한으로 빛을 집중시켜 그 힘을 원천으로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번번이 한다. W라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지독하고 많은 것들이 결핍된 삶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오는 사람들의 마음처럼만 살아가고픈 생각이다. 그리고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되어 나 또한 그런 사람들의 희망을 담아오거나 전하는 직업을 갖고 싶고.

그리고 언젠가는 꼭 영화를 만들고 싶다. 우니 르콩트 감독의 여행자를 보고 영화관을 나오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물론 내가 처음으로 영상을 보면서 가슴이 두근거렸고 또 영상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 주었던 나의 첫 감동은 다른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서였지만. 결정적으로 영화를 해야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건 여행자를 보고 나서였다. 그 영화 속에는 나의 기억 속의 내가 있었고 또 결핍의 슬픔이, 아름다움이, 희망이 살아있었다. 나는 희망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 영화를 처음 봤던, 그 순간에도 나는 희망을 믿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꿈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라는 누군가의 목소리와 희망을 말하던 희망이 없는 곳의 어린아이들의 연약해보이기만 하던 그 손이 희망을 말하고 있었기에, 나는 도저히 희망을 거부할 수가 없어졌다. 희망을 믿고 그 희망으로 모두가 행복해질 것이라 당당히 오해하고 왜곡할 자신이 생겼다. 언젠가는 꼭 영화를 만들 것이다. 희망을 거짓말하기 위해.

2010년 11월 2일 화요일

몇일 전, 엄마 손에 이끌려 송사리 다섯마리가 우리집으로 이사를 왔다. 산소여과기도 없고, 넓은 어항도 아닌, 그저 처음 우리집에 올때 담겨있었던 플라스틱 어항인 채로, 여전히 거주 중이다.

방금 전, 화장실 다녀오던 길에 이 시각엔 자고 있을지, 과연 물고기는 어떤 모습으로 잠을 잘지, 궁금하여 핸드폰 조명만 들고서 살짝 들여다 봤다. 그런데 물고기들이 갑작스러운 밝은 빛에 놀랬는지 그 좁은 어항 속을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그런 모습을 보니 덜컥 미안해져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2010년 10월 30일 토요일

어제 W 마지막 회를 보고서 자고 있는 엄마 옆에 기우뚱하게 누워 닭똥같은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흑흑흑.

고통과 절망 속에서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
(지금도 무사히 생활하고 있을 지 알 수 없는 아이들에게)
어떤 세상이 왔으면 좋겠어요? 라고 물었던 무모했던 물음과
수줍은 듯 웃으며 말하는 아이들의 표정과 희망의 메세지에서
나는 조금 부끄러웠다.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니?
라는 질문에 나는 완벽하진 않지만 세상을 바꾸는데 조금의 힘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대답을 했었다. 세상을 바꾼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절반도 체감하지 못한채, 무의식적으로 흘렸었던 말.

저번 인문학 수업시간의 주제는 세상의 진실이었고, 선생님께서는 열심히 진실의 의미와 우리가 외면했던 진실은 언젠간 폭력적인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돌아온다 라 말씀하시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진실을 더욱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라 하셨다. 진실은 파괴적이기에 선천적으로 인간들은 그것을 외면하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라는 말씀과 함께.

어떤 사람이 선생님께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왜 희생을 하면서까지 진실을 알아야 합니까? 굳이 진실을 알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살아갈 수 있는데요, 그리고 진실을 깨우치기 위해선 분명 누군가와 우리들의 희생이 필요한데, 굳이 그렇게까지 알아야 하는 겁니까?

그건 마치 내가 살아가는 이유와 함께 살아가는 삶의 경계에 중첩된 질문이었다. 내가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은 분명 나의 행복과 만족만 충족되면 괜찮은 곳이 될 수 있다. 나의 행복과 만족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의 가장 큰 몫을 차지하기에. 하지만 나의 행복과 만족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그들'과 '우리'들의 삶을 함께 할 필요까진 없는 것이다. 간혹 하는 봉사활동이 아니라 내 인생의 전부를 바쳐야 하는 의미의 진실이라면 더더욱.

이기적이지만 어쩔 수 없다고 분명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요즘처럼 많은 것들이 풍족하고, 또 그 풍족 속에서 결핍을 모르고 자라난 우리들의 세대라면 더욱이. 자유가 없는 세상이라는 말보다 돈이 한 푼 더 있는 삶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세대들이니까, 그런 정신을 가진 채 세상을 살아가도록 우리의 등 뒤에 숨은 누군가가 만들어낸 세상의 진실이 바로 그것이니까.

하지만 어제 W를 보면서 나의 이기심이 나의 진실은 아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마지막회의 방송이라 더욱 더 그랬을테고. 단지 숨어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 동안의 진심들이. 이스라엘의 점령에 자신들의 나라를 찾길 원하는 팔레스타인의 자유 운동가와 33명의 광부들을 위해 직접 현장을 찾아왔던 칠레의 대통령의 따뜻함과 그들을 도와주었던 여러 사람들 그리고 세상 끝의 희망들이 폭탄과 날아오는 돌멩이에 맞아 산산조각이 나고 마는 전쟁 속에서 희망을 염원하며 웃던 아이들의 얼굴들, 그 속의 진심들이 내 안에도 살아있음이 느껴졌다.

영화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느냐는 질문에 패닉이 된 나는
그 질문의 속 뜻이 일종의 희생이 아니냐고 되물었었다.
사실 그건 희생이 아니라 어쩌면 당연한 행방일지도 모른다.
내가 그토록 원했던 세상의 단면이 아닌 이면을 찾아가는 길과 의미가 모조리 그 질문 속에 숨어있음을 나는 어제서야 깨닳았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제부턴 책임감과 용기의 문제가 될 것이다.

2010년 10월 28일 목요일

다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그 동안의 나는 어찌 이리도 잘 지내왔던 걸까.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2010년 10월 25일 월요일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있다. 모든 판결이 끝이 나고 '나'의 처형이 이뤄지기 전의 내용까지 읽었으니 얼쭈 다 읽은 셈이나 다름없다. 이상하게 나는 이렇게 무신경하고 무관심한 주인공들에게 끌린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의 '나' 처럼. 물론 요우조우는 이방인의 '나' 보다 아주 많이 아파했고 자괴했고 그런 굴레 속에서 벗어날 수 없어 괴로워했지만 말이다. 이방인의 '나' 는 철저하게 무신경하다. 살인죄로 재판장에 선 그는 어머니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았다는 증언들로 위기를 맞고, 처형이라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그가 정말 어머니의 죽음 앞에 의연했을까? 물론 소설 상의 그의 태도와 그의 속마음 그리고 그의 말들이 온통 무관심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과연 그 무관심이 순수의 무관심이었을까 나는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만일 그것이 불순한 무관심이었다면 그가 처형의 위기까지 가야할 필요가 있었을까. 우리는 항상 단면을 보고 살아간다. 단면이 아닌 이면을 보기란 힘이 들고, 그것은 불확실한 추측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 속에서 헤매느니 차라리 단면 속에서 오해를 빚으며 살아가는 편이 낫다고 암묵적으로 판단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재판장에서 쏟아지는 말들이 모두 사실이라고 볼 수 없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사실이라 믿고 판단하고 판정한다. 물론 그의 죄의식 없는 표정이 이런 결과에 한 몫하였지만. 그가 가진 사실이란게 그는 어머니의 죽음에 아파하지도 울지도 괴로워하지도 않고, 어머니를 묻고 온 다음 날 천연덕스럽게 바닷가로 놀러간 패륜아이기에 결국 그는 처형의 판결을 떠안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살인이 일어난 바닷가에서도, 그가 앉아 있는 재판장에서도 그를 향해 맹렬히 내리쬐는 햇빛이 그가 느끼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숨겨진 고통이었고 죄의식을 대변하는 것이라면, 또한 그것이 무관심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그의 이면이라면, 그의 처형을 재판했던 모두는 어떤 사람들이 되는 것일까. 나는 이 소설을 통해 현상과 단면과 이면이 가진 괴리에 대한 생각을 조금 했다. 나는 항상 단면보다는 이면을 주장해 온 사람이었지만, 이면의 이야기들은 언제나 나를 혼란스럽게 하고 그렇기에 단면을 바라봄에 더 쾌활함을 느끼기도 했었다. 단면과 이면의 경계 쯤에 서 있는 듯하다, 나는. 그리고 불확실로 점철된 말들을 사실로만 가득한 삶 속에 투영시키며 나를 향한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 싶은 위기의 마음도 들었었다. 이 세상에서 효용가능한 불확실성이 존재할까. 오늘 내가 찾았던 '나'의 보이지 않았던 이면의 불확실성처럼, 다른 사람들의 시각에 왜곡될 진귀함이 존재할 수 있을까.

2010년 10월 23일 토요일

몇 달 만에 극단을 다녀왔다. 호되게 혼이 났다. 현재의 나의 태도에 대한 질책이라기보다는 나의 인생 전반에 대한 혼구녕에 나는 그만 바닥만 계속 보고 있었던 것 같다. 마땅히 떠오르는 극단의 모습이 바닥 밖에 없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쳐다보고 있었나보다. 많은 말들을 들었는데 아무런 기억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 흔한 단어들 조차,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단지 딱딱한 테이블 위를 나뒹굴던 죽은 바나나와 그의 몸 곳곳에 새겨진 검은 멍들의 고통들 밖에,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내가 그 곳에서 상처를 받았거나 혼이 난 것에 대한 상징이라기보다는 단순히 지금이 새벽인지라 그런건지도 모르겠다.

2010년 10월 22일 금요일

아.. 시험이 거의 끝이 났다. (다음주에 하나가 남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쯤이면 거의 다 끝났다고 봐도 무방할 듯 하다) 오늘 쳤던 시험은 영 찝찝한 끝을 맺었지만 그래도.. 그래도.. 오늘은 다시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점에서 깊이 감탄하도록 한다. 어제 잠들지 못했던 탓에 오후가 되니 잠이 몰려온다. 저녁에 연극 때문에 나가 봐야하는지라 차마 잠들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잠의 유혹을 뿌리치지도 못하고 여기 이렇게 글을 적고 있다. 근데.. 요즘 왜 이렇게 의미없는 말들을 내가 하고 있는거지? 뭐지?

2010년 10월 20일 수요일

목요일에 영미영화 시험이 있다. 딱히 범위가 주어진 것도, 정확한 답이 있는 것도 아닌 요상한 시험. 교수님은 창의적인 답안지를 원하신다는 한마디만 하셨을 뿐, 어느 누구도 정확한 정보를 알지 못한다. 영화에 관련된 감상문을 쓰는 것인데, 도대체 창의적인 답안지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헷갈린다. 나의 생각을 적으면 되겠거니 싶었지만 내 머릿 속에 드는 생각은 기존에 있는 것들에 다른 옷을 입힌, 구태의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속상하다. 막연히 공부를 시작하자니 나 자신을 위배하는 행동인 것 같아 그만두어버렸다.

2010년 10월 16일 토요일


영어영문으로 학과를 옮기고 난 후부터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씩은 숙제가 나와, 자연스레 작문을 하게 된다. 원어민 작문 수업의 두번째 숙제가 바로 내가 좋아하는 예술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이었는데 나는 이 사진에 대한 묘사 설명을 했었다. 이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의 감흥이 아직 가시지 않은 지라, 어찌나 신나고 뿌듯한 마음으로 글을 썼던지. 할머니의 곁에 함께 누워있는 저 옷의 온기가 따사롭다. 따뜻함과 동시에 약간의 비릿함을 안고 있는 것 같다. 누워있는 여인의 나체와 그 나체 곳곳을 사로 잡고 있는 주름들과 바싹 마른 듯한 건조함. 빛을 바랜 듯한 하늘빛의 드레스는 한 때 그녀가 그것을 입은 채 거닐었을 거리들과 그런 그녀를 동경의 눈으로 바라봤을 기억 속의 그들에 대한 아련함을 가지고 있다. 아기의 사진과 푸른빛 그녀의 드레스가 안겨주는 평온함, 하지만 죽은 듯 눈을 감은 그녀의 표정은 왠지 모르게 고통스러워 보인다. 그녀의 고통이 죽음 때문일까? 죽음을 앞 둔 사람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건 죽음보다도 언제 다가올 지 모를 죽음을 기다리는 동안의 시간이 아닐까. 질끈 감은 두 눈 위를 지금도 스쳐지나가고 있을 삶의 고통들과 덧없음. 그녀는 차라리 지금 감은 이 눈으로 죽은 듯 영원을 살아가길 바라고 있을 지도 모른다. 아무런 존재도 의식도 없이 연기처럼 안개처럼 누군가의 앞에 홀연히 나타났다가 금새 사라지는 무언이 되길 원하는 지도 모른다. 언제나 끝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의 고통은 그랬던 것 같다. 질끈 눈을 감고서 지금의 내가 사라지길 기도할 뿐이다.

2010년 10월 8일 금요일

올해 여름부터 (홀로) 시작했었던 프로젝트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아주 처음의 시작이니, 주제를 부여한 세밀한 프로젝트보다는 2010 여름부터 겨울까지 라는 기간을 중심으로, 사진을 찍어 정리하고 때로는 글도 함께 새겨 넣는 아주 단순한 행위를 하고 있다. 비록 요즘은 사진을 찍고 현상하는 데만도 급급하지만, 바쁜 일들이 끝나면 곧 본격 이어갈 예정이니 일단 거기서 비롯되는 죄책감은 덜자고. 어쨋거나.. 그저께였나 그그저께였나, 어두운 방 안에서 스탠드 하나만 켜 놓고서 책을 뒤적거리다가 공부도 되지 않는 시큰둥한 마음에 불현듯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Partial Project , 11월의 프로젝트이고 되도록이면 한글을 사용하고 싶지만 아직은 영어 단어의 뉘앙스로만 이해되는지라, 아직까지는 저 이름이 가장 그럴싸하다고 본다. 친구들의 사진을 찍는 것이다. 단순히 그들이 음식을 먹고 무언가를 마시고 수다를 떨고 잠깐 졸기도 하는 그런 일상의 사진이 아닌, 내가 바라보고 생각하는 그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물론 그를 생각하면 대번에 떠오르는 그의 모습과 습관 말투 같은 것들은 모조리 불온전하고 주관적인 나의 머리와 본능에서 나올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상대에게 이런 제스춰를 요구했을 때, 분명 상대는 고개를 갸우뚱 할 일도 많을 것이다. 내가 얻고자 하는 효과가 바로 그것이다. 아주 단순하고, 누구나 들으면 그렇게나 당연하고 뻔한 서로에 관한 이야기를 왜 굳이 사진으로까지 만드느냐고 할 지도 모르지만, 내가 하고프고 나타내고픈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알지 못하는,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그의 모습들을 그려내고 그 과정을 통해 그 또한 내 안에 숨 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나라는 거울을 통해 들여다 보는 것. 그러면서 우리는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나는 포즈를 취하는 그를 바라보며 모든 것을 다 드러내어 놓고 있는 그의 사지와 표정을 통해 나를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진솔한 마음과 시간이 필요할 듯 하다. 물론 둘 다에 해당하는 말이고. 결국 적극적으로 행동해야겠다는 생각을 끝으로 벌써 반절은 시작되어버린 듯한 11월 프로젝트에 관한 상상을 끝마쳤었다. 기대된다. 그나저나 당장 10월엔 무엇을..? 나를 내려 놓기 프로젝트, 뭐 이런건 어떨가 싶다며 하하.

시험기간이 되니 공부 빼곤 다 하고픈 심정이다.

내 생애 첫 흑백사진


이 사진이 현상되기까지 5일이 걸렸다. 보통의 컬러필름이 넉넉잡아 1시간 안에 현상됨을 염두하자면 이는 엄청난 인내의 결과인 셈이다. 이제는 어지간한 사진관에서는 흑백필름을 다루지 않으니까, 부산에서도 흑백필름 손질을 하는 곳이 한 곳인가 밖에 없다고 한다. 결국 내 필름도 택배로 어딘가에 보내어졌다가 다시 돌아온 셈이었다. 그래서 다짐했다. 다음엔 찍을 사진 다 찍어 놓고서 필름들 몽땅 모아서 현상하리라. 필름 한 통을 5일 동안 기다리느라 자라같던 내 목이 기린목이 된 걸 보니 흑백 현상이 여간 힘든 일이더라고.



자신들의 행복에만 눈이 밝고 다른 이들의 불행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물론 이 글을 적으면서도 나는 무조건적인 당당함을 느낄 수 없다. 나의 기억 속에는 없지만, 분명 나에게도 나의 행복에만 눈이 멀어 다른 사람들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던 순간이 있었을지도 모르니.) 그런 비대칭적인 행복과 불행, 누군가는 행복하지만 누군가는 불행하다는 그 상황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행복과 불행은 언제나 교차적이고 시간적이고, 특히나 그 불행이 관계에 따른 상대적인 차이라면 그 차이가 관계에 대한 이해에서 다시 극복될 수 있는 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정말 문제는 자신의 행복에 두 눈이 젖어버려 다른 사람들의 불행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 무관심한 태도이다. 그 태도가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언제든지 그들은 자신의 혀에 닿는 달콤함과 쓴맛에만 민감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위를 돌아보지 않는다.

2010년 10월 4일 월요일

자두소녀

자두
에 관한 모든 기억들을 긁어 모은 것 같다.

초등학생 때 학교에서 야영을 했던 적이 있다. 다음날 이른 새벽 산행을 위해 모두가 산을 향하던 중 나와 친구는 그 길을 이탈하고서 친구의 집으로 달려갔었다. 일종의 도망인 셈이었다. 이런 사실을 모르셨던 친구의 엄마는 나와 친구를 위해 냉장고에서 차가운 자두 두알을 건네 주셨고, 자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나는 차마 먹지 못해 손에 쥐고 있었다. 유독 습기가 꿉꿉한 여름이이었는데 더운 날씨에 빨간 자두의 껍질 위로 수증기가 맺혔고 나는 그 축축한 물방울들을 손으로 닦아내며 구름이 잔뜩한 하늘을 올려다보았었다.

하하 나에게는 별 것 아닌 기억도 신비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2010년 10월 2일 토요일

감기

원래 감기에 걸리면 딱히 약을 먹거나 병원에 가지 않아도, 잘 먹고 잘 자는 것만으로도 금방 낫는데 이번 감기는 끈질기다. 계절의 변화처럼 산뜻하게 왔다가 홀연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끈질기게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지겨운 무엇같다. 내 코 안을 질펀하고 또 끈끈하게 뭉쳐놓는 이놈의 감기 ㅠㅠ 콧물 때문에 왠지 나 더러워진거 같아.

확실이 아닌 확신이 중요하다.

2010년 9월 30일 목요일

어제 스페인 감독인 알렉스 드 라 이글레시아의 퍼펙트 크라임을 보았다. 보는 내내 유쾌해서 절로 신이 났다. 상황 속에서 순간 튀어나오는 위트있는 유머라기 보다는 영화 전체를 이끌어 가는 스토리 속에서 묻어나는 유머가 매끈했다. 그래서 좋았다. 코믹영화가 되기 위해 의식적으로 씬마다 끼워넣는 억지의 유머가 아닌 영화 자체가 가진 유머의 힘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라파엘과 로우데스의 전복과 전복을 거듭하는 관계 또한 웃음의 포인트였고. 무엇보다 라파엘과 로우데스가 등장하는 그 장소가 사치와 허영의 공간인 백화점이라는 것과, 백화점에서 태어나 백화점에서 죽겠다고 말하는 라파엘이 매일 밤 머무는 공간 또한 백화점이라는 점은 정말 이 영화의 백미였다. 그것이 라파엘의 모든 것을 말해주었으니까. 그는 직장에서 미녀의 여자들을 거느리고 밤이 되면 그녀들과 백화점 안의 탈의실이나 가구점에서 호화로운 섹스와 허영스러운 와인잔을 기울이며 그것들이 모두 자신의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남성복 매장의 남자가 매출이 높았던 자신 대신으로 승진을 하고 라파엘은 그와의 다툼 끝에 실수로 그를 죽이게 된다. 그의 시체를 없애기 위해 라파엘은 애를 쓰지만 결국 그의 범죄는 같은 회사의 못생긴 여직원 로우데스에게 들키면서 완벽하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라파엘은 로우데스와 인연을 만들어 가게 되는데, 그 과정이 정말 폭소다. 예전이라면 쳐다도 보지 않았을 (심지어는 같은 곳에서 3년이나 일했으면서 라파엘은 로우데스의 존재도, 이름도 알지 못했다) 외모의 로우데스를 바라보는 것만도 라파엘은 괴로웠지만, 그를 더 괴롭게 하는 것은 로우데스의 괴상한 성격. 그녀의 가족들 또한 그녀와 다름이 없다. 임신을 했다고 말하는 8살짜리 동생과 세상 모든 작은 물건들을 모으는 것이 취미이고 늘 졸고 있는 그녀의 아버지, 그녀와 쏙 닮은 엄마 까지. 그녀는 라파엘을 라파엘로 두지 않는다. 로우데스의 라파엘로 만들고 싶어하며 그에게 집착하며 구속한다. 그녀의 틀 안에서 괴로워하던 라파엘은 그녀를 향한 완전한 범죄를 하고 싶어하고 두번째의 범죄에서는 성공을 거두게 된다. 하지만 로우데스의 품에서 벗어난 그는 이제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예전의 생기어렸던 표정은 어디가고 축 처진 표정으로 작디 작은 가게 안에서 넥타이를 파는 그. 특별해지고 싶었던 그의 꿈은 송두리째 날아가버리고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런 그의 초라한 모습과 반대로 로우데스는 자신이 기획한 삐에로 패션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예전의 못생긴 로우데스가 아닌 한 시대와 패션을 풍미하는 우상의 존재로 탈바꿈한다. 화려해진 로우데스와 초라해진 라파엘의 다시 한번의 만남, 그 전복의 만남이 딱 맞아 떨어지는, 누군가가 미리 예정해 놓은 장난과도 같았다. 인간이 가장 극적으로 찌질할, 일부분으로 만든 듯한 캐릭터들의 숨쉬기가 너무나도 특별해, 굳이 스토리가 없었어도 재미있었을꺼 같다. 그 정도로 캐릭터가.... 난 이런 짖꿎으면서도 이해되지 않는 캐릭터들을 끌고 가는 영화들이 참 좋더라고. 재미있었다. 정말 재미있었다는 말에 모든 의미들이 꽉 들어차도록 재미있었다. 이글레시아 감독의 야수의 날 또한 볼 예정이다. 정말이지 기대 만빵!

2010년 9월 28일 화요일

이젠 누구에게 내가 플룻을 연주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기가 부끄럽다. 손을 놓은지 이미 오래인 것도 하나의 이유이고, 또 다른 하나는 고등학생 때 나를 알았던 사람들이라면 정신 사납게 학교를 가로지르고 뛰어다니던 내가 얌전히 플룻을 다루는 모습을 쉽게 상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몇 년만에 잡아 본 플룻은 이제 소리가 나지 않았고, 괜히 속상하고 또 아쉬워서 플룻에 대한 미련이 머릿 속을 떠나질 못하고 있다. 새로운 악기를 장만하기엔 수중의 돈이 넉넉치 못해서 속상함은 시간이 지날 수록 배로 불어나고 있고, 마우스를 쥔 나으 오른손은 말을 듣지 않고 더 좋은 악기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저께는 중학교 때 나와 함께 플룻을 연주 했었던 친구가 아직도 플룻을 연주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었다. 나에게는 이미 낯선 이름이 되어버린 플룻을 그 아이가 아직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은... 음 뭐랄까 내가 묘한 질투심과 동시에 부러움에 사로잡혔다고 할까? 그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그런 기분이 들었다. 나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공부때문에(결과적으로 열심히도 하지 않은 공부였지만) 플룻에 손을 놓았었는데 반해 그 친구는 여전히 악기를 다루었다는 건, 그 아이가 나보다 더 많은 감성과 경험을 악기로써 느꼈다는 걸 뜻하잖나. 이상한 시기심이 생겼다. (참 이럴 때보면 나도 욕심이 꽤나 많은 아이인데.. 잘 드러나질 않아) 인생에 있어서 분명 특정의 것들이 발달할 수 있는 특정한 시기가 분명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간과한 채 학생들을 공부에만 매달리게 한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교육과정에 많은 불만을 품고 있는 나에게 이런 사소한 비교는 엄청난 분노를 불러일으킨다구!! (T.T)

어쨋거나. 그 아이에 관련된 말들은 뒤로 제쳐두고서.
난 새 플룻이 갖고 싶다고! 소리만 나면 넙죽 절이라도 하겠소이다, 고맙다고.
그 정도로 난 간절하다고!!

2010년 9월 24일 금요일






현재 미니홈피와 네이버 블로그 그리고 여기, 구글 블로그
사이버상의 커뮤니케이션 입구를 세개를 열어 놓고 있는데, 실질적으로 미니홈피는 관계를 맺는다기 보다는 사진을 올리는 용도로 주로 사용되고 있고, 네이버 블로그는 사진과 간간이 글을 올리는 용도, 구글 블로그는 깔끔하게 글만 올리기에 좋으니 글만 올리는 용도로 사용한다. 뭐, 막상 넷상에 뭔가를 올리고자 할 때 생각과 판단을 하고서 올리기보다는 기분에 따라 들어가고 싶은 곳에 들어가서 올리는 편이긴 하지만.
그런데 구글은 사진 올리기에 여간 불편한게 아니다. 그래서 사진은 일부러라도 기피하곤 하는데. 오늘은 사진을 올리고 싶네. 셔터를 누르는 건 내 손이 아니라 마음이다, 라는 말을 오늘 아침에 짧게 읽던 책에서 보았다. 마음으로 찍은 사진은 아무리 흔들리고 초점이 맞지 않아도 아름다워보이고 누군가로 하여금 그 사진이 만들어내고 있는 감정과 분위기에 감동할 수 있게 된다고. 나는 아직 그 정도로 사진기와의 일체감을 느껴보지는 못했지만, 저 말이 내가 사진기를 놓지 않는 한 내가 말하는 좋은 사진의 기준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메일을 보내러 구글에 들어왔다가 문득 블로그를 너무 오래 방치해둔건 아닌가 싶어서 이렇게 글을 남긴다. 하하. 사실 요즘은 학교에서 쏟아지는 과제들 수습하기에도 바쁘다. 작년에 전과를 하자마자 과감히 휴학을 해버리곤 학과공부를 미뤄둔 것이 화근이었다. 그렇다고 휴학했었던 1년을 후회하는 건 아니다. 분명 나는 빠른 속도로 걷는 걸음보다 불안정한 내 나이와 상황을 가늠하여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걷는게 더 현명할 것이라 여겼으니까. 확신보다는 자신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인생을 살아가고 어떤 임무를 수행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몸소 깨닳았으니, 과연 그 1년 동안의 일들을 숫자로 나열하는 건 쓸모 없는 일이라 본다. 덕분에 이렇게 복학한 늙은이임에도 불구하고 학과 공부에 허덕이는 신세가 되었지만. 하지만 나름의 쏠쏠함이 있다. 누군가 나를 채찍질 하지 않아도, 나 스스로 나를 채찍질하며 무언가를 수행하고 있다는 뿌듯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원래 나라는 사람이 욕심이 많아서 무엇이든 잘하려고 덤벼든다기 보다는 남들보다 부족함에서 더 많은 에너지를 얻기 때문이다. 앞서 나가는 것보다 내가 원하는 바를 메꾸어 감에 따른 쏠쏠함이 있다, 요즘은.

하지만 과제를 하는 시간이 늘어나면 날수록 나의 자유는 자꾸 없어진다. 하지만 덕분에 쓸모 없는 곳에 허비하는 시간이 줄어들었음은 또 행복한 일이다. 자유가 온전한 자유가 되기 위해서는 그 자유의 시간이 오롯이 나를 위해 쓰여야 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자유롭긴 자유로웠는데 그 자유가 과연 나를 향한 자유였나 아니면 태만의 자유였나,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몸소 느낄 수 있다.

오늘 아침은 모닝커피를 마셨는데도 불구하고 머리가 멍하다.

2010년 8월 30일 월요일

(글이 많아진다.. 무엇이든지 많아지면 힘과 가치를 잃는 법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긴다)

자꾸 친구가 넌지시 던졌던 그 말이 귓가를 왕왕 맴돈다.
저번에 떡볶이도 만들어 준다고 해놓고선

물 마시러 갔다가 냄비 한가득 담겨 있는, 어제 저녁에 만든 떡볶이를 보고 있으니 괜시리 그 아이가 생각이 나는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떡볶이 보다도 그 말을 하면서 섭섭함에 샐쭉해졌던 그 아이의 인상이 떠오르는 건지도. 아니 어쩌면 그 아이의 그 말과 표정을 들으면서 겉으로는 담담한 척 했지만 속으로 엄청 미안함을 느꼈던 나의 얼굴이 떠오르는 건지도.
제임스 낙웨이 James Natchwey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가치는 단지 '개념'이 아니다. 우리가 평생 가지고 가야 할 '열정'이다. 그곳이 세계 끝이든 바로 이웃이든 우리는 진심을 가지고 열심히 작업해야 한다. 그러면 단지 생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변화가 생길 것이다."
(검색 도중에 발견한, 심은식 사진 작가의 포토강좌에서 발취한)





이번 여행 사진들을 보면서, 몇몇의 사진들에서 나는 넘어가지 못하고 망연하게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떠났던 여행이니 만큼, 여행길을 시작하면서 사진과 주제에 대해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많은 생각들을 했었기에 첫 샷을 누르기까지가 엄청나게 무거웠었다. 하지만 늘 그랬듯, 셔터를 누름에 익숙해지다보니, 주제는 증발한지 오래고 그냥 찍고 싶은 사물과 감정에 직시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일단은 찍고 싶은 것들을 실컷 찍자, 다 찍고 나서 고민하자 라는 생각으로 여행을 끝마치고 돌아왔었다.

그렇게 찍은 사진들을 모아놓으니, 이거 참 기가 차서 말이 안나온다. 진심이 부족한 사진들이 숱하니, 모든 사진들이 나에 대한 기만은 아닌가 라는 의심으로까지 번진다. 남들이 보지 않는, 가장 고귀한 진실이 숨어 있을 법한, 현장들을 포착하여 찍었다고 생각했는데, 결과물을 보니 아무 감흥이 들지 않는다. 이건 착오이다. 허탈해져 왔다. 하지만 그 와중에 '제임스 낙웨이'의 금쪽 같은 조언을 보았다는 건 아주 드물게 오는 행운이 아닌가 싶다.

진심. 내가 찾는 그것이다. 아마도 내가 사진과 카메라를 놓지 못할 이유가 될 것이며.
가끔은 하고 싶은 말들이 너무 많아서 말을 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한 동안 말들을 아껴뒀더니, 머리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공부를 안해서 손이 굳는다는 그런 굳음 말고, 너무 많은 말들이 머리의 빈 자리 구석 구석에 자리 앉아 버리니, 꽉 막혀버려 빈틈이 없기에 말을 쏟아낼 수 있는 여유가 없는 셈이다.

곧 개강인데, 그래도 나름 영문과라고 좋아하는 영미 쪽 작가라도 있어야 되는거 아닌가 싶어서 몇일 전에 어디선가 추천 받았던 수전 손탁에 대한 책들을 끌어 모았다. 지금은 '사진에 관하여' 를 보고 있는데,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지 않는 여유로운 태도가 마음에 든다. 가끔 영화관을 나오거나, 다 읽은 책을 들고서도 뭔가 이상한 뒷통수의 기분에 머리를 갸우뚱 하는 경우가 있는데, 나에게는 그런 경우들의 대부분이 자신의 주장을 보는 사람과 나누기 보다는 먹여 주는 쪽이어서 남은 약간의 불쾌함이었다. (주장 관철 시키기를 내가 싫어하는 까닭은, 자기가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까. 주장이란게 시간에 따라 변화하고 상황에 따라 유연해야 하는데 가끔은 눈에 씌인 백태를 느낄 수는 있으나 대충은 앞이 보이니까 그냥 살아가는 식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왕왕 있어서, (주장하기를 그리) 선호하지 않는다.) 하지만 수전 손탁은 아주 유연하게 여러 갈래의 길들을 설명해 준다. 부드럽고 온화하지만 그 이면에 깊고 뚜렷한 통찰력이 있다. 이걸 다 읽고 나면 '해석에 반대한다' 도 읽을 참인데, 벌써부터 난 그녀의 팬이 되어버린 듯 싶다. 그녀의 존재를 알기 전에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3박 5일간의 여행을 다녀왔는데, 때론 여행이 설레임을 가져다 주지 않는 다는 야릇한 기분을 알고 와버렸다. 그래서 더 일상에 대한 적응은 빨랐는지도 모른다. 아니, 한편으로는 여행길에서 일상이 그립기도 했다.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는 시간의 잠잠함, 귀찮은 졸음의 질주, 뭐 그런 것들이 그립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갈망보다도 그 여행길에서 의미 있었던 것은, 역시나 혼자 하는 일들은 편리하다는 점이었다. 역으로 말하자면, 함께 하는 일들의 어려움을 알고 있기에 무엇이든 혼자 하고 해결하려는 이 끈질긴 근성은 귀찮음에 대한 동경이오, 어려움에 대한 회피였다. 그렇게 많은 말을 하는데도 오해가 생기기도 하고, 말을 하지 않는데도 서로의 기분과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던 시간들. (헤어린다는 것은 겸손한 추측이지만, 안다고 말하는 것은 오만이다)


라디오 헤드, 뮤즈(plug in baby 뮤직비디오가 인상깊었다), 트래비스, 마룬5, 카펜터스
노순택, 케빈 카터, 유진 스미스
김경주, 수전손택
타르코프스키(노스탤지아)
요즘 관심사

내가 조금 더 집요한 성격이라면 좋았을 텐데..
집착이 없어서 그런지, 대단한 저들에게 빛이 날 만큼 집요한 관심을 쏟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곤 한다. 그들의 노래와 사진과 텍스트와 영화에 미친듯이 열렬히 요동친다면 좋을텐데.

2010년 8월 20일 금요일

말을 하지 않고, 서로를 터 놓지 않을 때 상처는 더 격렬하게 곪아 오른다.

속쓰림이 갈수록 멎기보다는 심해지는거 같다. 팔, 다리의 힘빠짐은 물론이고 아무리 자도 잠은 그만 다가 올 생각을 않는다. 위염인가? 어쨋거나 피곤함을 쫓으려고 지속적으로 마시는 커피가 가장 큰 문제인듯 싶다. 하지만 쉬이 내 손가락에서 달아나지 않으니. 이를 어쩌겠어.

2010년 8월 17일 화요일

할 일들이 갑자기 쏟아지는 기분이야

내일은 수강신청에, 내일로 티켓도 주문해야하고(아직 어디서 끊을지도 정하지 못했지만, 그래서 더 마음이 촉박하다 ㅠ), 저녁엔 연극 보러가야하고.

곧 시작할 프로젝트 1,2 의 계획서도 만들어야 하고,
필름도 사야하고(필름을 사기 위해선 체크카드에 돈도 넣어둬야하고), 엄마한테 여행비 원조도 받아야하고, 책도 읽어야하고, 시네마테크도 가야하는데. 흙흙



내가 어제 그런 말을 했었지.
그래도 요즘은 살만해요...
응 정말, 요즘은 살만해.
내가 막 태어나 세상의 빛을 보는 핏덩이의 아기가 된 기분이야.
천천히 발 딛는 것부터 배워나갔으면 좋겠다는 희망, 딱 그 기분으로 살아, 요즘은.

2010년 8월 12일 목요일

비정성시 -김경주

기억이란 인간의 두번째 생이다 인간은 기억을 기다릴 뿐 기억을 소유할 수 없다 모든 기억은 불구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일이란 한 번 자살하는 것과 같다 익숙했던 모든 것들과 생이별하는 것이다 저승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곳의 모든 것이 내가 사랑하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낯선 곳에서 잠을 잘 자지 못한다 낯선 곳에서 자는 일이란 저승에서의 하룻밤과 같다 사람은 그 사람이 살아온 생에 다름 아니므로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일이란 내가 한 번 자살하는 것이다 내가 아는 칸은 이렇게 말했다 그것이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다가올 때가 있다


죽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나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것 같다


사진 속으로 들어가 사진 밖의 나를 보면 어지럽다.
시차 때문이다



모든 사진 속에는 그 사람이 살던 시절의 공기가 고여있다 따뜻한 말 속에 따뜻한 곰팡이가 피어 있듯이 모든 영정 속에 흐르는 표정은 그 사람이 지금 숨쉬고 있는 공기다 영정을 보면서 무엇인가 아득한 기분을 느낀다면 내가 그를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지금 이곳을 느끼고, 기억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쪽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나의 영정엔 어떤 공기가 흐를까? 이런 생각을 할 때 내 두 눈은 붉은 공기가 된다




비 오는 날 태어난 하루살이는 세상이 온통 비만 온 줄 알고 죽어간다
비 오는 날 태어나자마자 하수구에 던져진 태아는 세상은 태어나자마자
하수구 속에서 죽어가는 곳이가누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인간의 일이다 그의 어미는 야산의 둔덕에서 하늘을 보며 빗물로 피 묻은 자궁을 씻고 있다 해가 뜨고 개미들이 어미와 태아의 끈이었던 태를 땅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나는 망원경을 들고 그것들을 꼼꼼하게 관찰한다 비 온 뒤 축축한 땅에 귀를 대면 누가복음이 들려온다 개미의 저녁 예배를 듣다가 저녁을 굶었다



나는 유배되어 있다 기억으로부터 혹은 먼 미래로부터.

그러나 사람에게 유배되면 쉽게 병든다 그리고 참 아프게 죽는다는 것을 안다 나는 여기서 참으로 아프게 죽을 것이다 흉노나 스키타인이거나 마자르이거나 돌궐이거나 위구르거나 몽골이거나 투르크족처럼 그들은 모두 유목의 가문이었다 그들의 삶은 늘 유배였고 그들의 교양은 갈 데까지 가보는 것이었으며 그들의 상식은 죽어가는 가축의 쓸쓸한 눈빛을 기억할 줄 아는 것이었다 그들은 새벽에 많이 태어났고 새벽에 많이 죽었다
<11시> 이라는 연극을 보았다. 고장난 손목시계 속의 11시 55분, 두 남녀가 만난다. 여자는 위태롭게 지하철 난간에 서 있는데 놀란 남자가 달려와 여자를 제지한다. 술에 잔뜩 취한 여자는 남자에게 참견하지 말라고 하지만, 정작 그의 앞에서 그녀는 눈물을 터뜨리고 만다. 여자는 남자가 안고 있는 피켓에 관심을 가지곤 남자의 품에서 그것을 빼앗아, 신이나서 피켓의 말들을 읊어댄다. '건강한 산모를 죽인 병원을....' 갑작스럽게 발랄하게 글을 읽던 여자의 말들이 조롱처럼 느껴진다. 머쓱하고 미안해진 여자는 남자에게 조심스럽게 피켓을 건내고, 그가 자신이 일전에 블로그에서 봤던 사연의 주인공임을 깨닫는다. 아내를 잃은 남자의 사연이 드러나면서 여자 또한 4년 사귄 남자친구에게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별선고를 받았다는 말을 꺼낸다. 그러면서 자신은 정말 자살이 하고 싶어서 지하철 난간에 서 있었던 것이라며 고백한다. 후에 그들은 살고자는 희망을 말들을 서로에게 던지지만 지하철 사고로 목숨을 잃고 만다.

남자의 아내는 죽었지만 그 대신으로 아이는 살아있으며, 여자는 남자친구와의 아이를 낙태시키는 수술을 하면서 골반염에 걸려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여자로써의 가치를 잃고 절망에 휩싸인 여자는 자신은 살 이유가 없기에 죽고 싶다고 말을 하지만, 남자는 살고 싶어 발버둥쳤지만 결국 죽은 자신의 아내를 떠올린다. 어떤이는 죽고 싶어하지만 또 다른 어떤이는 살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죽어야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박민규의 단편소설을 떠올렸다. 삶과 죽음 그 사이. 죽고 싶어서 목을 매려다가 저 멀리 건물 옥상의 산모가 방금 낳은 자신의 태아를 목졸라 죽이려는 모습을 보고는 그 여자에게 아이를 죽이지 말라고 큰 소리를 친다. 정작 자신은 죽으려고 천장에 줄을 매달아 놓은 상태이면서도 말이다. 아이가 엄마에게서 나오기 위해 통과했던 질의 동그란 입구와 남자가 목을 매려고 묶어 놓았던 줄의 동그란 모양새는 닮았다. 그건 생명의 문과 죽음의 문턱의 닮은꼴을 뜻하는데, 그렇게 삶과 죽음은 닮은 것들이란 것이다. <11시>에서도 여자는 죽고 싶어 한다. 그녀의 죽음이 뜻하는 건 뭐였을까. 완전한 결말? 혹은 도피? 아니면 다른 희망으로의 전진? 나는 워낙 죽음에 관대한 사람인지라 박민규의 소설 조차도 나의 의도대로 왜곡하며 죽음에 대한 예찬을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죽고 싶다는 여자에게 남자는 죽으면 편안은 하겠지만, 과연 행복할까요? 라 묻는데, 과연 나는 죽고 싶다는 말이 행복을 염원하는 말일까 라는 의문을 한다. 죽고 싶다는 말은 현실과 현재에 대한 충동적 도피로써 행복을 염한다기 보다는 불행을 피하고픈 것이다. 사후의 세계는 알 수 없기에 그 세계의 정체는 일단 차후에 두고서라도 가끔은 현실을 피해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분명. 단지 도망갈 수만 있다면.. 그런데 현실에서의 도망은 비현실적이야 란 생각이 드는 순간 우리는 위험한 유혹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선택을 충동적이라 비난할 생각은 없다. 아무리 충동적일지라도 순간의 선택이기 때문에, 나는 분명 그 순간에서도 진심으로 생각하고 했을 선택이기에, 적어도 나는.. 징그러울 정도로 주관적으로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선택에 대한 후회는 하지 않기에. 그렇기에 나는 나 자신의 죽음에는 관대하지만 타인의 죽음에는 관대하지 못한거 같다.

어쨋거나 삶에 대한 가치 판단에 대한 말을 했던 여자에게 나는 연민을 느꼈다. 지하철 난간에 위태롭게 서 있는 그녀를 보며 나는 나를 떠올렸고, 언젠가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은 조금 죽어있지만, 그래도 내 안에서 숨을 쉬는 가치판단에 대한 압박과 고통을 느끼는 나 자신이 떠올라서 나는 그녀가 슬펐다. 그리고 어렴풋한 유년의 기억이 밀려왔다. 어두운 옷장에 들어가 있었던 어릴 적의 기억이..
뭐가 문제였을까..
아니 어떤 부분이 약했던 걸까.. 놀랍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당연하다 싶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물러서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더 나아가고 싶을 뿐. 한 발짝 더 나아가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해두어야지.

2010년 8월 11일 수요일

나의 시간은 덧씌워진다. 오히려 나는 기억의 힘으로 현재의 순간을 살아가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광장의 가장 큰 시계는 지구의 시간을 흘리고 있지만, 나는 그 시계 위로 나의 우주의 시계를 덧붙인다. 그건 나만의 철칙이자 철저한 작업이다. 그리고 나는 시계를 들여다 본다. 손목이 아닌 가슴으로. 나의 시간은 정확히 꼬집을 수도 없는 과거에서 천천히 천천히 거북이만큼 느림보의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다. 나는 그 느림의 걸음을 바라보고 있고. 되새김질을 한다. 내 삶이 다른 사람들의 삶보다 한 템포 느리고 멍청할 정도로 우둔한 건 다 이 시계 때문이다. 나는 차라리 그 멍청함이 좋고 신선하다고 본다. 나의 시계에는 승자도 패자도 존재하지 아니하며 그저 물 흐르듯 흐르는 시간의 강물만이 흐른다. 물가로 다가가 나의 모습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그 물을 작은 두 손에 담아 올려 맛을 보기도 하며 어쩌다 잡은 물고기를 바라보기도 한다. 나도 모르게 지나갔던 일들도 사람들도 예상치 못했던 반가운 행색으로 나를 반긴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그 느낌에 매료될때쯤, 아쉽게도 나는 현재 내가 서 있는 광장의 시계가 정각을 알리는 웅장한 비명소리를 들으며 깨어난다. 하는 수 없이 돌아간다. 손목을 바라보며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하면 좋을지 고민한다. 하지만 때론 이 두 세계가 분간이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는 아직도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가, 어느 세계에 걸터 앉아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저 손이 가는 대로, 마음이 숨쉬는 대로 쓰고 있을 뿐. 그냥 쓰고 싶었다. 그냥. 별 뜻없이, 그냥.

2010년 8월 10일 화요일

잠온다. 온 몸에서 잠이 쏟아진다.
이젠 속쓰림이 자연스레 내 몫이 되었다. 아무말 없이, 잔투정도 없이 그냥 나의 일부분이려니 싶어 받아들인다. 속이 편한 날들이 오히려 더 불편할 정도다. 역시 사람은 적응하기 나름인 것이다. 두 다리가 없든, 세개의 발가락만 가지고 있든, 입이 없는 사람이든 적응하면 나쁠 것도 없을 것이다.

2010년 8월 9일 월요일

무기력은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팽배해진 허무주의 의식은 우리들의 의식을 갉아먹게 하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배째라 식의 태도를 불러 일으킨다. 의식이 점점 바닥을 보이니 사회를 비판할 여력도 없고, 배째라 식의 태도는 극단적으로 죽음까지도 관대하게 만든다. 죽어도 좋고 안 죽으면 할 수 없지, 뭐 이런 태도? 우리를 집어삼킨 허무주의의 원천은 자신과 타인과 사회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다.

연극을 만드는 과정을 처음부터 마지막 공연하기까지 틈틈히 지켜본 바로는 연극은 사람을 위한 예술이라는 것이었다. 사람이 없으면 연극은 불가능하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이해, 배려가 없다면 연극은 무대로 옮겨질 수 없다.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이 부족하고 인색한 나에겐 특별한 경험이었다. 자신이 기꺼이 악역이 되더라도 그 사람을 위한 쓴소리를 할 줄 아는 사람의 거친 말들을 들으면서, 이렇게나 거칠고 고르지 못한 말들도 애정이 담기니 달콤하게 들리는구나, 비난이 아닌 비판이자 진심이구나 라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만약 그 자리에 없었다면, 연극인들이 연극을 만드는 그 자리를 지키지 않았더라면 내 평생 저런 진심을 느낄 수 있었을까. 우리가 살아가는 동네는 너무 삭막하고 허전하여 사람간의 인정도 메마르고 겉으로는 느낄 수 있지만 속으로 울고 웃을 수 있는 일들이 거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 또한 밖으로 안으로 무관심을 일관하며 인색해질 수 밖에 없었고. 물론 나 뿐만이 아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대부분이 그러할 것 같다. 지극한 개인주의로 내가 살아가는 길을 모색하기에 바쁘지 남을 위한 진정한 시간과 마음을 내어주기엔 여간 힘든게 우리들의 시대가 아닌가.

사람이 사는 세상 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저 말의 뜻을 이 나이가 되어서야 알았다. 알고는 있지만 내가 진정으로 누군가를 위한 사람이 혹은 누군가에게 진심을 다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다. 진심이란게 옳다, 그르다 혹은 보편적인 평가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니 나와 상대의 비밀 안에서만 판단 가능하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둘 사이에 정말 통한 어떤 것이 있다면 두 가슴이 서로 찌릿거리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다.

그 때의 그 진심을 잊지 못한다.
이상하게 터져나올 것만 같았던 울음과 쏜살같이 달려나가는 하루들을 부여잡으며 눈으로는 탐색을 하고 머리로는 계산을 하고 가슴으로는 멍 때리고 있던 나를 뒤돌아 볼 수 있게 따가운 말들을 해주었던 순간. 나는 참으로 무거운 고마움을 안고서 밤을 달리는 버스 안에서 턱을 괴고 앉아있었다. 창 밖에 내려앉은 어두움과 대조적으로 사람들이 사는 집들과 공간들은 밝고 환한 빛을 내고 있었고 나는 그 빛에 둘러싸인 어둠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그저 내가 살아가는 것인줄로만 알았다, 이 세상이. 이 세상에는 내가 살아가구나 라는 생각이 점차 이 세상에는 우리가 살아가구나 라는 생각으로 확장되고 있다. 가슴 뜨거운 사람이랄게 별 게 아니더라. 누군가를 진정으로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가슴 뜨거운 사람이 아닌가 싶다.

2010년 7월 28일 수요일

한나절 실컷 잠에 빠진다. 늘어지게 아주 얼큰하게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면 묵직한 하반신이 마치 나무토막처럼 느껴진다. 뜬 눈으로 보이는 세상은 이 세상이 아닌것만 같다. 제대로 정신이 돌아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그 때까지의 나는 이 세상 사람도 꿈의 세상의 사람도 아니다. 그 사이에 끼어 나 홀로 굳어간다. 그렇게 긴 긴 잠과 경계의 사이에서 벗어나면, 나는 행복할 정도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만다. 잠들기 전의 나를 괴롭혔던 모든 기억들, 감정들은 기억나지 않는다. 전혀 없었던 일들이 되어버린다. 나의 마음 속에서 밀어내려했던 사람에 대한 미움도 증오도 애정도 별 일이 아니었던 것만 같다. 그를 다시 미워하기까지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지만, 나는 벌써 그 힘들을 꿈의 나라에 다 소모해버렸다. 이 모든 것들이 긍정적 인식의 과정이라면 좋겠다. 하지만 나는 수차례 반복되어진 이런 과정들을 통해 점점 나의 존재와 감정을 소멸해가고 있는 중이다. 내 기억 속에서의 사람들을 이렇게 하나 둘 씩 지워가는 건지도 모른다. 미워했던 사람에 대한 기억도, 행복할 정도로 즐겁게 웃었던 기억도,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의 미소도 나는 모조리 잠의 세계를 통해 지워나가는 지도 모른다.

나는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나의 의식 속의 모든 기억들이 너무나 불투명하다. 처음으로 그것에 초조해져온다. 나의 사랑했던 사람도, 미움도, 괴로움도 대부분이 나에게서 너무나 멀어져있다, 지금.
나는 사실 울음이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녀의 말의 뉘앙스 때문이었는지,
그 카페에 흐르고 있던 음악때문이었는지,
그녀의 입에서 흘러 나온 사랑 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는지,
뭐 때문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순간 나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는 건 아주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어찌할 줄 몰라하는 표정과 동시에 머쓱한 미소를 입으로 짓고 있었다. 사실 그 미소가 그녀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는 걸. 그것을 그녀가 작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면, 그것이 진심과 진실이 아니고 뭐겠냐고.

2010년 7월 27일 화요일

한번도 진심을 담아 하지 않았던 말이 하나 있다. 외롭다.
나에게 외롭다 라는 말은 목구멍에서 톡 하고 메마른 소리를 내며 뱉어내어지는 순간, 그만 혀를 콱 하고 깨물어버릴 그런 말이었다. 이 지경이라면 그건 아마도 외롭다는 것이 단순한 말 이상으로 나의 삶을 구성해 온 일부에 속한다는 뜻이 된다. 그 일부가 부정적이라는 건 읽는 이의 짐작 나름이고. 사람은 정말 겉으로는 알 수 없는 존재이다. 또한 그 사람을 오랜 기간 알고 많은 대화를 나눴다고 해서 알고 있다 라고 말할 수도 없을 뿐더러. 나 또한 나의 글들이 타인들이 기억하고 있는 나의 이미지와 아주 많이, 저 멀리 강 건너편에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게 누군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멀게 느낀다는 걸 알고 있다.

외롭다.
어쩌면 너무나 오래 익숙해져왔기에 나 스스로 그것을 부정하려 든건지도 모른다. 혹은 내가 너무 외로워 타인들이 말하는 외롭다는 말을 공감해 줄 공간을 내어주고 싶지 않아, 일부러 외롭다는 말을 더 기피했다던가. 나는 결코 내가 외롭지 않은 동물이라 생각했다.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외로워지고 싶지 않아 나는 타인에 대한 방어벽을 더욱 철저하게 쌓았는지도 모른다. 고백같은 이 글을 쓰면서 점점 확신이 드는 건, 정말 내가 외롭고 외로웠다는 것이다. 그리고 외로워지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타인으로부터 내 외로움을 보장받으려는 나약함을 거부하고 싶다는 것이다. 나는 두 손이 없다. 절단된 손목만이 나의 외로움과 그간의 세계와의 괴리를 보여준다. 피도 한방울 나지 않는다. 나는 잘린 두 손목을 바지춤에 넣고선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나의 손들이 존재하지 않음을 알지 못하겠지. 어쩌면 나는 그 사실에 쾌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다친 자신의 손을 들고서 나를 찾아와 위로해달라는 그들의 태도에, 나는 보이지 않게 비웃었는지 모른다, 더 잘난듯 행동했는지 모른다. 나는 잘린 손목으로도 이렇게나 의연하게 살아가는데 너는 이런 일로 고통스러워하니? 역시 사람이란 나약해. 라고 나 자신에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라도 내 자신을 다독였는지도 모른다.

나의 글들의 대부분에서는 어렵지 않게 '나' 라는 존재와 '불확실의 단어들' 을 찾을 수 있다. 나는 어느순간 나 자신을 잃어버렸음을 깨닳았다. 그렇게 되기까지 특별한 사건이나 사람을 만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정말 그냥, 마치 저녁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붉게 변하는 하늘을 등에 지고서 양 손엔 묵직한 장바구니 두개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다 문득 돌아본 고개에 전기가 틔인듯, 어떤 메세지가 가슴으로 꽂힐때처럼. 정말 그랬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상 중의 하나였고, 나는 그 메세지 또한 늘 그랬던 나의 일상 중의 하나라 여겼다. 그렇게 잃어버린 나를 떠올리고 나서 내가 가장 먼저 눈을 뜬 것은, 나의 존재에 대한 허덕임과 갈망이었다. 세상 그 어디에도 나라는 조각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 라는 하나의 완성품을 만들고 싶었다. 지금도.

외로움을 비껴가기 위해 만들어 놓은 나의 벽들이 이렇게나 나를 괴롭히고 있는지 몰랐다. 그래. 어쩌면 모르고도 잘 살아갈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 그렇지만 정말 나는 그 벽을 허물어야만 하는 어떤 이유를 가슴에 품고 있다. 그 이유를 위해서라도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가야만 한다. 마음의 한걸음을.

2010년 7월 24일 토요일

누구를 동정하여 사랑한다고 함은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아니함을 의미한다.

이 말은 '참고 견딤' 이라는
뿌리로부터가 아니고
감정이라는 명사에서 만들고 있는
언어들에서도
이 말은 대개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 말이 부차적인 좋지 않은 감정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말의 어원이 지닌 신비한 힘이
이 말을 다른 빛을 띠도록 하여,
그것에 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부과한다.

‘함께하는 감정’ 이란 어원의 동정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함께 체험한다는 것,
꼭 마찬가지로 모든 다른 감정도
함께 느낄 수 있음을 의미한다.

기쁨, 두려움, 행복, 고통 등.
이러한 동정은 따라서 감정적 표상력의 극치를,
감정 텔레파시의 기법을 의미한다.
감정체계에서 그것은 제일 높은 위치를 차지한다.

그녀가 몰래 토마스의 서랍을
샅샅이 뒤졌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오히려 그녀의 두 손을 잡고
그녀 손가락 끝에 키스했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그 순간
스스로가 그녀 손톱 밑의 고통을 느꼈기 때문이다.
마치 그녀의 손가락 신경이
직접 그의 뇌와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테레사를 이해하고 있었고,
그는 그녀에게 화를 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오히려 더욱더 사랑했던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밀란 쿤데라
가장 좋은 것은 텍스트 속에서 그 의미를 알아차리는 것

나는 아직도 알 수 없다. 저 한장면을..
맥락 속에서 예고도 없이 등장한 저 장면을 이해는 하지만 쉬이 받아들일 수는 없다. 사실로 말하자면 나는 저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모를 뿐이다. 바다에서 건져올려지는 쌩뚱맞고도 기이한 손모양 동상을 감정선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분석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해석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사실 나는 지독할 정도로 분석적인 사람이지만, 영화를 분석/해석 한다 라는 말은 영화를 만든 사람을 위배하는 행위라 생각하는데, 우습게도 자꾸만 분석하고 싶어진다.
그래. 그럼 분석을 하면 되잖아. 근데 또 다른 문제가 여기서 발생한다. 나는 자의적인 해석을 하게 된다. 영화 뿐만이 아니라 요즘의 현대미술에서도 부딪치는 문제인데, 작품의 표현이 모호해지고 어려워질수록 관객들에게 왜곡과 오도된 견해를 심어줄 수 있는 의향이 커진다. 물론, 작품과 작가의 의도에 따라 의도될 수도 있겠지만은, 그 또한 관객들에게는 하나의 혼란이기 때문에 작품과의 괴리가 생기게 된다. 작가의 의도를 관객이 바로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이 얼마나 큰 슬픔인가. 그래서 나는 저 장면의 받아들임을 계속 보류하고 있다. 감독의 의도를 알아차릴만큼 지금의 내가 대단한 사람도 아닐 뿐더러, 하찮은 나의 해석이 영화의 영혼을 갉아먹어버릴지도 모르니.

2010년 7월 23일 금요일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안개 속의 풍경' 을 봤다.

음.. 뭐라고 해야할까
이 영화를 보고서 나는 또 다시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에 빠진다. 아빠를 찾기 위한 볼라와 알렉산더의 여정을 보면서, 2시간 가량 나와는 상관도 없는 그들이 있지도 않은 아빠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면서 나는 무엇을 느끼고 어떤 감흥에 빠지는가. 결국 이 감독이 영화를 만든 목적과 이 영화를 대중에게 선보이는 이유, 그러니까 원론적으로 영화란 만드는 사람과 보는 사람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에 대한 자아 성찰이다.

따지고 보면 현실과 가상공간의 스토리는 별로 다를게 없다.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게 현실이라는 말도 있잖나. 그럼 과연 우리들은 현실과 다를게 없는 영화를 왜 만들며,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사건들을 왜 굳이 영화를 통해 보려고 하는가.. 관음증? 대리만족? 감정이입? 재미추구?

어떤 대답도 성에 차질 않는다. 음........

2010년 7월 21일 수요일

아 오랜만에 블로그 진입.
한창 오빠가 빌려준 넷북을 사용하다가 데스크탑의 시원스러운 화면을 보고 있으니 뭔가 기분이 요상함. 또한 노트북 그 특유의 자글자글한 키보드가 아닌 자판이 커다란 키보드를 치고 있으니 오타가 잦다. 쓰면서 오타 고르느라고 조금 짜증이 치솟아 오르려함. 뭔가 불편하군.

지금 내 앞에는 달력이 있지. 벌써 8월의 페이지를 펼쳐보이고 있고. 8월엔 해야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아, 오늘부터 7월의 막바지까지는 8월에 예정될 이들의 준비운동을 하게 될꺼같다. 아아 새로운 날들이여, 어서 오시오. 난 잘 해내고 싶어.

2010년 7월 6일 화요일

이제나 저제나
간절함

집념
원래 세계의 경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머리는 청량한 숲이라기보다는 앞 뒤, 심지어는 양 옆의 구멍마저 틀어막힌 삭막한 구조의 공간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공간 속에서는 무엇이든 자신을 확신시켜주는 꼬리표가 있어야하고 반드시 그와 대조되는 또 다른 무언가가 존재하여야지만 가능했다. 확신과 이분법만으로 세상의 모든 창을 들여다보는 나의 이 머리구조는 단순하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들을 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었는데, 덕분에 나는 한시도 가슴 깨끗한 숨쉬기를 할 수가 없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에 과연 답이 있고, 명확한 정의가 있을까.
내가 만든 이분법은 결국 세상의 모든 것들에게서 뿜어져나오는 모호함에서 비롯되어졌는데, 그것들은 언제나 음과 양 이라는 세계와 그 두 세계를 지탱해주는 중심점을 모두 갖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세계들이 조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자체에 혼란스러워했다. 그래서 내 나름의 선 긋기를 시작하였었다. 결국 그 기준은 무조건 존재해야한다는 이분법을 만들어내었고, 그 이분법적 사고를 통해 나는 둘 중의 어떤 것에 내 자신을 확신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강박을 느꼈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답을 달고 다니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세상을 살아간다기 보다는, 나의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고
세상의 모든 답들은 세상의 도처에 깔려있다기 보다는,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세계관 속에 담겨 있다는 사실을 나는 다소 늦게 깨닳았다. 왜냐하면 나는 '나'라는 존재인식에 굉장히 취약했고, 나를 인식하기 위해 아주 많은 시간을 소모해왔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면 참으로 신기한 공간이다. 나라는 공간은.
내가 만든 나의 이분법적 세계를 허물면서 나는 더 '나'에게 가까워져가고 있고
세상의 답을 찾아가는 나의 창문의 폭은 위로 아래로 그리고 양 옆으로 쭉쭉 넓어져 가고 있다.
내 자신이 아직은 미숙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다는 점 빼고는 나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2010년 6월 30일 수요일

나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그 어떤 말을, 단어들을 뱉어내도 속이 시원스럽지 않았고, 연속적으로 덮쳐오는 답답증에 결국 나는 말을 잃을 수 밖에 없었다. 요즘은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렇게나 쉽게 내 던지던 농담조차도 쉽지 않고, 대화 속의 나는 무중력 상태의 우주를 혼자 둥둥 떠다니거 같은 엉뚱한 기분이 많이 든다.

2010년 6월 24일 목요일

나르시스트가 되기엔 자신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2010년 6월 23일 수요일

진짜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어제 다큐를 찍으면서 난생처음 카메라라는 것을 만져보았다. 딱 그 순간의 한 컷을 찍기 위한 카메라는 여러번 만져보았지만, 동작의 시간을 담는 카메라는 처음이었다. 카메라에 달려있는 조그마한 화면을 통해 바라본 세계는 경이로웠다. 마치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다른 세계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고작 카메라 한대일 뿐인데.. 아무리 실제를 있는 그대로 담는 다큐라 해도 카메라를 통해 재생산된 현실은 그게 현실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비스러웠다.

이창동 감독이 언젠가 그런 얘기를 했었다. 영화라는게 현실을 신비화시키기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그 신비감을 벗겨내려 한다. 아직 배운 것 없는 초짜라 제대로 잘 알지 못하지만, 지금은 그의 말의 부스러기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꺼 같다.

이창동 감독과는 영화를 만드는 기본의 지향점이 다른 듯한 이와이 슌지 감독의 Picnic 을 보았다. 이와이 슌지는 장면 하나 하나를 신비스럽게 만든다. 거친 영상과 아름다운 음악, 그리고 정신병원의 환자라는 주인공과 왜곡과 과장이 뒤섞여 표현된 주인공이 죄의식을 느끼는 장면, 이 모든 것들이 영화를 신비롭게 만들고 있었다. 상상의 나래 속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는 그의 솜씨는 그 영화와 주인공들이 정말 존재하는 세계이고 사람이라 믿고 싶을 정도로 진실되었고 수려하였다. 그가 그런 영화를 만드는 것과 반대로, 이창동 감독은 철저하게 현실 속의 인물과 그 인물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치열하게 만든다. 그의 영화에는 신비감보다는 현실에서만 알 수 있는 진실과 사실이 들어 있다. 나 또한 현실적인 영화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서 더 필요로 하지 않을까 싶어, 현실적인 영화들을 추종한 적이 있었다. 현실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부대끼고 살아가는 현실의 있는 그대로를 드라마틱한 사건들과 섞어 시나리오를 만들기도 했었다. 그런데 직접 시나리오를 쓰면 쓸수록, 현실과 영화의 세계의 경계가 없어지면서 도대체 현실과는 다른 영화의 세계만의 매력은 무엇인지 모호해졌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도 영화의 세계에서 주된 놀이가 되어야할 현실에 대한 경계가 사라지면서 재미는 사라지고 점점 진부해져갔다. 그런데 오늘 이와이 슌지의 영화를 보면서 도대체 내가 지향하는 영화의 세계는 어떤 세계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진실된 세계를 이야기하고 싶고, 생각하고 싶고, 만들고 싶다. 그런데 도무지 진짜의 현실과 이창동 감독이 말하는 영화의 세계, 이와이 슌지가 그리고 있는 영화의 세계, 그리고 그들과는 다른 나만이 원하는 세계는 어떤 세계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생각을 해야해....... 생각을...

2010년 6월 20일 일요일

오래 된, 낡은 건물들을 보면 위태로운 기분이 든다. 사회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 아마도 낡은 것의 아름다움을 새로움으로 갈아치우려하는 현대사회와 현대인들의 무분별한 습관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람들 각자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의 기준은 다르다. 나는 오래되어 황폐해지고 피폐해진 느낌의 이미지들이 좋다. 우리가 무심하게 지나쳤던 시간들을 저 창문의 창틀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 느낌이 너무 좋다. 아무리 하얀 벽에 때가 묻어있어도 그건 더러움이 아닌 세월의 때이기 때문에 깊게 볼수록 아름다워보이고, 검은 피폐함 또한 그것이 지녀 온 과거와 현재를 한번에 뭉뚱그려 보여주는 자화상이기에 아름답다.

2010년 6월 19일 토요일

What makes you feel alive?

2010년 6월 18일 금요일

경계도시2 와 시사콘서트 열광의 통일편



우리나라에선 자신이 좌파라 말하는 그 자체로써 죄인이 되기도 한다. 법의 처벌을 받는 건 아니지만 그것보다도 무서운, 누군지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돌팔매질을 당할 확률이 꽤나 높기 때문이다. 그럼 대한민국에서의 좌파는 도대체 무엇이기에 ? 사실 우리의 좌파는 과거의 인식 속에서 오류를 범한 선입견으로 자리잡아있다. 또한 그것은 우리나라 커다란 역사의 일부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단체적인 성향을 띈다. 6.25 전쟁으로 북한과 남한의 대치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군인들보다도 일반인들이 더 큰 피해와 상처를 입었다. 현재로 보면 50년도 더 지난 역사이지만 그 상처는 고스란히 지금의 국민들에게까지 세대물림 되어 있다. 지금의 우리들 인식 속의 좌파가 6.25 전쟁때 남한의 적이었던 북한/빨갱이/공산당를 뜻함을 보면 알 수 있다. 원래 좌파의 의미는 우파와는 반대되며 사회개혁이나 진보를 하려는 집단을 뜻하지만, 유독 대한민국 국민들의 대다수는 좌파를 남한의 사람들을 죽인 적이 있는 혹은 배신할 수도 있는 적으로 해석된다. 그 전쟁이 있고 난 지금까지 도대체 우리의 정치적 인식에 성장이 있었던 걸까.



오도된 좌파의 의미는 우리들 마음 속에 깊숙히 자리잡아, 좌파의 ㅈ자만 들어도 빨갱이라는 별명을 붙여줘 사회로부터 불이익을 당하게 한다. 경계도시2 에서의 송두율교수만 보아도 그렇다. 그는 그 자신을 북한과 남한 그 어느 곳에도 완전하게 소속되진 않지만 그 두 나라의 민족으로써 인정받고 싶음을 외치는 경계인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절대 경계라는 그 틈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나라다. 왜냐, 우파 아니면 좌파이니까. 남한사람 아니면 빨갱이니까. 송두율 교수가 북한의 초청과 초대로 몇번 북한을 다녀왔고 공산당에 가입되어있다는 이유로 그는 30여년동안 조국의 땅을 밟지 못하는 고통을 받았다. 그리고 그 자신이 경계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30여년 만에 돌아온 조국에서 그는 결국 자신의 존재를 경계인이 아닌 남한사람이라고 원치 않았던 전향을 하게 된다. 그 바탕엔 분명 오도된 우리들의 좌파의식이 깔려있었다. 북한에 다녀왔다는 그 이유만으로 그는 북한의 첩자, 빨갱이가 되었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았다. 물론 그가 활동은 전혀 하지 않았지만 공산당에 가입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다는, 영화를 찍던 감독과 경각심을 세워가며 보던 나의 이런 인식 또한 진보하지 못한 우리들의 레드콤플렉스에서 비롯된다. 부끄러운 사실이 아닐 수가 없다. 다른 나라에서 들으면 비웃을지도 모를 이야기다.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는 좌파 라는 단어의 제대로 된 정의를 내리지 못했다. 잘못된 정의로 북한의 ㅂ자만 나와도 빨갱이라는 오해와 의심은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다.



지금도 정치판에선 진보죽이기 활동이 활발하다. 진보라는 말 뒤에는 좌파, 빨갱이라는 수식어들과 욕설이 언제나와 같이 따라붙는다. 그들에게 되묻고 싶다. 당신이 아는 좌파는 무엇이냐고. 만약 당신의 답이 쳐 죽여야할 빨갱이라면 제대로 된 역사공부를 하고 오라고 말하고 싶다. 지금이라도 비틀어진 대한민국 국민들의 단체 편견을 바로 잡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만약에라도 통일이 되었을 때의 어려움을 하나라도 덜 수 있다. 통일 후의 경제적, 문화적 문제는 뒤로 미루더라도 서로에 대한 악감정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연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은 따로 살아가는 듯하지만 본래는 같은 민족이고 또 지금의 상태가 휴전선을 두고 있는 '분단국'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이에 대한 결말이 필요하게 때문이다. 통일은 언제 이루어질지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최소한의 준비라도 해야한다. 우리들의 관념 속에 일그러진 남한과 북한의 의미를 다시 되짚으면서, 현재의 대한민국이 증오하고 있는 여러 정치개념 또한 새로이 뿌리박을 수 있어야 한다.
오늘도 결국 날려버렸구나 라는 허무한 기분이 들지 않도록. 모처럼만에 한자리에서 책 한권을 뚝딱 해치웠다. 그리고 1차 수정 된 단편영화 시나리오 프린터도 했고. 블로그에 오늘 읽은 책이랑 어제 본 영화 <경계도시 2>에 대한 글만 쓰고 시나리오 보완 들어가야겠다.

현대소설을 읽다보면 이 시대를 대표하는 문학이라기보다는 바쁜 일상 속의 휴식같은 환상적이고 화려한 느낌이 많이 느껴진다. 모든 현대소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저런 실망감을 한번 느끼고 나니 현대소설을 읽는다는 자체가 괜히 가볍게 느껴져서 근래엔 잘 찾지 않고 있었다. (몇 명의 작가를 제외하고는)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날씨가 축축하니 후텁지근해서 그런지 가벼우면서 산뜻한, 그러면서도 충격의 신선함이 있는 글이 읽고 싶어졌다. 그래서 대충 제목 보고 고른 것이 '판타스틱 개미지옥'. 다 읽는데 한 서너시간쯤 걸린거 같다. 책 읽는 속도가 더딘 나로써는 굉장한 기록이다. 그래. 현대소설 가볍다. 그런데 소재가 가볍다거나 현 시대를 마주보는 눈이 가볍다기보다는 고전에 비해 접근이 가볍다. 그리고 친근하다. 그리 많이 보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읽어 온 한국현대소설을 통칭하자면 평범하고 일상적인 인물들의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에겐 이상한 낯섦이 있다. 바쁘게 살아가기에 돌아보지 못했던 아주 가까운 나의 주변인들의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작가의 상상력이 현실에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읽으면 읽을 수록 자연스레 몰입된다. 오늘의 '판타스틱 개미지옥' 도 그러하였다. 나 또한 백화점에서 일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백화점이 얼마나 지독한 자본력으로 움직이는지, 겉은 화려하지만 직원들을 위한 공간들은 어둡고, 그들의 말은 또 얼마나 거칠며, 짙은 담배냄새를 뿜고 다니며, 백화점 속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비인격적인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이 책과 나의 경험은 백화점의 모습이 단순한 백화점의 모습이 아닌, 자본주의인 현사회의 축소판이라고 말하였다. 무언가를 살 수 있는 사람만이 사람으로써 인정받을 수 있는 곳, 브랜드 하나에 나의 존재가치도 바뀔 수 있다는 그 우쭐함, 아주 비싼 물건을 사면서도 싸게 잘 샀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자기암시와 환상, 모든 현실의 걱정과 고민이 해결된 듯한 해소감. 이 모든 것들은 백화점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백화점 안에만 있으면 자신의 척박한 현실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환상의 세계로 온 듯한 기분이 느껴졌고, 사람들은 기분에 취해 소비를 하며 그것을 통해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곤 한다. 이건 결코 백화점 안에서의 문제가 아니다. 현대의 사람들 또한 시간이 지날 수록 자신이 비어감을 느끼고 그 허기를 채우기 위해 막무가내 소비를 하고, 그 소비를 메꾸기 위해 돈을 벌고, 또 소비를 하고, 이런 식의 메커니즘을 벗어나지 못해 비극적인 결말을 맺기도 하기 때문이다. 모두 진짜의 자신들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소설 속의 주인공들도 그리고 이 시대의 우리들도. 그렇기 때문에 남들이 사는 모습, 사는 것 등을 따라하고, 겉으로만 보이기에 화려하고 완벽한 것을 쫓아가는 것이 최고라 생각한다. 슬프고도 안타깝다. 이 소설을 읽기 시작한 사람이라면 단순한 재미로 읽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읽고 현 시대와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이 진정 찾아야 할 무언가를 찾아나설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10년 6월 17일 목요일

좋아하는 일을 할 때는 그에 따른 책임까지 짊어질 줄 알아야한다. 그리고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고 시작했다면, 그 과정에서 힘든 일이 있어도 참고 견뎌낼 줄 알아야한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을 한다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일이 익숙하고 진부해져 힘이 빠질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의 고통마저도 감수할 줄 알아야한다. 적어도 내가 하고 싶다는 의지로 시작한 일이니, 그 부분까지도 책임질 수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오늘 나의 취약점을 알아냈다. 미리 알고 있던 사실이라 딱히 신선하다 싶은 내용은 아니었지만. 무언가 만드는 일을 하려면 자신의 생각과 의견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만드는 것을 따라하고 도와줄 수 밖에 없어진다, 자신이 좋아하는 이야기든, 사진이든, 생각이든, 어쨋거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이 먼저 알아야 한다.

어쩌면 내가 하고 싶어하는 말하기를 잘 못하는 이유 또한 나만의 생각하기에 취약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만의 깊은 생각에 빠지지 못하고 곧잘, 얕은 생각 속에서만 허우적대다 결국 수렁에 빠져버리고 마는 잦은 경험들을 빗대어보면, 확실히 나는 나만의 생각이 부족하다.

나만의 생각과 나만의 말하기가 필요하다. 아마도 기나긴 연습을 거쳐야할 듯 하다.
강압적인 사람은 되기 싫다. 혼자만이 하는 일이 아니기에, 나와 타인들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고 동참하고, 그렇게 모두가 만들어 가는 작업이기때문에 결코 그걸 혼자만의 작업이고 성과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나의 말을 하면서 타인의 말도 잘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싶다.

2010년 6월 16일 수요일

'왜 이 일을 하고싶냐?' 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던건, 어쩌면 내가 그 대답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 일을 하고 싶다는 부탁을 하기까지의 생각들과 고민들이 분명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일에 발을 담그기까지 내가 해왔던 모든 열망들과 상상이 일종의 도피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나조차도 떨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에게서 비롯된 도피라면 나는 지금이라도 이 일의 시작을 말아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건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다. 나는 이 일이 자기발견의 통로라고 생각했다. 만약 이 일이 자기발견의 통로가 아니라, 나에게서 비롯된 의미없는 도피에 불과했다면, 나는 지금이라도 빨리 다른 통로를 찾아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에게서 가장 슬픈 사람은 자기발견을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특정의 그런 사람들이 슬프다기보다는 그런 사람들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또 그들을 단순한 소비의 중심체로 다루려고 하는 비인간적인 사회에서 느껴지는 슬프다 못한 잔혹함이다. 적어도 나는 그런 사람들이 되지 않으려 하며, 그런 사회의 만연한 의식이 나만의 통로로 인해 틈새가 마련되길 바라는 것이다.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을 근거로 나만 행복하게 살아가는 건, 혼자 살아갈 때에 느낄 수 있는 자만일 뿐이다.

그런데 이 글을 막 시작한 순간, 나는 느꼈다.
결코 내가 나로부터의 도피를 이 일의 시작점으로 삼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마도 나는 잔혹함을 행복으로 포장하는 이 사회로부터 도피를 하고 싶었던거 같다. 나를 나로써 인정해주지 않고, 너를 너로써 받아들여주지 않는 사회에 대해 나는 나고, 너는 너다 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던 거 같다. 그리고 그 말을 하기 위한 통로로써 영화나 영상을 하고 싶다는 열망을 품었고. 소설가 이청준은 사회로부터 자기 세계를 압박받고, 인정받지 못하고, 사회에 대한 불만이 많은 사람들이 바로 글을 쓰는 사람들이다, 현실에서 굴복당한 현실의 이야기를 자신이 창조하는 글을 통해 역전시킴으로써 일종의 만족감을 맛본다. 이런 그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속으로 뜨거운 무엇인가를 꾹꾹 참아내고 있었다. 그래. 나는 내가 싫어서 도피를 한게 아니다.


그 날의 '왜' 라는 질문은
방황하고 있던 나에게 세상을 향해 더욱 꼿꼿이 곤두서라고 말했다.
신념이 없는 말과 생각은 결국 시간이 흐르면 죽어버리고 만다. 아무리 대단한 말이고 생각이라할지라도 그냥 흘러가고 마는 농담과 같은 수준이 되어버린다. 신념, 지금 내게 필요한건 그것이다.

2010년 6월 15일 화요일

파괴창조라는 말이 있다. 파괴는 또 다른 창조를 가져온다는 뜻인데, 그 뜻을 알면서도 공사 현장을 목격하고나면 이상하게도 서글퍼져온다. 파괴가 시작되기 전까지 그 장소에 있었을 건물들, 분명 우리가 모르는, 그 속에 살아 온 사람들의 오랜 시간과 세월, 추억을 '새로움'이란 이름으로 파괴하려니 마음이 아파온다. 사람들은 그런 세월의 사라짐을 가슴 아파하지만 새로움의 화려함 앞에서 쉽게 잊고, 쉽게 받아들인다.

2010년 6월 14일 월요일


브라운관의 과장인지 아님 현실과 TV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의식의 공존인지.
한 장의 사진 속에서의 전혀 다른 두 배경은 별다른 경계가 없어 마치 한 장소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만약 그들이 소파에 앉아 영화를 보는 듯한 태도조차 취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마 이 사진을 단순히 특별한 공간의 창조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그들은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고, 또 그들이 바라보는 TV화면은 평면을 넘어 입체적인 모습으로써 즉, 다른 현실로써 그들의 의식 속으로 침투된다. 그리고 사진과 같이 한 공간 속에 그들이 영화를 본다라는 그 자체는 현실 속의 그들과 현실화되버린 그들의 의식 속의 영화를 공존할 수 있게 한다.
이런게 일종의 허무함이고 허탈감이라는 건가?
음식을 먹기도 전에 먹고 나서의 기분을 맛봐버리곤 그만, 먹기를 포기하고, 아이디어가 떠올라 글이 쓰고싶다는 기분에 부풀다가도 막상 컴퓨터 앞에 앉으면 쓰기 싫어진다. 무료한 기분에 친구에게 만나자는 연락을 하려다가도 헤어지고 돌아오는 그 길 위에서 다시 무료해질 기분을 생각하니 입맛이 똑 떨어진다. 그렇다고 쭉 혼자 있자니 목구멍까지 뭔가가 치밀어오르고, 움직이자니 그럴만한 쾌활이 없다.

시작도 하기전에 끝을 맛봐버리는 그 허무맹랑한 기분이 사람 사는 맛을 똑 떨어뜨려놓고 있다. 죽을만큼 답답하고 죽고 싶다는 말이 나올만큼 진부하고 허무하다. 머릿 속을 다시 맴돈다. 왜 살아가는 것인가. 차라리 토해내고 싶다. 목구멍을 꽉 틀어막아 뜨겁게 올라오는 무언가를 뱉어내지 못하게 막고 있는 그 것을.

2010년 6월 13일 일요일

소년은 시험을, 경쟁을 거부하였다. 친구들과 어른들은 소년을 겁쟁이라고 놀려댔다. 소년은 누군가를 밟고 일어서는 그 쾌감을 느끼면서까지 그 누군가를 진심으로 잃고 싶지 않다고 했다. 어른들은 그런 소년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경쟁을 통해 우리는 누군가를 잃지 않아, 그 속에서 더 많은 인생의 뜻과 의미를 알아가는 거지. 소년은 말했다. 나는 경쟁을 하면서 한번도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은 적이 없어요, 그 누군가가 누구이든 경쟁의 선에 놓이게 되면 나는 그를 미워하게돼요, 미워하지 않는데 이상하게 미워하게 돼요, 나는 그게 싫어요, 나와 그의 관계가 이상하게 멀어지는거 같아서 싫어요, 나는 내 안에서 고립되기 싫거든요.
"누구나 바르게 태어나 바르게 살다 바르게 죽고 싶어한다. 그러나 인생이란 마치 복병처럼 나타난 타인에 의해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삶을 만나게 되고 피할 수도 없이 그런 삶에 길들여진다. 2001년 이 긴장된 도시 안에서 아무리 날카로운 경계심을 세워도 어느새 나는 생각지도 않은 공간에서 나도 모르게 나쁜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다. - 여기 태어남부터 죽을 때까지 불행한 기운이 감도는 한 나쁜 남자가 있다. 너무나 검어서 흰 것이 때처럼 느껴지는.. 그의 순수한 눈빛은 여자의 일생을 불행으로 바꾼다. 그것이 너무나 잔인해서 마치 신의 계획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운명이라 말하고 싶다." - 김기덕
우리네 인생길은 그리 순탄치 않다. 길의 양 옆엔 따가운 햇빛의 한모금 그늘을 만들어 줄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그리고 커다랗게 우거진 그 나무들 아래에는 작고 귀여운 이름모를 들꽃들이 초여름의 시원한 바람에 살랑이고 있는 그런 따뜻한 길이라기보다는, 위협적일 정도로 커다란 건물들과 보란듯이 소외당하고 있는 작고 허름한 건물들이 빽빽하게 늘어선 회색빛의 삭막 속에서 운명과 실수와 실패와 성공이 질서없이 조직화되어있는 어느 골목길 같다. 양 갈래 길을 만났을 때, 이 길이 맞다 싶어 걸어왔지만, 그 길의 끝에 도착해보니 생각치도 못했던 운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때도 있고, 반대로 어쩔 수 없이 선택했던 길이 후에 큰 기회가 되어 다가오기도 한다. 우리는 언제나 복잡하게 엉켜있는 골목에서 서성인다. 생각하고 고민하고, 그렇게 걸어간다. 쉼없이 걸어간다. 들리는 건 나의 벅찬 숨소리뿐, 다른 세상의 소리는 숨을 죽인다.

2010년 6월 11일 금요일

그저 단순한 시간여행이 아니라 시간이동이 가능한 기차표를 끊을 수 있다면, 나는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을 다 털어버려, 지난 날로 돌아갈 것이다. 지금보다 더 풍요롭고, 화려한 삶을 꿈꾸지 않기 때문에 과거를 향한 나의 염원이 그리 초라하고 궁색한 변명이라는 여지는 피할 수 있을거라 본다. 그저 돌아가서 아무래도 괜찮다고 습관처럼 말했던 나에게 다시 말해주고 싶다. 현실을 완전한 밀실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현재와 현재의 나에 대한 불확실이고, 불확실의 토양 위에선 어짜피 불확실한 싹을 틔우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너의 불확실과 불확실의 미래 앞에 너무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는 그저 네가 틔우고 싶어하는 씨앗만 찾으면 된다.

2010년 6월 10일 목요일

대한민국에선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를 막론하고 학력이 크나큰 영향을 끼친다. 구지 학력이 필요없는 분야에서까지 학력은 그 사람의 됨됨이를 좌지우지한다. 소위 말하는 서연고 출신과 이름도 모르는 지방 삼류대 그리고 전문대학 출신에 대한 선입견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서연고 출신은 무엇을 해도 대단해보이고 그에 반대로 삼류대 출신은 뭘해도 미덥고 그저그래보이는 현상이 나타나곤 한다. 이번 타블로의 학력사건도 예외가 아니다. 이 정도까지 사건이 붉어지게 된 까닭에는 세계 일류 대학 출신의 수재가 힙합이라는 음악을 한다 라는 배경이 깔려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시선들을 보냈다. 그런 사람이 만든 음악은 어떤 음악일까, 그런 대학을 나왔으면서 연예인을 한다는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무슨 생각일까 등등. 그가 스탠포드 출신임을 대중들에게 각인시키면서 뭇사람들의 질타도 받았지만 그보다도 많은 덕을 본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그의 출세에 바탕이 되었던 일류대학 출신임을 완벽히 보여달라 요청하고 있고, 그에 대해 침묵하는 그를 보며 자신들이 기만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더 악착같이 달려드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타블로가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가수였다면 어땠을까?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써 음악으로만 승부를 봐야하는, 그러니까 학벌주의에 시큰둥한 반응을 하는 나라였다면 애시당초 그가 자신을 일류대 출신의 딴따라라 칭하며 출세할 수 있었을까? 숱한 공인들이 눈 가리기 아웅 식의 학력 위조 문제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긴 했으나, 이번 타블로 사건은 신정아 학력위조 이후로 가장 떠들썩한 사건이 아닌가 싶다. 어찌보면 그들의 사건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분야에 대한 능력과 학력의 상관관계가 학력 위조를 할 정도로 밀접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소한 일상에서도 간혹 자신이 전문대 출신임을 꺼려해 교묘하게 대학 이름을 속인다던가 혹은 아예 다른 출신이라 말을 하는 바람에 창피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또한 상대에 대한 평가에서 빠지지 않고 꼭 등장하는 질문이 바로 어디 출신이냐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만연화된 학력 위주 사회 속에서 학력이 사람과 능력을 판단하는데 중요하다는 인식을 피할 수 없는, 당연한 인식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일류대 출신은 능력이 좋을꺼야, 삼류대 출신은 좀 떨어지지 않을까.. 라는 타파하지 못한 선입견으로 타인을 판단하는걸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에, 해가 갈수록 일류대에 대한 열망은 커지고, 그렇게 다음 세대를 향한 입시부담과 무한경쟁은 심화된다. 결국 우리들이 선입견을 바꾸지 않는 한 미래는 바뀔 수 없다. 우리는 유명인들의 학력 위조에 유난히 예민하게 반응한다. 단지 그들이 그것으로부터 부와 명예를 얻었으며 또 공식화된 인정으로 많은 대중들을 기만했다고. 맞는 말이다. 그들은 예상치 못했던 대단한 학력을 앞세운 덕분에 많은 것들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일방적으로 질타하고 마녀사냥을 해서는 안된다. 그들 또한 학력 위주의 이 사회의 희생양이고 우리와 다를게 없는, 뭘해도 학력이라는 색안경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학력이 조금 좋고 나쁘다고 해서 다른 사람인가 보다 라고 생각하는 그 선입견부터가 문제이다. 이번 기회로 학력과 그 사람이 몸 담고 있는 분야의 능력에 대한 상관관계와, 우리가 만연하게 생각하는 출신의 환상에 대한 편견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본다.

2010년 6월 8일 화요일

하녀

저번에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하였다. 막 영화관에 도착하였을 때가 벌써 영화가 시작된지 2분정도 경과한지라 처음 보려고 했던 하녀는 포기하고 다른 것을 봤었다. 이런 나의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은 하녀 앞부분에 중요한 내용 없던데, 그냥 들어가서 보지그랬어, 다들 이런 반응이었다. 어... 그런데 오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앞 부분, 쓸모없는 내용이라기보다는 영화 전반에 걸친 상징적 느낌이 강하던데? 한 씬에 담긴 두 가지의 상반된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일을 하는 여자들과, 유흥과 소비를 즐기는 여자들. 일을 하는 여자들 그 속에는 주방일 하는 사람의 신분으로 은이가 첫 얼굴을 내민다. 시종일관 시끌벅적한 거리의 분위기 속을 일시 잠재우는 것은 한 여자의 자살. 하지만 이도 잠시뿐, 사람들은 호기심에 어린 눈으로 죽은 그녀를 바라보곤 멈추다 만 수다를 깔깔거리며 지나간다. 슬픈 분위기라곤 보이지 않는다. 그저 그녀가 죽어있는 그 자리에만 깔려져있는 정적에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나갈 뿐이다. 그 장면을 본 은이의 한마디, 야 구경가자. 일종의 암시이자 상징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젠 죽은 그녀의 흔적만이 남아있는 새벽의 그 거리를 다시 찾아와 지켜보았던 은이의 모습이..

김기영의 하녀와 임상수의 하녀를 비교하지 않겠다. 한 가정에 하녀가 고용된 후로 발생하는 사건들을 보여준다 뿐이지, 두 영화가 말하는 방향과 초점이 너무나 상반되기 때문이다. 다만 임상수의 순진하면서도 착한듯 맹한 은이의 캐릭터가 김기영의 하녀와 유사하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정말 아주 다른 작품이 탄생했다고봐도 무방하다. (김기영의 하녀는 맹하면서도 도발적인 팜므파탈을 가지고 있었다)

시대가 변했다. 김기영이 하녀를 말했던 60년대와 지금 우리들이 하녀를 말하는 방식은 아주 달라졌다. 고급 저택의 하녀로 고용되어 들어 온 은이에게 해라는 품격있는 고상한 말투로 자신의 속옷 빨래를 시킨다. 그리고 돈을 받고 당연하게 일하는 그녀에게 친절히 고맙다는 말을 건넨다. 그녀는 결코 은이를 막대하지 않는다. 해라의 남편인 훈 조차도 하녀라는 신분을 가진 그녀에게 막 대하는 법이 없다. 다정한 말투로 무언가를 시킬때도 강제적이기보다는 부드럽고 친근하다. 그들의 아이는 또 어떤가, 예의바르며 사근하게 군다. 그런 아이가 은이 또한 마음에 든다. 하지만 이런 그들의 친절은 은이가 훈과의 성적인 관계를 맺고 또 그 아이를 가지면서부터 180도 바뀐다. 해라와 해라의 모(母)는 아이를 지우지 않으려는 은이에게 보이지 않는 수를 써 아이를 유산시켜버리고, 미천하고 보잘 것 없는 그런 하녀의 신분을 짓밟는 말과 행동들을 서슴치 않고 행한다. 이런 그들의 변화는 원인과 결과가 따로 없는, 처음부터 당연한 것이었다. 그들의 친절은 자신들의 품격과 위상을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도구였을뿐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들은 아마도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던, 자신의 계급과는 전혀 다른 미천한 하녀라는 신분에 대한 의식을 품어왔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줌 지린 더러운 속옷을 손으로 직접 빨래하는 여자에 대한 그들의 막돼먹은 행동은 당연한 것이었다. 있는 자들은 있는 자들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우아한 식사를 하고 고상하게 책을 읽으며 그림들을 감상하고 또 베토벤을 연주하고 듣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아이에게 가르친다. 남에게 예의를 다하는 것은 남을 높여주는거 같지만 사실은 나 자신을 높이는 것이다 라고. 그들의 예의는 주위의 존경을 바라고 행하는, 자신들만의 고품격적인 세계를 창출하고자하는 일종의 계산된 행동이다. 은이가 마지막까지도 착각했던 그들의 진심 어린 친절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이 또한 그들 나름의 계급 나누기 방식이며 그 속에서 은이는 그들을 조롱하고자 복수를 도모한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보는 그 앞에서 자살을 하는 것. 보란 듯이 자살을 하는 거다. 그러면 아마 그들은 그들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는 죄책감에 평생을 살아가겠지, 란 생각을 했을거다, 아마도 은이는.. 하지만 그들의 세계를 조롱하려했던 은이는 되려 조롱을 당하고 만다. 결국 은이는 그들이 떠난 허황된 그들의 공간 안에서 처참하게 죽어간다. 그리고 은이의 예상과는 아주 다르게 그들은 죄책감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물론 이 또한 가식이지만) 다른 하녀들 앞에서 영어로 대화를 하며 또 다시 자신들의 세계에 금을 긋는다.

마지막 장면에서의 해라와 훈의 아이의 모습은 참으로 끔찍했다. 은이는 마지막까지 그래도 그 아이만큼은 자신에게 진심으로 친절하게 대해줬다고 고마워한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나면 그 아이의 친절이 정말 진심이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또한 그 아이가 미래의 해라와 훈과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 될 거란 무서우면서도 검은 기운이 감돈다.

임상수의 하녀는 욕망을 말하기보다는 계급을 말한다. 자본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고 말하는 지금 이 사회를 임상수를 조롱하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지만, 결국 별다른 대책없이 절대적으로 있는 자들에게 없는 자는 조롱당할 수 밖에 없는 허무함으로 끝을 맺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그 허무함 속에서 이 영화가 사회로부터 건진게 있다면 그건 다시 있는 자들에 대한 조롱일 것이다. 극 속에서 은이가 성공하지 못했던 그들을 향한 조롱을 현실 속의 관객들이 극 속의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조롱하는 것이다. 극 속에서 치졸한 냄새를 풍기며 대단하게도 자신들의 바운더리를 완성했던 해라와 훈과 미래의 그의 아이들을 보며 현실의 우리들이 품는 조롱만큼이나 대단한 힘을 가진 조롱 또한 없을 거라 생각한다.

2010년 6월 7일 월요일

현실의 재생산

십대들의 이지메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는 어느 누구도 영화의 목적을 위한 피해자 혹은 가해자로 설정하지 않고 있다. 그가 말하는건 오로지, 인간의 고통이고 릴리라는 가수의 노래의 영혼 속에서 그 고통을 위로받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 세계가 마냥 달콤하다고만 하기에 현실은 너무 길고 또한 가상의 안식은 영원할 수 없지만 현실은 멈추는 법 없이 흘러가는 법칙과도 같다. 자신의 팬사이트에서 글을 남기던 푸른 고양이가 현실에서 자신이 가장 증오했던 호시노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 하스미는 결국 호시노를 찔러 죽이게 된다. 그렇다면 이 죽음은 결국 이지메를 당했고, 자신의 주변인들까지 이지메를 시킨 호시노에 대한 복수였나.. 그건 아닌거 같다. 하스미는 언젠가 자신의 팬사이트에 등장한 푸른 고양이에게 개인적인 사연까지 물을정도로 그에대한 애정이 남달랐으며, 푸른 고양이 또한 가상세계에서 만난 샵지기 필리아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라이브콘서트에서 직접 만나자고 할 정도로. 그들은 릴리슈슈라는 가수를 통해 자신들의 고통과 고통받은 영혼의 갈라진 틈을 메꾸며, 서로가 서로를 고통받은 존재임을 인정하며 일종의 동질감에 대한 애정을 느꼈을 것이다. 분명 가상세계에선 모두가 고통을 위로받기 위해 릴리의 노래를 들으러 온 상처받은 자들이었는데, 현실에서 만난 둘은 한 사건의 피해자와 가해자의 신분으로 만나게 된다. 친구를 죽게하고, 잔인할 정도의 이지메를 주도한 호시노가 가상세계 속에선 상처를 치유받아야하는 사람으로 여겨졌다는 배신감, 같은 음악을 통해 위로 받았다는 불공평함이 하스미를 뒤섞으며 결국 하스미는 호시노를 죽이게 되는거 같다.

2010년 6월 6일 일요일

예술은 없었다 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고대부터 지금까지의 미술품들 중 진정 예술로써 인정되는 건 중세이후부터의 작품들이다, 한 마디로 작가는 예술의 본질과 기준에 대한 얘기를 했고, 그 얘기를 듣는 나는 그 기준과 본질의 모호성에 대한 아리송함을 느꼈다.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쨋거나 작가는 자신이 생각하는 예술이라는 기준을 바로 세워 끝을 맺었고, 나 또한 그와 같이 예술에 대한 나만의 기준과 본질을 세워야 함을 느꼈다. 하지만 답은 그리 호락호락 나오질 않았고 그 동안의 나는 많은 영화와 책을 읽으면서 그것들을 통해 내가 얻어내는 것은 무엇인지 또 나는 왜 그것들을 보기위해 영화관을 들어서고, 애써 시간을 내어 책을 읽는지 생각해보았다.

정확하진 않지만, 오늘 들었던 생각 중 하나는..
나는 영화와 책 속의 주인공들의 행동, 인생, 인생관, 가치관, 태도 등을 통해 그들이 아닌 나의 모습을 성찰하고 이해하고 이해받고 싶었던거 같다. 스토리를 위한 작품들을 보고나면 이상하릴만큼의 개운치 못한 느낌을 받곤 한다. 그것들을 보는 동안 나는 그것들에서 눈을 뗄 수 없을 만큼의 흥미와 재미 그리고 감동을 느끼지만, 그건 결국 그 순간일뿐이지 영화관을 나서고나면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허무함 또한 느낀다. 하지만 반대로 나의 모든 것들을 뒤돌아보고, 작품이 유도한 주제에 대한 생각에 골똘해지고, 또 작품 속에서 우연치않게 내가 걸어가야할 길의 동지들을 만나게되면 그들을 통해 나의 존재를 다시금 환기할 수 있게 되는데, 나는 이 때의 기쁨과 충족감이 좋다. 작품을 보는 순간의 짧은 기쁨이 아니라 작품을 다 보고나서 되새김질하면서 얻는 기쁨.
어쩌면 그 되새김질은 나를 살게하는 유일한일지도 모른다.

현실적인 여건도 되고, 그 여건만큼이나 나의 수준도 함양된다면 나도 그런 작품을 만들고 싶다.
다 보고서 영화관을 나올때 생각할 거리들이 많은 영화,
단순한 재미만이 아니라 의미가 중요한 영화,
단순히 영상의 매력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영상과 아우러지는 메세지를 담고 있는 영화 를 만들고 싶다. 나도.

뭐, 그게 나의 예술가치관이라면 가치관이겠지..?
마음 가는대로 살아라

쉽지만은 않았던 지난 날을 살아오면서 터득한 삶의 노하우 중의 하나가 아닐까, 진짜 내가 말하는 나의 자유를 행하라. 오늘의 추천책 코너에 있던 책의 표지문구에 쓰여져있었다. 마약, 불륜 등 많았던 시련들의 시간들을 지나 온 그녀가 그 때를 돌이켜보며 써내려간 책이었던거 같다.

하지만 그의 책소개 아래에는 자신의 자유를 행하면서 얻을 타인의 피해를 자유를 위해서였다고 합리화하는 작가의 태도에 대해 제발 어른이 좀 되라는 일침을 놓고 있었다, 누군가가.. 아마도 그는 작가의 불륜 경험에 대한 일침을 놓기 위함이었던거 같다.

그의 리플을 읽고나니 그럴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정이 있는 남자와 사랑에 빠져 그 둘은 행복을 찾았다한들, 가정이 전부였던 여자에겐 그들의 행복이 독이 되어버리고 만다. 더군다나 그와 그녀가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 떠나겠다는 선언이라도 있게되면, 가정 밖에 기댈 곳이 없었던 여자는 정말이지 무참하게 버려지고 추스릴 수 없을 것만같은 상처를 받게 된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과 자유를 행하는 것,
그 둘의 관계에 관심이 생겼다.


꼭 내 자유가 타인의 피해가 될 수 있다 라는 공식이 아니라, 나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의 자유를 행하기 때문에 내 자유는 엄연히 존중되어야한다 라는 자부심 속에 살아가는 한 남자의 속내와는 다른, 실제로는 그의 자유에 피해를 받지만 그가 자신에게 미치는 그 피해마저도 사실의 그의 자유에 대한 소산이기때문에 모든 걸 이해하는 주변인에 대한 상상을 했다. 문제는 그는 언제나 주변인에 대한 불평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왜 내 주변인은 타인을 고려하지 않은 자유를 행할까, 나는 이렇게나 내가 아닌 상대방만 생각하는데 왜 사람들은 그러는걸까, 라는 섭섭한 불만을 토로하는 것이다.

타인에 대해서 알면서도 일부러 꼬집어내지 않고 감내해야하는 부분들이 존재한다. 나 또한 그런 행동을 할지도 몰라, 라는 생각에서라기보다는 그런 당연한 부분까지 일일이 들춰내다보면 완벽한 사람에 대한 갈망과 동시에 현실의 사람에 대한 불만만 늘어가기 때문이다. 사람은 결코 완벽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알면서도 그들은 자신의 환상 속의 사람을 쉼없이 쫓아간다.

2010년 6월 5일 토요일

1.
미리 끊어놓았던 영화를 기다리면서 4명의 친구들이 모여 수다를 떠는 자리가 있었다, 어제. 사실 우리들이 하는 말의 대부분은 실없는 농에 불과하고 진지한 토론이라기보다는 서로에 대해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끄덕거림같은 동조와, 자신이 아는 부분에 대해선 광적으로 달려들어 그만큼의 자신을 보여주려는 과시가 묘하게 섞여있다. 그런 어제의 우리들에게 가장 맞아떨어지는 주제는 역시나 정치였고, 그 중에서도 몇 일전에 있었던 지방선거였다. 한나라당이니 민주당이니 이명박이니 고 노무현 대통령이니 정치엔 관심도 없는 젊은이들이니 요즘 대학생들은 데모도 안하는 학생들이니 뭐니.. 사실, 정치라는 주제가 확답적이고 그리 단촐한 대답이 유도될 수 없는 주제라 생각하는 나는 흥분할 때는 그들과 함께 흥분하지만, 흥분되지 않는 그런 날엔 그저 그들의 말을 들으며 곱씹으며 정치보다는 그 말을 하는 그들 자체를 분석하기도 한다.


정치비판에 이제 입이 닳아 없어지려고 한다.





2.
버스를 타고 가다 그런 생각을 했다. 버스 안에서 했던 생각이라고 하기엔 조금 어이없고 쌩뚱맞지만.. "나는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의 모습이 보였지만 그게 나의 모습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거울 그 자체를 믿을 수 없기도 했지만, 사실 거울에 비친 나라는 자신을 더 믿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 또한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하나이지 못했다. 100명의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100명의 내가 되고, 1000명의 사람들을 만나면 1000명의 내가 어지럽게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나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보는 거울을 믿을 수 없기도 했고, 100명의 나를 하나의 나로 합일시킬 자신 또한 없었다. 나는 도대체 누군가.."






3.
특정 당을 싫어하긴 하지만, 앞 뒤 못 가릴정도로 전적으로 그들과 그들의 말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그들아 하는 말들 중에서 극히 드물지만 그래도 괜찮다 싶은 발언들이 나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경우는 아주아주 드물더라. 어쨋거나 그들의 말도 들어보면 일리가 있긴하다. 문제라면 그들의 생각과 가치관이 나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 문제이지. 쨋거나 그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언제나 중간에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편협하지 않은 태도를 보이려고 노력한다.

두 명의 후보를 두고 고민을 했다. 사실 둘 다 그리 탐탁치 않았기에 농담삼아 기권을 하더라도 투표는 해야하지 않겠냐는 말을 서슴치않고 하고 다녔었다. 그 정도로 구미가 조금이라도 당기는 쪽이 없었다. 고민에 빠진 나에게 아버지는 1번을 찍으라고 넌지시 말을 흘리셨다. 당신의 말에 의해면 당신의 진급승진에 1번후보의 영향이 지대하며, 혹시라도 2번후보가 당선되었을 경우 당신은 은퇴날까지 승진은 불가능할꺼라는 말이었다. 사실 말하자면 나는 아버지를 그리 좋아하지도 않고, 아버지의 저 말은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나의 찡그린 얼굴 위로 아버지는 명예에 대한 욕심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연세에 대한 욕심어린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기우뚱하게 나를 쳐다보는 그 눈빛이 느껴졌고 괜시리 나는 무언가 북받치는 기분을 느꼈다.

사람은 나이에 따라 변해가야하고, 짊어져야하는 책임이 있으며 또한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기에 나 자신의 충만함보다는 타인이 보았을때 충만한 사람이면 좋겠다라는 욕망을 품고 살아간다. 어쩌면 그건 욕망이라기보다는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가지고 있는 단촐한 욕심이며 또 살아가는 이유가 아닌가? 그리고 어쩌면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아직도 찾지 못했기 때문에 타인의 잣대와 시선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한것이 아닐까? 자신의 거울을 직시하여 보지 못하고 100명의 사람들에게 휘둘리는 100개의 어지러운 자아들의 퍼즐을 맞추어 자신이 되지 못하는 하나의 자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게 아닐까?

2010년 6월 4일 금요일

'사람들은 다르다.' 라는 말은 사실 '타고나길 모두가 다른 사람이었다.' 라고 단순한 해석보다는 어쩌면 '사람들은 저마다 살아 온 시간들과 경험들이 다르고, 그것들을 떠올리는 가치관과 생각들이 다르기 때문에, 결국 모두가 달라진다.' 라는 해석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외면하는 영화를 보고 나온 다섯명의 친구들 중 모두가 그랬듯 그 영화를 폄하하는 친구들도 있겠지만, 반대로 그 영화를 통해 깊은 감명을 받고 나오는 친구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그 영화 속에서 보편적으로 이해 받을 수 없었던 기억 속의 자신을 찾았을 것이고, 그를 통해 일종의 동질감과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잠재되어있는 자신의 모습을 찾는 것이며 또한 그를 통해 자신과 동일시되는 감정을 느끼는 것인데, 간혹 우리는 무비판적인 흡입력으로 나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영화 속의 주인공을 자신과 동일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심하게는 영화 속의 세계와 나의 세계를 구별하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어찌보면 이건 그리 새로운 경향의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모두가 어림짐작으로 알고는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까놓고 말하지는 못했던 사실이 아닌가.

아주 사소한 예를 들자면, 가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가 다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가상의 영화를 보고서도 그것이 가짜의 세계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현실에서 혼동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그건 아이들에게 아직 임의의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는 능력이 발달되지 않아서이지, 영화 '극장전'의 동수의 경우처럼 생각하지 않고서 무작정 현실의 세계에 가상의 세계를 동일시한 것과는 사뭇 다르다.



예전에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 모두는 이기적이다, 자신을 위해 영화를 만들고, 또 관객들은 자신을 위해 영화를 보러오고, 그 영화 속에서 자신과 자신만의 생각을 찾고선 극장을 나선다. 지금 생각해보건데 이 말은 아마도 홍상수감독이 한 얘기가 아닐까 싶다. 이 말이 영화 '극장전'을 보는 내내 수도 없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홍상수감독이 아니라도 상관은 없다. 어쨋거나 내 생각 속에선 이 말이 '극장전'을 쏙 빼닮은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동수는 선배의 회고전을 보고 극장을 나서면서, 그 영화가 자신과 쏙 빼닮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영화를 본 듯한, 영화 속의 여주인공으로 연기했던 영실을 보고선 그녀를 뒤쫓아간다. 그녀를 보고는 그녀 또한 자신과 같이 선배의 영화를 기념하며 촬영현장을 둘러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수는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고, 나중에는 영화에서처럼 그녀와의 잠자리를 요구하고선 같이 죽자고 말하지만, 그런 그에게 그녀는 영화를 잘 못 본거 같다는 말을 남기고는 떠난다. 그리고 동수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생각을 해야 내가 살 수 있어, 생각을 해야해 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길을 걸어가고 있다.



사실 동수의 오도된 자신만의 생각과 감정은 영화의 무자비한 동일시와 관련이 크다. 영화를 한번 더 생각해보고 그 내용물들을 한차례 자신만의 방식으로 걸러보지도 않고서 무조건적으로 그를 수용하고 일체화시켰을 때의 고립을 홍상수감독은 말하고 있다. 어쩌면 그 영화가 그의 삶과 기억에 굉장히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어, 그를 통해 깊은 감명과 감동을 받아서 그런거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건 현실 세계에서 인정받을 수 없는 자신만의 생각이라는 추상성에 대한 말이지, 동수처럼 현실과 가상을 혼돈하면서까지 현실에서 추상성을 인정받기란 꽤나 힘들기 때문이다. 덧붙여 극장 속의 인물들은 실제가 아닌 연기를 하는 것이며, 나 자신 또한 그것이 현실과 비슷하지만 현실과는 아주 다른 세계를 맛보러 들어간다는 부분은 인정하고서 극장을 들어선다.



영화관을 처음 들어섰던 유년이 기억난다. 2시간여동안을 달콤한 나만의 환상 속에서 젖어있다가 현실로 돌아오려했을 때의 그 허무함. 하지만 그건 또 다른 영화의 존재 이유가 되는 듯하다. 현실을 거스름을 인정하면서 영화를 바라보면서 얻는 그 짧은 달콤함, 쾌감, 그것들을 느끼러 우리는 극장을 들어선다.

2010년 6월 3일 목요일

나라는 존재를 비우고서 들어선 극장의 그 영화가 과연, 재미있을까?



(원했던 순서가 아닌데 그냥 귀찮아서 냅둔다..)
그저께 새벽, 추천받은 영화 '토니 타키타니'를 보았다. 가벼운 러닝타임 덕분에 가벼운 새벽을 맞이할 수 있을꺼란 생각은 아주 잠시, 보는 내내 영화와 이미지에 대한 혼란을 느꼈다. 이 영화는 몇 장의 사진과 아주 단편적인 영상에 서정적인 음악이 어우러져 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흐르는 강처럼 한 줄기의 이야기로 이루어져있는 일반 영화와는 사뭇 달랐다. 이야기가 진행되어간다는 느낌보다는 정지되어 있는 이미지든, 아주 짧은 단편의 영상이든 어쨋거나 토막, 토막의 이미지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리고 일반 스토리를 말하는 영화들에서는 두드러지게 느낄 수 없었던 이미지가 주는 세기가 유난히 강하게 다가왔다. 그런 외로움과 고독을 말하는 이미지들의 한 묶음을 보고 있자니, 영화가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과 함께 영화 속에서의 이미지는 무엇인가 라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이미지들의 향연인 영화를 처음 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영화들은 스토리를 위한 이미지를 사용한 경우였지, 이번처럼 스토리보다 이미지가 중시되는 경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았다고 하기에는 조금 무색하고, 음악이 어우러진 이미지 전시회를 봤다고 말하는게 오히려 적당한 영화, 토니 타키타니. 그 속의 이미지들은 위의 캡쳐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군더더기없이 모던하면서도 깔끔한,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청취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 설정과 탁한 잿빛의 배경이 어우러지면서 그 속에서 외로운 주인공의 뒷모습이 더욱 처연하고도 처절하게 느껴진다. 배우의 정면 모습보다는 측면이나 뒷모습이 많이 쓰이면서 직설적으로 감정을 주기보다는 다소 간접적으로 그렇기에 표정이 보이지 않는 그에 대한 결핍을 보는 이의 감정으로 충분히 채울 수 있게끔 유도해준다.
그런데 인물의 고독과 외로움은 항상 저런 느낌이어야 하는걸까? 어떻게보면 저건 이미지가 갖을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아닌가? 그러니까 정확하게 다시 말하자면, 영화라는 통로를 사용해 인물이 현재 지니고 있는 감정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이미지를 사용함으로써 이 영화가 고독과 외로움을 만들어내는데에 한계를 갖고 있는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나는 결코 이미지를 통해 영화를 말하는게 나쁘다 혹은 잘못되었다 라는 말을 하려는게 아니다. 단지, 내 생각에는 이왕 들어선 영화라는 통로에서 인물의 감정을 적나라한 화면을 통해 보여준다기 보다는 그 감정을 보는 이가 유추할 수 있게끔, 인물이 겪는 사건들과 그에 대응하는 행동으로 보여줄 수도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배낭에 한보따리 식량과 짐을 짊어지고서 집을 나온 철 없는 십대소년이 해가 지기 시작하자 뿔뿔이 저마다의 집으로 떠나는 친구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저 외로운 것이 아니라 떠나는 친구들의 뒷모습을 보다가 불끈 주먹을 쥐고 오른 뒷산에서 굴러 넘어지면서 배낭을 잃어버림으로써 어두워 길도 보이지 않고 축축한 산 중에 홀로 남아 있음을 본인이 깨닳을 때, 우리는 소년의 외로움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집은 나옴으로써 일종의 자신의 인생에서 버린 일부분이 되었지만 아끼고 아끼는 물건들을 담은, 자신의 마지막 보물로써 여겨지던 가방을 잃어버림으로써 그가 느꼈을 허탈감과 외로움과 주인을 잃었을 가방과 같이 자신 또한 가방에게서 버려졌음을 다시 한번 더 상기 시킬 수 있다. 이렇게 인물의 외로움을 표현하기 위한 여러가지 방법들 중 나는 인물이 직접 그 사건 속에 휘말리고 그 사건이 인물의 태도와 감정을 유도케하는 방법이 그냥 보여주기 형식보다는 훨씬 인상적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2010년 5월 31일 월요일

이미지 라는게 연예인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보통 사람들의 인간관계에서도 존재하는 게 바로 이미지이다. 가령, 제 3자에게 누군가를 소개할때 '걔 어때?' 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그를 떠올리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래서 이미지는 상당히 주관적이다. 나의 생각 속에 있던 그를 꺼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같은 것을 보더라도 저마다 떠올리는 생각과 느낌들은 다르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지만 그에 대한 이미지들이 아주 다른 경우를 보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그를 착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그를 이상하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가 아주 악질이라고 답한다. 이런 현상은 그가 만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 따라 다양한 이미지를 형성하게 된다.

사실 이미지가 무서운 이유는 편견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참한 이미지의 그녀가 늦은 새벽까지 클럽에 남아 현란한 조명 아래서 교태스러운 춤을 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현상과 같다. 그녀의 춤을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는 한, 믿을 사람은 믿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실을 그저 우스갯소리라 하고 넘길 것이다. 그녀는 다소곳하다 라는 이미지 즉, 그녀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 그러니까 편견이 그녀에 대한 이미지를 가득 메우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녀의 교태를 쉬이 받아들일 수가 없다.

하지만 이미지는 개인이 받은 대상에 대한 하나의 단상일 뿐, 그 사람의 전부를 말해주진 않는다. 그녀가 가진 수천가지 이미지들 중 내가 본 이미지라곤 참하다 라는 하나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들은 자신이 느끼는 주관적인 하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을 객관성이라 믿고 그녀의 전부를 판단하곤 한다. 마치 그것이 그녀의 전부인양. 내 머릿 속을 벗어나지 못하는 어리석은 단상을 그녀의 전부라 여기고, 단정하고, 단언하는 모양이 꽤나 우스울 때가 많다.

그럴 줄은 몰랐다 라는 말이 태어난 곳인지도 모른다. 주관성이 객관성의 옷을 입고서, 자신이 진리라고 말하는 그 순간이. 우리는 우리의 머리를 맴도는 한정적인 생각들의 말들로 세상과 사람에 대한 잣대를 들이대고 판단하고 때론 비난을 일삼기도 한다. 마치 그것이 법전에 나온 법인양. 자신의 가치와 기준에서 태어난 말인줄도 모르고.

2010년 5월 29일 토요일

습관은 항상 그렇다. 상대의 사소한 습관의 발견은 언제나 흥미롭다. 내가 이 사람의 습관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사람이 되었구나 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호감이 있던 상대였다면 그 습관마저도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예쁘게 보이거나 혹은 습관을 갖게 된 연유에 대해 슬퍼진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마치 그와 내가 건너 온 끝이 없이 길었던 시간의 강들의 미동없는 진부함처럼 상대가 지겨워져 오는 중심점에 또한 습관이 있다. 어느 날 나를 반하게 했던 그의 사소하며 앙증맞았던 습관이 꼴보기도 싫은 짓꺼리가 되고 나는 언제나 그랬듯 반쯤은 별 생각 없는 말투로 그를 나무란다. 그가 무안을 느낄 정도로. 그리고 감정의 체에 채 거르지 않은 말들을 일부러 내뱉는다. 일부러.

2010년 5월 27일 목요일

맛있는 거 먹고 싶다.
좋아하는 누군가와 마주보며 별 것도 아닌 얘기에 시시덕거리면서
너와 함께 하는 그 시간이 좋아서 한번, 그리고 음식이 맛있어서 또 한번 그런 행복감을 느끼고 싶다. 충만해지고 싶어.

내일 일어나서 가츠동 만들어서 먹어야지. 기절할정도로 맛있게 만들테다.
그리고 어제 먹다 남은 떡볶이랑 순대랑 파전이랑 다 만들어서 한 상 거하게 해놓고 먹을테다!!

2010년 5월 24일 월요일

애기를 때리는 엄마를 봤다. 4~5살쯤 된 아이였는데, 처음엔 등을 돌리고 있어서 꾸짖는 소리와 함께 찰싹, 찰싹 소리만 들려 단순하게 아이 엉덩이를 때리나보다 싶었는데 이게 왠걸, 그 소리가 연이어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엄마가 애기 뺨을 사정없이 갈기고 있더라. 시뻘개진 얼굴로 비명 한번 안지르고 맞고 있는 걸 보니 이게 처음 있었던 일은 아니었는 듯. 계속 되는 구타에 다른 아기 엄마랑 몇몇이서 하지말라고 말렸더니 대꾸도 없이 택시에 타더라구. 그런데 이상하게도 택시는 출발을 않고, 기사 아저씨가 자꾸 뒷좌석을 힐끔거리는게 수상해 다가가보니 택시 안에서도 역시나. 결국 택시 문 억지로 열고서 참지 못한 다른 아기 엄마가 뭐라했고, 그래도 자기 잘못한건 아는지 대답도 못하는 아기 엄마와 피 터질꺼같이 시뻘개져 퉁퉁 부은 얼굴에 증오와 미움이 섞인 아이의 눈동자를 보고나니 정말 맥이 빠지고 할 말이 없어지더라.

그건 벌을 주는 것이 아닌 엄연한 학대였다. 또 어른의 분풀이었다.
그 엄마에게 아이는 단지 어른의 분풀이에 저항할 힘 없는, 그렇기 때문에 분풀이에 아주 적합한 도구에 불과해 보였다.

하지만 엄마가 자신의 자식을 학대하는 괴물이 되기까지의
처지와 상황이 있었을 것이고 (우울증이라던지)
그렇기 때문에 완전히 그 엄마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물론 그 엄마가 아이를 구타했던 그 때의 그 순간은 정말이지
태어나서 봤던 광경들 중의 가장 끔찍했던 장면이었지만.

또 한편으론 아이가 .. 난 참 그 아이가 자꾸 마음에 걸린다.
그 아이의 눈이. 엄마가 어찌됐거나 아이는 엄마의 행동을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약자인데, 그 아이가 얼마나
불안한 정서를 지니고 있을지, 자신의 엄마를 어떤 사람이라고 여길지 생각하면 할수록 내가 더 죄스럽게 느껴졌다.

아이도 엄마도 상처가 많은 사람인듯 했다.
누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세상이 그런건지, 사람이 그런건지,
세상의 악도 미움도 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인데..
"이미 짐작하신 분들도 계시겠습니다만 일기를 적거나 편지를 쓰거나 그런 일에 자주 매달리는 사람들은 대개가 바깥 세계에서 자기 욕망의 실현에 실패를 하는 경향이 많은 쪽이기 쉽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현실의 질서에는 자신이 굴복하고 실패할 수 밖에 없으므로 이번에는 그 세계가 거꾸로 자신에게 굴복해 올 수 밖에 없도록, 그 세계 자체를 아예 뒤바꿔 놓을 수 있을 어떤 새로운 질서를 음모하기 시작한단 말입니다. 좀 더 문학적인 표현을 빌려 말한다면, 자기의 삶이 근거를 마련하려는 일종의 복수심이지요."
- 이청준 '지배와 해방 - 언어사회학 시설3', <자서전들 씁시다>

2010년 5월 23일 일요일

“글 쓰는 과정은 언제나 폭로의 과정이며 그것은 상처받기 쉬운 일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 말은 그것이 고백적이거나 회고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현실이다.”
시간이 추억으로 쌓이듯, 하루를 이루는 시간들이 먼지로 쌓여가듯, 어쨋거나 무언가가 지나가고 밤이 찾아오는 듯한 서늘함이 목구멍까지 콱 뿌리박힌다. 같은 곳에서 같은 곳으로 불어오고 또 쌓여가는 먼지들의 텁텁함이 가득 들어찬다.

내가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안다. 무언가를 외치고 표현할만큼 가득차지 못했다는 것을 내 자신이 가장 절실히 알고 있다. 그래서 손에 집히는 대로 마구잡이로 먹어대야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2010년 5월 20일 목요일

이창동 감독의 <시>

시는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학생시절 문학의 한 부분으로써의 시를 배울때 우리는 시의 첫행에서 시작해 마지막행까지 생선 뼈를 바르듯 낱낱히 해체시킴과 조합을 반복해 시를 배우곤 했었다. 가슴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시험을 치기위한 분석자의 입장에서 시를 바라봤었다. 단어를 칼같이 해석하고 선생님이 가르쳐 준 의미 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던, 그런 불운한 시를 배워왔던 우리들에게 그런 의미에서 이창동 감독의 <시>는 현대인들에게 인생에 한번쯤은 봐야하는 영화들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싶다. <시>를 보는 내내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메세지들을 조합하려고 했지만 그리 명쾌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이 영화는 플롯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메세지보다 영화 전체가 한 편의 시 그 자체로써 부각되는 의미가 더 강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다 보고서 영화관을 나설때면 시 한편 제대로 봤구나 하는 기분이 들것이다.

두뇌를 회전하며 봐야하는 작품들이 있는 반면, 이렇게 가슴으로 느껴야 하는 작품들도 있다. 그건 음악이든, 연극이든, 문학작품이든, 영화든 상관없이 모든 예술작품에서 공통되는 점일 것이다. 그건 아마도 우리가 삶에서 예술을 갈망하는 이유이다. 진심으로,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을 통해 우리들은 여러 감정을 느끼고 그럼으로써 다시 한번 살아있고 살아있음을 직간접적으로 느끼면서 삶의 부족함에 대한 위안을 얻는 것이다. 그래야 이 지옥같은 현실에서 숨 한번 틔우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것이 아니겠는가.

영화 <시> 속의 주인공 미자는 시를 쓰고 싶어하는 할머니이다. 그녀가 시를 배우면서 얻게 된 새로운 눈으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찾아다니지만, 그녀의 현실은 성폭력 가해자가 된 외손주의 뒤치닥거리로 추하기 짝이 없다. 피해자에 대한 죄책감으로 허덕이면서도 외손주를 끔찍이 여기는 모순된 모습을 보이고 또 피해자 부모의 억울한 그 울음을 가슴 아프게 지켜봤으면서도 그 사건이 외손주의 장래에 걸림돌이 될까 합의금 500만원을 겨우 마련한다. 세상이 지천에 깔린 꽃들마냥 아름다운 줄만 알았던 미자에게 자신의 코 앞에 닥친 현실의 세상은 더럽고 추하기 짝이 없으며 그런 곳에서 자신은 시를 쓰기 위해 아름다움을 찾아야하는 모순은 미자를 혼란스럽게 한다. 시가 쓰여지지 않아 고통스러워 하던 미자가 시를 완성하던 그 날 밤. 여느 때와 같은 밤이었지만 여느 때와는 달리 집의 식탁에 홀로 덩그러니 앉아 시를 완성하는 미자. 지금까지 참아왔던 가슴 속의 이야기들이 쉼없이 써내려져 간다. 외손주를 경찰에게 넘기고 난 후였다.

아름다움을 보는 눈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름다운 줄 아는 마음이다.
진실로 그것이 아름다운 한 줄기 섬광이 되어 가슴 속으로 스며들고 아직은 옅기만 한 그 섬광 한 줄기를 한 줄의 시로 표현하는 것, 그것은 모든 예술의 기본이다.

우리 모두는 이기적인 사람들이라는 얘기를 누군가가 했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영화를 만들고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각자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그 영화를 소유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이기적인 사람들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절대 내색하지 않는 미자의 진심을 읽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이 영화가 진심과 한 맥락을 이루고 있다는 생각 또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등떠밀려 피해자의 어머니에게 손자의 잘못을 봐달라고 사정하기 위해 찾아가던 걸음 도중, 반할 수 밖에 없었던 자연의 정취에 도취된 자신의 생각들을 쏟아내어 놓고 돌아서던 길에 보였던 그녀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피해자 부모에게 해야할 말은 하지 않고 엉뚱한 말들만 해서 지었던 표정의 정도를 넘어선 당혹감을 그녀는 말하고 있었다. 분명 떨어진 살구를 보고 느꼈던 자신의 감정은 진심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이 피해자 부모를 세워다놓고 이런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진심을 알았기 때문에 후에 피해자의 부모는 미자를 바라보며 도와달라는 연민의 눈빛을 보낼 수 있었다. 진심과 진심은 통하는 법이니.

어쨋든 생각할 거리가 많은 영화이다.
영화를 보고 돌아오며 짧았던 밤길을 걸으면서, 참으로 소담하면서도 광활한 영화 한편을 보았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절반은 만족인 영화이다. 모두가 꼭 보길..

2010년 5월 19일 수요일

사랑하는 남자는 연인의 '결점'에만, 여자의 변덕과 약점에만 애착을 갖는 것은 아니다. 얼굴의 주름, 기미, 낡아빠진 옷과 비뚤어진 걸음걸이가 모든 아름다움보다 훨씬 더 지속적으로 그리고 집요하게 그를 사로잡는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감각은 머릿속에 둥지를 트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창문, 구름, 나무를 뇌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것을 보는 장소에서 느낀다는 설이 있는데, 그러한 주장이 옳다면 우리는 애인을 바라볼 때도 우리 외부에 있게 된다. 하지만 고통스러울 정도로 긴장하며 완전히 마음을 빼앗긴 채. 현혹된 우리의 감각은 여자의 광휘 속을 새들 무리처럼 빙빙 돈다. 그리고 새들이 잎이 무성한 나무의 은신처에서 보호처를 찾듯이 온갖 감각은 애인의 육체의 그늘진 주름, 품위 없는 동작, 눈에 잘 띄지 않는 결점 속으로 도피해 그곳에서 안전하게 은신처에 몸을 숨긴다. 그리고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은 바로 이 곳, 즉 결점이 있는 곳, 비난받을 만한 곳에 한 여자를 숭배하는 남자의 화살처럼 빠른 연정이 둥지를 튼다는 사실을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어른들의 세계를 무섭다고 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솔직함이 때론 잔혹함이 될때가 있다. 가령 미워하는 친구에게 혹은 자신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서슴없이 그건 마음에 들지않아, 너는 그래서 미워 그러니 다음에는 그러지마 라는 말을 하곤한다. 아이들은 그 말들이 상대를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 모르고 말을 한다. 아주 단순히 떠오르는 생각들을 그 때, 그 때 말하는 것 뿐이지 그들이 별 다른 잘못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 말은 생각을 대변하는 말일 뿐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한 마디로 자신의 생각에 다른 사람이 이 말을 들으면 아플 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이 없는, 아직까지는 자신의 머릿 속에 타인을 집어넣기엔 어려서, 상대가 듣기 좋은 말과 나쁜 말을 구분하지 못하고서 그저 자신이 했던 생각에만 충족되는 말을 하면 되는 건줄 안다. 그건 잘못이 아니다. 아이들은 그렇게 솔직한거기 때문에.

하지만 좋은 말과 나쁜 말을 구분할 줄 아는 어른들에겐 아이들과 반대로 비밀이 많다. 상대의 얼굴을 보고 내뱉는 말들의 대부분은 상대를 고려한 말들이다.정말 싸울 요량으로 했던 말들이 아니라면. 정상적인 대화에서 그들은 했던 생각의 전부를 말로 쏟아붓진 않는다. 절반은 순화시켜 말 할지라도 나머지 절반은 자신의 머릿 속에 꽁꽁 숨겨둔다. 그래서 간혹 대화를 하다보면 상대가 말을 하고 있으면서도 무언가 숨기고 있는게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가 하는 말과 진심이 많이 다를 수도 있겠다 라는 의심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벌어지고 벌어지는 사소한 의심의 간극은 남을 배려했기 때문에 생긴 어른들의 말의 세계에 대한 불신이 되기도 한다. 차라리 듣기 좋은 말 백번 들을 바에야 시원스레 말하는 아이들의 솔직함이 낫다는 생각을 하게되기도 하는 것이다.

말에는 진정성이 담겨있어야 한다. 거짓말이 때론 약이 될때도 있지만, 그런 경우라면 분명 거짓말 속에도 진심이 들어있었을 것이다. 진심이 다른 방향으로 표현된 것이 거짓말인 것이다. 가끔 사소한 일로 다툼을 시작하다가 헤어지자는 말로 끝을 맺어 놓고는 멀쩡하게 다음날 다시 만나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커플들을 자주 본다. 그들은 그렇게도 무거운 헤어지자는 말을 홧김이라는 단순화로 얼버무린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무거운줄 모르고 너무 쉽게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거 같다. 말에는 상대에 대한 예의와 배려와 무게가 실려있기 때문에 함부러 사용해선 안된다. 단순히 생각을 표현하는 도구적인 존재 그 이상으로 말에는 무수한 의미와 가치들이 실려있다. 말은 나를 보여주는 나의 일부분이다.

죽느냐 사느냐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다.
잔혹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속마음으로 참아내는 것이 더 고귀한가?
또는 난관의 바다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고
맞싸워 없애 버리는 것이 고귀한가?
죽는 것은 자는 것. 그것 뿐이다.
육체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속아픔과
천만 가지 괴로움을 잠으로써 끝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열렬히 희구할 종말이 아닌가 !
죽는 것은 자는 것. 자는 것은 어쩌면 꿈 꾸는 것.
그렇다. 거기 문제가 있다. 이 썩을 인생 잡답을 벗어 던진 후
그 죽음의 잠 속에 무슨 꿈이 생길지,
그래서 주저하게 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오래 살아야 한다는 불행이 있는 것이다.
세상의 채찍과 멸시, 압제자의 횡포,
교만한 자의 작태, 무시당한 사랑의 아픔,
법의 지둔한 원조, 관리의 건방진 꼴,
참을성 있는 착한 이가 못난 놈에게서 받는 수모..
누가 이 따위들을 참겠는가 ? 만일 단도 하나만으로
스스로 자신을 잠재울 수 있다면, 누가 짐을 지고,
피곤한 목숨에 눌려 끙끙대며 땀 흘리겠는가 ?
죽음 후에 있을 그 무엇에 대한 두려움,
아무 길손도 되돌아오지 못하는 그 미지의 나라가 의지를 흔들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불행을 재촉하느니
차라리 주어진 불행을 참으라 하지 않는다면 -
이리하여 깊은 사색은 우리를 모두 비겁자로 만들고,
그래서 서슬 푸른 결단의 색깔이
창백한 사색의 색깔에 덮여 빛을 잃고
의기 충천하던 굉장한 계획도
이것 때문에 그 힘찬 물결이 꺾이고
행동이라는 이름을 잃는 것이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에 나오는 미오와 타쿠미의 사랑에 흠뻑 빠지고 나서 현실의 사랑을 시작하려면 조금 아니 아주 많이 힘이 들꺼같다. 말 한마디를 건네는것조차 부끄러웠던 고등학교때의 짝사랑과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낳아 행복하게 살아가지만 갑작스런 아내의 죽음에 힘들어하는 남편과 아이를 위해 '비의 계절' 동안만 아내가 잠깐 그들을 찾아온다. 사실 '비의 계절' 동안 찾아왔던 아내는 9년이라는 미래를 건너뛴 20살 아내의 꿈이었고, 그들은 그런 꿈같은 그녀를 맞이해 6주간의 달콤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말을 하지 못했지만 서로가 서로를 짝사랑했다는 사실과 20살의 아내는 자신의 꿈을 통해 28살에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한 남자와 그녀의 꿈을 통해서 본 자신의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찾아간다는 이야기. 애절한 마음을 간직한채 간절히 기다리고 또 자신보다도 상대를 더 사랑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이 영화를 보면서 과연 사랑이 실제로 저렇게 이상적일 수가 있을까 싶었다.

너무 익숙해져 참지 못하고 늘어놓았던 말들이 상대에겐 천둥과도 같은 상처가 되기도 하고, 처음에 반했던 그 모습들이 시간에 퇴색해져 미워보이기도 하고, 애써 노력하지 않으면 더 이상 서로를 위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지 않기도 하고, 관계를 유지하지 못할정도로 지치고 힘이 들어 이별을 고하기도 하고, 또 다른 제 3의 인물과 사랑에 빠져 그에게 이별을 고하기도 하는 것이 현실이 사랑이 아니던가. 현실의 사랑을 하고 그 사랑에 수긍하면서도 우리는 한편으론 이상적인 사랑을 꿈꾼다. 나와 그가 이런 사랑을 현실에서 실현하기에는 현실은 너무나도 팍팍하고 애꿎은 장애물들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극장에 들어가 이런 사랑이야기를 본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크면 클수록 신이 될 수 없는 인간의 고통은 커져만 간다. 지상에서의 사랑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는 법. 너무 이상적인 사랑에 맹목했다가는 현실의 사랑의 티끌만한 장애물에도 사랑을 탓하게 되는데, 그런 그의 머릿 속엔 이상적인 사랑이 사랑의 표본으로 자리잡고 있어 그 어떠한 사랑의 달콤함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홀로 허공을 헤매이는 외로움을 맛보게 될 것이다. 이상을 말하는 영화를 보는 건 현실의 불충분을 충족시키는 정도가 딱 좋은 거 같다. 더 이상도 이하도,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겐 버거운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만나러 갑니다> 를 보고난 후엔 <사과> 를 연이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꺼같다. ㅋㅋ

그런데 확실히 둘 중에서 <지금, 만나러 갑니다> 가 더 아름답긴 하다.

2010년 5월 18일 화요일

아무도 모른다

도시 한복판. 해가 뜨는 아침에서 어둠이 잦아드는 저녁이 될때까지 나의 존재를 일부러 인식시키려 하지 않는이상에야 아무도 나를 모른다. 존재를 부각하지 않아서라기보다는 사실, 도시의 사람들은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다. 최대한 밀착해서 앉게 되는 지하철에서조차 우리들은 아무 말이 없다. 서로를 알아야할 이유도 없을 뿐더러 서로에게 관여할 관심 또한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하철 속 사람들을 제대로 응시하는 것에 민망함을 느끼곤, 아무도 모를 곁눈짓으로만 서로를 염탐한다.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속의 어른들이 그렇다. 세상으로 버림받아 점점 세상으로부터 멀어져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곁눈짓으로 보면서도 그들에게 관여하지 않는다. 어른들의 무관심 속, 덕분에 세상으로부터 존재를 부여받지 못한 아이들 중 하나가 죽어 땅에 묻히는 순간까지 세상과 어른들은 그들의 존재를, 아무도 모른다.

이 영화를 보면서 감히 내가 그런 어른들을 향해 비난의 말을 뱉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호해줘야할 사람들을 보고서도 그냥 돌아섰던 적이 없지않아 있었던거 같다란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생각에만 그쳤었지 실제로 그들을 감싸안아 준 적은 제대로 있었나 싶었다. 이런 나의 행동이 아무도 모른다 속의 어른들의 무심함과 다를게 뭐가 있나 싶다.

개인주의의 도를 넘어선 서로에게 마음의 얼굴을 내밀지 않는 사회.
어쩌면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이 떠나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자신의 영역이 버거울 정도로 넓어 다른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야박함이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가 끔찍한 점은 픽션이라는 어느정도의 과장이 가미된 이야기가 아닌 실화를 토대로 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스토리가 되기 이전에 실제 있었던 사건이라니. 한 마디로 이 영화의 잔인함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가 만들어낸 결과물 중 하나라는 점이다.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아이들을 수상쩍게는 생각하지만 금새 아무렇지 않게 여겨버리는 무관심한 어른들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고, 어린 아이들을 내버려두고서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 떠나 1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는 이기적인 엄마가 살아간다. 자기만을 향해 있어 남들을 얼마나 괴롭게했는지도 모르는 무관심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도 모르고 지내왔던 우리들에게 던지는 일침과도 같은 영화이다.

2010년 5월 17일 월요일

상상력

광인, 연인, 시인은 모두
상상으로 꽉 차 있다.
광막한 지옥이 다 담을 수 없이 많은 악마를 보는 자,
그건 광인, 연인도 미치기는 마찬가지.
집시의 검은 낯짝에서 헬렌의 아리따움을 본다.
시인의 눈은, 황홀 속에
하늘에서 땅으로, 땅에서 하늘로 구르며
알 수 없는 사물의 형상을 상상으로 빚어내면,
시인의 붓은 그것들을 형체로 바꾸어,
허깨비에서 존재의 자리와 이름을 부여한다.

-셰익스피어 <소네트집>
그럴수도 있다 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라는 우물은 너무나 좁은 거 같다. 세상엔 나만의 시계만 돌아가는 건 아니니까. 나라는 시간이 바삐 움직이는 만큼 너의 시간도, 그리고 그의 시간도, 우리 모두의 시간이 같이 변화하는 거니까. 나만을 향해 굽어있는 시계바늘을 조금은 자중해도 괜찮을꺼 같다. 그리고 타인들의 시선에서 타인들의 시계를 그리고 나의 시계를 바라보는 방법을 익혀두는 것도 좋을꺼 같다.

그런 면에서, 알고보면 세상의 모든 일과 사람들은 쉬이 비난할 수 없다.

한 끝 차이만 벗어나면 이해할 수 있다.

2010년 5월 13일 목요일

부산국제단편영화제가 어제 시작되었다. 마침 가까운 영화관에서 상영 중인지라 오늘 일 마치고 가서 봤다. 이번 전주영화제 가서도 느낀 점인데, 영화제에 초청된 영화들에는 한계가 없다. 그리고 사회가 말하는 '적당한, 보통의' 라는 형용사도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가끔 생각하곤 하는 엉뚱한 생각들, 입 밖으로 내기에는 사회의 편견들이 무서워 하지 못했던 생각들, 이상한 애 로 오인받을 수 있을 법한 생각들 등등. 모든 이야기들이 영화란 통로로 재탄생 됨을 보니 마치 깜깜한 영화관 속 나 혼자 어디론가 떠나있는 기분이었다. 캬- 영화란 이런거구나 싶은 기분이 무척이나 들었었다.



오늘 봤던 단편들은 죄다 외국꺼였는데 외국 단편들은 '단편'이라는 짧지만 강한 임팩트에 힘을 많이 주는 듯하다. 그래서 꽤나 매력적이었다. 그리 많이 보진 않았지만 내가 봤던 우리나라 단편들은 대부분이 주제가 무겁고 이야기를 전개해가는 과정 또한 음습하고 무거운 경우가 많았던거 같은데, 오늘 봤던 단편들에선 무거운 얘기를 진행하는 중임에도 자체적으로 산뜻해지려는 힘이 강하다는 걸 엿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속의 철학에 관한 묘사를 하고 있는데도, 심지어는 흑백의 화면으로 모두가 검은 장례복을 입고서 죽은 사람이 뉘여진 관을 앞에 두고서도 간혹 터지는 검은 옷을 입은 그들의 웃음이 어디론가 날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여겨졌다는 점에서만 봐도 무거움 속 산뜻함을 엿볼 수 있지 않은가. 묘하다. 억지로 가벼워지려하지 않는데도 산뜻할 수 있다는 점이.



아.. 단편영화.....
김기영의 하녀

김기영의 '하녀' 속의 하녀는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와도 같다. 순간 순간 일어나는 감정의 본능에 충실히, 너무도 충실히 실행에 옮기니 광기 어린 사람 같다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광기 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우리의 본질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체에 거르지 않아 방금 잡은 듯 팔딱거리는 그녀의 감정들이 감추고 싶을 정도로 적나라하다. 아버지는 같지만 자신의 아이는 안주인의 강요 아닌 강요로 사산되고 안주인의 아이는 멀쩡히 세상 밖으로 나와 사랑받고 있는 모습을 본 그녀의 분노는 극에 달해, 그들이 한 눈 팔고 있는 사이 그들의 둘째아들을 죽이게 된다. 그리고 또 그녀는 집주인을 예사롭게 보지 않는 자신의 친구에게도 서슴없이 칼을 드밀며 공격해댄다. 극에 치달은 그녀의 감정들은 분노와 질투를 넘나들며 헐떡거린다. 팔딱댄다. 마치 방금 배를 갈라 김이 모락모락 나는 날짐승의 오장육부를 보는 듯하다. 아마도 그녀가 하녀 속의 그녀가 아니었다면, 김기영이 만들어낸 팜므파탈적인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저런 감정을 그리고 표현을 할 수 있었을까. 일반적 이란 말로는 도저히 그녀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아무리 분노를 하고 질투를 느껴도 어느정도는 자기 감정의 체에 걸러 표현을 하기 나름인데 그녀는 숨기지 않고 날카로운 발톱을 이리저리 흔들어댄다. 어찌보면 너무나 순수해서 그런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녀는 거침없다.

gmail 만들다

기념적인 날이로군.
그 동안 사이트별로 블로그란 블로그는 다 만들어서 사용해봤는데 제대로 정착해서 뿌리 박은 블로그가 없었다. 그만큼 내 근본이 게으르다는 말이 될수도 혹은 나에게 맞는 블로그가 없었다는 말이 될수도 ? 직감적으로 전자일 확률이 높다는 걸 알면서도, 후자의 영향이 더 깊을꺼라고 박박 우기는 나. 쨋든, 나두... 이제는 좀 정착하고 싶어요...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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